족보를 펴고 나는 왜 이렇게 외롭나 하고 우리 가계 기록을 다시 챙겨보는 일이다. 고조부님과 증조부님 그리고 조부님이 3대 외아들로 내려왔으니 가까운 촌수가 귀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선무원종2등공 할아버지가 12대 조부다. 그랬다면 자손도 늘어날 수 있는 여건의 가계혈통을 지닌 일이다. 그 아래 나와 가까운 5대 할아버지 형제가 가장 번성한 시기도 있었다. 5대조 방조의 할아버지들도 족보에는 형제가 많아 자손이 번성한 시기도 있었다. 그 당시 5대조 할아버지 4촌들이 모두 4형제, 5형제 집이었다. 그 뒤 족보에는 자손이 끊긴 할아버지가 많아 보인다. 아마도 전쟁 같은 위험시기와 전염병이 나돌아 인류사의 멸종을 걱정하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천연두는 종두가 발명되지 못한 시절 많은 인명의 피해가 발생한 역사도 있었을 것이다. 콜레라 같은 수인성 전염병은 마을 우물을 같이 쓰던 때라 몰죽음을 피할 수 없는 때도 있음 직하다.
5대조부 5형제 자손 생존 확인된 집은 우리 사촌과 한실할배 두 집이다. 東權(5대조)-天斗(고조)-元德(증조)-泰中(조부)景植(부)=우리 집 東權(5대조)-天職(종고조)-榮德(종증조)-딸(재종대고모)=한실할배 집
5대조 할아버지는 5형제다. 족보를 보면 5형제 모두 손자까지 나오는데 어쩌다가 후대 소식이 없어졌다. 5형제의 자손이 손자 대까지 세력 좋게 족보에 기록으로 펼쳐져 있나 했다. 우리 할아버지 아래로만 외줄기로 이어지는 외로운 집안 계보로 달랑 남게 되었다. 조선 말엽과 대한제국을 내려와 총독 정치 국난극복 시대의 어려움에 흩어진 가문 내력이다. 태평양전쟁과 겹치면서 환난의 연속을 겪은 가문이다. 5대조 할아버지 5형제 당시에는 당당한 위세를 가진 족벌이다. 그런데 가문의 자손이 위태하게 겨우 이어진 우리 직계만큼이라도 견디고 지켜왔으면 지금은 큰 마을을 이룰 족벌을 세웠을 일이다. 더러는 일본이나 중국 같은 이웃 나라에 흩어진 자손이 남아서 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문중에는 만주로 사할린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여럿이다. 중국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도 더러 나타났다. 한실할배(榮德(종증조부) 산소가 사천 공동묘지에 있어서 내가 해마다 벌초를 했다. 어느 날인가 누가 벌초를 나보다 먼저 해서 알아보게 된 것이다. 한실할배 외손자가 부산시 기장에 살고 있어 자기 할아버지 벌초하러 와서 외조부 벌초를 한 모양이다. 자식이 달랑 딸 하나밖에 없어서 후손 절손되었다고 내가 벌초를 해온 일이다. 그런 이후 다음부터 두 번이나 이미 벌초하고 간 뒤라 헛걸음하고 벌초를 멈추었다. 이제 내가 하지 않아도 외손이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저께 등산 갔다가 한실할배 산소를 찾아보니 벌초하지 않는지가 여러 해가 된 듯하다. 소나무와 참나무와 감나무가 제법 크게 자랐다. 오늘 도구를 준비하고 가서 벌초를 마쳤다. 재종대고모가(한실할배 딸) 돌아가셔서 소식도 모르고 언제부터 벌초도 그만한 모양이다. 이제 내가 사는 동안은 다시 벌초할 작정이다. 아들이 없는 종증조 할아버지의 종증손인 내가 있어서 할아버지 산소를 돌보는 일은 마땅하다.
종증조부는 동생인 강원도 아제라고 불렀다는 할아버지의 친동생과 형제로 있었다. 동생은 강원도 아제라는 별명인지 어머니는 그렇게 불렀다. 객지로 돌아다녀 그 후 태평양전쟁 통에 생사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젊어서 객지에 돌아다니다가 동생도 잃어버리고 엿장수를 하다가 늙어서 몸이 불편하니 우리 집에 같이 살아온 나의 기억이다. 부인인 종증조 할머니는 화재로 살던 집이 소실될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 돌아가실 때는 빈손으로 우리 집에 의지하게 되었다. 돌아가실 때도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운명하셨다. 그 할아버지 딸인 부산시 기장의 할머니가 오시면 어머니를 끌어안고 반갑다고 눈물로 우는 모습이 생각난다. 어머니보다 나이가 훨씬 젊었다. 나와 촌수 관계는 재종대고모인 셈이다. 그 집 큰아들은 나보다 한 살 적었다. 안타깝게도 큰아들은 총각 때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은 나보다 3세 나이가 적다. 지금은 서로가 바쁘게 살다가 보니 소식을 전혀 모르는 상태다.
지금 우리가 잘사는 이유도 우리 어머니가 베푸는 마음의 넉넉한 교훈 때문이라 믿고 싶다. 당시 이웃에 살던 문중 나이 많은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 손부는 타고난 천부적인 수난 부녀자의 처지라고 혀를 끌끌 차며 내둘렀다고 한다. 시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이어 남편 없이 시어머니 3년을 대변 소변 받아내는 어려움을 겪고도 다시 한실할배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야 하는 수고도 불평 없이 한다는 칭찬이다. 종가에 시집와서 아들 못 낳은 한으로 아버지가 첩을 두어도 시샘하지 않은 어머니다. 남편이 일본에 살 때는 첩을 몇이나 거느렸는지 알 수 없다. 고모님 말로는 배우 같은 아름다운 여인을 데리고 온 적이 있다고 나만 알게 이야기를 했다. 귀국해서도 한 사람의 첩이 있었으나 아들은 나 하나뿐이고 딸도 우리 두 누님뿐이다. 자손이 귀한 집이라 별나게 인생 간섭이 많은 우리 할머니도 아들 축첩에는 간섭이 없었던 것 같다. 대대로 어렵게 이어온 우리 가문에 손자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나도 태어나기 전의 일이니, 할머니의 자손을 기다리는 심정은 알 만도 한 일이다.
아버지는 처음 일본에 사업차 출국하려니 총독부 면장이 허가해 주지 않았다. 경상북도에 친구와 연결로 허가를 받아 일본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30대 젊은 나이에 친구가 많아서 면장 허가쯤은 구애받지 않게 지냈단다. 오래전 외가 제사 때 아재를 만나 아버지 인간관계 사교가 보통보다 뛰어나다고 감탄하는 말을 들었다. 일본에 같이 가서 생활하며 자형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자형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감격스럽게 말했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사교술을 자기 자랑 마냥 즐거운 이야기로 털어놓았다. 친구 사귀는 재주가 능수능란하다고 탄복하는 목소리다. 그런 재주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머니는 늘 그런 일을 못마땅해한다. 사람이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시하면 적이 생긴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자기 아들이 똑똑하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어쨌거나 종손에 아들이나 많이 낳아 후대를 안전하게 이었으면 하는 소원뿐이다. 삼촌이 결혼 15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다고 숙모님을 괴롭히는 말을 쉽게 한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혀가 빠지게 노동해도 싸다고 힐난한다. 얼마나 손자가 소원이면 그런 말을 함부로 했을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40세도 살지 못하고 비명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내가 두 돌도 되기 전의 불행한 일로 나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장편소설"세상에 왜왔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