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is 2권 06 수련에 관하여(두번째)
이 후반부에 대한 설명은 카페지기님의 요약이 잘 되어서 여기에 옮겨 둡니다.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다른 흐름으로 논리가 전개가 된다.
결국, 가장 중요한 죽음마저도 우리의 상식과는 다를 수 있으며,
말만이 아닌 업적과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치켜세우지도 말고 그렇다고 깍아내리려고 하지도 않는 신중함을 가지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알아가는 수련을 해야 한다고....
수련에 관해서 두번째 이야기는 다음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자기 자신은 누구에게나 대단히 훌륭한 공부거리다.[84]"
내가 여기에 쓰는 것은 내 행위가 아니다. 나의 본질이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데는 신중해야 하고, 자기를 증언할 땐 비천하건 고매하건 똑같이 양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착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하거나 거의 그렇다고 생각하면 나는 목청껏 그렇다고 외칠 것이다. 사실보다 자기를 깍아내려 말하는 것,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바보짓이다.[87]
하지만 자기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데 왜 그런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주의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말한다.
내 생각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과대망상을 갖고 분별없이 자기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이 악덕의 실체이다. 그것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은, 자기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자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못하게 만드는, 저 관습의 명령과 반대로 하는 것이다. 오만은 생각에 깃든다. 혀는 아주 조금 거들 뿐이다.
자기에게 전념하는 것이 저들에겐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와 부단히 사귀며 연마하는 것을 지나친 자기애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지나침은 자기를 피상적으로 더듬는 자, 자기가 이룬 일에서 자기를 보는 자,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몽상 또는 게으름이라고 부르고, 자기를 충실하게 만들고 지어 가는 것을 공중누각을 짓는 일이라고 여기며, 자기를 제삼의 물건인 양 저 자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서만 생긴다.[88]
첫댓글 몽테뉴가 동양사상에도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어쩔 때는 서구인이 쓴 글이 아닐 정도로 동양인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 아무튼, 동양이든 서양이든 과거나 지금이나, 현자들은 자기 수양과 성찰을 중요한 덕목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