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도심 풍경과 산타루치아역
2024. 4. 22
(2사무 12,8)
그래도 적다면 이것저것
너에게 더 보태 주었을 것이다.
묵상ㅡ
오늘 읽은 대목에서는
묵상할 포인트가 제법
많았는데, 위 말씀을
헤드카피로 올렸다.
자신이 받아누리는
것의 감사함을 모르고,
욕심과 탐욕을 저지르며
만족하지 못했던 다윗의
모습이 안타까워서다.
주님께서는 그동안
민망할 정도로 다른
주군의 아내들을
뺏어다 다윗에게
몰아주면서 남자로서는
최고의 영화를 누리게
해주셨는데, 그게 모자랐나!!!
오죽하면, 네가
적다고만 하면
이것저것 더 보태줬을텐데
어쩌자고 말도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른게냐!!
(2사무 11,27)
그러나 다윗이 한 짓이
주님의 눈에 거슬렸다.
심히 거슬리셨던 거다.
주님께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맘이 상하셨거나
눈에 거슬리셨거나
화가 나셨다고 말로
표현하신 대목에서는
꼭 보속값을 억소리나게
치르게 하셨다는것을 기억한다.
다윗이 시편 51장에서
부서진 영이 되어
처절하게 회개했다고는
하지만 간신히 목숨만
건진 것이지, 앞으로는
집안에 칼부림이
난무할것이고, 특히나
밧세바가 낳은 아들은
죽음으로서 대속물이
될거라고 하시지 않았나.
상세히 기록하진 않았으나
아들을 잃고 아들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으랴!
그 여인은 아름다웠다. 라는
한줄의 유혹을 끊지 못하고
아끼는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범했으니,
그 작은 마음의 동요가
괜찮겠거니, 임금인데
이런 선택권이야
당연히 있을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지로 몰아갔던거다.
(2사무 12,8)
그래도 적다면 이것저것
너에게 더 보태 주었을 것이다.
그르게말야.
주님이 주신 거나
잘 누리고 지키면서
살것이지, 무슨 욕심을ㅠㅠ
아니 그런 욕정이
올라왔으면 주님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상의를 했으면 좋았잖아.
다른때는 주님, 제가
싸우러나가도 되겠습니까!
저들을 제손에 넘겨
주시렵니까! 하면서
끈적한 친밀감을 드러내며
상의도 잘하더만,
밧세바를 몰래 들일땐
정말 그런 대사가
한개도 등장하지 않는다.
죄를 지을땐 이렇게 주님과
연결된 끈이 끊어졌거나
주님 마음에 꽂아둔
연결 콘센트가 빠졌거나
아니면 사탄의 유혹에
연결된 힘이 더 컸거나
뭐 그랬을것 같다.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언행하는거, 다윗만
그럴까? 노노노!!
우리 역시 그럴 가능성
농후하고, 또 마음의 불순한
동기와 욕구의 충동이
거세지면, 언제든
유혹에 빠질수 있다는것,
그게 오늘의 교훈인거다.
그리고 오늘 대목에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따지거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시켜서
말을 전하게 하는 방식,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나도록 손에
피 안묻히고 뒤에서
조종하려는 리모컨의
역할이 야비하게 드러난다.
나라고 우리라고 그런 역동,
없을까 성찰해봐야 할터,
그렇도록 나약한 인간의 속성,
그리고 악습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때로는 남을 비난하고
죽이는 말로서 살인을 하거나
또 누군가를 통해 나의 억울함을
씻고 증명하기 위해 잔머리를
쓰면서 상황을 조종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배우고 수련하여,
그런 불순한 처세술을
정화하고 고쳐나가면서,
혹여 죄를 지었더라도
다윗처럼 부서지고 꺾인영이
되어 납작 엎드려서 시편 51장을
읊어야겠지 말이다.
주님께서는 어쩌면 다윗의
왕조를 더 겸손하고 탄탄하게
세워가시기 위해 다윗에게
살인과 간음이라는 대죄를
허락하셨는지도 모르겠다는
입증되지 않은, 심증만 가득한
생각을 해보면서 오늘 묵상을
가름하고자 한다.
주님, 다윗의 나약함이 바로
저희의 모습입니다.
당신의 도우심에 기대지
않고서는 저희라고 어찌
다윗과 같지 않겠습니까.
부디 약하고도 불쌍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꽉 붙잡아 주소서
첫댓글 묵상 글 잘 읽고 갑니다.
요셉피나님
묵상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