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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전달자’ KDI는 정부와 교류하며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진념 |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2013년 KD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2010년 전북대학교 석좌교수
2005년 포스코 청암재단 이사
2002년 삼정KPMG 고문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 경제부총리
1999년 기획예산처 장관
1997년 기아그룹 회장
1995년 노동부 장관
1991년 동력자원부 장관
1990년 재무부 차관
1983년 경제기획원 기획차관보
1940년 전북 부안생 진념
가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9월의 끝자락, 진념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조병구 연구위원이 홍릉 글로벌지식협력단지에서 만났다. 공직생활 내내 KDI가 맡은 새로운 사업, 새로운 계획마다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온 진 부총리. 그가 생각하는 KDI의 모습, KDI의 비전은 무엇인지 직접 들어봤다.
부총리님, 『KDIans』 덕분에 오랜만에 뵙는다. 먼저 개원 50주년을 맞은 KDIans 가족들에게 인사 부탁드린다.
KDI 개원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저는 우리 경제사회발전 과정에서 KDI의 역할을 높게 평가한다. 거시경제뿐만 아니라 복지, 교육, 노동 등 각 분야에 많은 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주셔서 정부로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KDI는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지적 자산이다. 이젠 새로운 50년을 어떻게 포지셔닝할지 고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 그 뜻을 펼쳐주길 기대한다.
설립 초기부터 KDI와 인연이 깊으셨던 것으로 안다. KDI와는 언제부터 작업을 함께 하셨는지.
저는 1963년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KDI 출범 당시엔 예산・물가국에 있다가 1974년 기획 파트로 와 자금기획과장, 종합기획과장을 맡으면서 KDI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1, 2, 3차까지는 대부분 세계은행이나 국제기구의 도움을 받았는데, 1977년부터 시작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KDI가 중심이 돼서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 정책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협업은 4차 계획 수립 때부터라는 말씀이신데…
그렇다. 특히 1976년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유쾌한 반란이다. 당시 정부는 세 차례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상태였는데 여전히 성장 중심 발전모델에 치우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KDI 주학중, 서상목, 박종기 박사 등이 사회개발, 사회복지의 목소리를 냈다. 과거의 성장일변도 전략만으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소득불평등이 심해지고 소외계층이 많아지고 있으니 우리 현실에 맞는 사회개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성장해야지 복지가 웬 말이냐’ 하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KDI에서도 이들의 주장은 비주류였다. 하지만 저와 뜻이 맞았던 KDI 박사들은 사회보험, 최저임금, 의료 보건 분야 등 사회개발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 이틀 동안 차관실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사회개발 개념을 도입하지 않으면 4차 계획을 못 만들겠소’ 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그때는 문화가 그랬다. 옳은 이야기라면 지위 고하를 떠나 귀담아듣고 수용하는 열린 분위기였다.
1970년대 대학생이었던 시절을 되짚어보면 그때 사회복지라는 화두를 꺼내셨다는 것이 정말 획기적이다.
그렇다. 다음 날에도 논쟁을 벌이던 중에 제가 요즘 개발 중인 반포아파트에서 취로사업 나온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냐, 전쟁 나면 자기가 아파트 한 곳을 차지하겠다라고들 한다, 이러면 우리 사회가 분열된다, 단계적으로라도 사회복지로 가야 한다 했더니 부총리실로 보내셨다. 부총리실에 가서 또 설명을 드렸더니 보고자료를 만들라 하셨다. 일개 사무관, 과장들이 하는 얘길 들으셨던 게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그래서 4차 계획엔 성장, 능률과 함께 ‘형평’이 핵심개념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그래, 이게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이지’ 하셨다. 유쾌한 반란의 결과다. 4차 계획에 형평이 들어가고 5차 계획부터는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이름까지 바뀐다. 그때까지 우리 의견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대통령이 인정하시니 동조하기 시작했고 KDI 박사들도 함께 힘을 얻었다.
“아시아 외환위기 극복은
대통령의 리더십과 국민들의
열의가 이룩한 결과다.
특히 주효했던 건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했던 것,
이런 리더십과 용인술이
지금도 필요하다고 본다.”
제가 알기로는 KDI 공공투자관리센터, 경제정보센터, 국제개발협력센터의 시작에도 부총리께서 관여하신 것으로 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1980년대 제가 물가국장을 할 때 대통령께서 물가 안정을 위해 국민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하셔서 국민경제제도연구원 (현 경제정보센터)이 만들어졌고, 기획예산처 장관 시절엔 재정법을 고쳐서 500억 원 이상의 재정사업에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하게 했는데 이것이 제도화되면서 공공투자관리센터의 기초가 됐다. KSP 시작 때는 우리가 북한의 경제사회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했다. KDI가 주관하면서 영국이나 캐나다 등의 연구소와 연계해서 북한의 당 관계자들을 교육시 키고 설득시켜 궁극적으로 한국 모델을 북한에 전파하고 그들을 국제사회에 동참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했는데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우리의 발전모델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했다. 2004년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두 나라에서 처음 실행해 오늘날 약 70여 개국, 1,000여 건의 지식공유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KDI가 맡은 새로운 사업, 새로운 계획에는 부총리께서 늘 함께하셨다.
KDI는 별로 인정을 안 해주지만(웃음) 저는 KDI와 인연이 참 많다고 생각한다. 제가 동자부 장관을 마치고 1993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한국경제 발전사 강의를 해달라고 했을 때 KDI 박사들 도움을 받아 강의자료를 만들었던 기억도 있다.
제가 기획조정실장을 맡았던 2012년 말 새로운 예산이 들어 왔다. 알고 보니 부총리께서 『코리안 미러클』이라는 것을 만들자고 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기획하시게 됐나.
기업인들에게서 다른 나라에 갔을 때 한국적 가치와 경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자료가 부족하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또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과거 우리가 어떤 고난과 실패 과정을 거쳐서 발전했는가를 정확히 알려줄 자료가 부족하다는 얘기도 많았다. 이걸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이룩한 경제사회발전 경험을 스스로 평가하고,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못한 것은 또 못한 대로 모아 성찰하고 우리 국민은 물론 해외에 전파하자는 생각이었다. 보통 과거 경제사 관련 자서전은 있는데 그건 자기 잘했다는 얘기들만 있으니까.(웃음)
정책을 세우고 추진하면서 부딪히는 과정,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경험을 알 수 있어서 참고를 많이 하는 시리즈가 됐다고들 한다. 지난해 6권까지 나왔다.
그런데 세상에 너무나 많은 정보가 쏟아지다 보니 전파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고 본다. 일례로 고용보험제도 같은 것도 얼마나 많은 토론과 논쟁, 실패를 거쳐서 지금까지 왔는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나마 1권은 마케팅이 잘 돼서 기업 회장들 평가가 좋았었다. 영문으로도 만들어 달라고들 해서 KDI에서 영문화 작업까지 했다. 어려운 일을 맡아 조정하고 주관해준 KDI와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다.
특히 아시아 외환위기 시절을 다룬 『코리안 미러클』 4권을 인상 깊게 읽었다. 부총리께서 중책을 맡아 그 위기를 돌파하는 딱 그 장면이다. 그 힘겨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시나.
전대미문의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대통령의 리더십과 우리 국민들의 열의가 이룩한 결과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그분 나름의 대중경제 철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 국면을 맞아 실용적인 개혁론자 입장을 지키셨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사용하신 것이다. 이념을 넘어 진영을 넘어 중요한 자리에는 그 미션을 가장 잘 수행할 사람인가를 보고 골라서 쓰셨다.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묻고. 그런 리더십과 용인술이 지금도 필요하다고 본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말씀에 저도 공감한다.
또 국민들이 우리 경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열망, 열의가 대단했다. 1998년 2, 3월에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 내용이 CNN에 보도됐다. 그걸 본 캐나다 수상이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한국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하는 뉴스 봤는가. 여성들이 금반지, 금비녀를 들고나와 모으고 있다. 저런 국민들이면 반드시 일어설 수 있겠다. 우리 같이 도와주자”라고 했다고 한다. 국제적으로 그런 정서를 이끈 게 바로 금 모으기 운동이고 우리 국민들이다.
“뼈를 깎는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싱크탱크로서의 플랫폼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현시점에 KDI의 포지션은
어디이고 집중해야 할 정책 어젠다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를 바란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사실 국민들이 협조하고 솔선하는 게 참 많다고 생각한다. 외환위기 전후 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
2002년 3월 뉴욕에 한국 투자유치 설명회를 하러 가게 됐다. 그전에 어떻게 행사를 치르면 효과적일지 한국 부총리에게 무슨 얘길 듣고 싶어 할지 골드만삭스에 자문을 구했다. 그랬더 니 첫 조언이 ‘발표는 짧게, 질의는 길게’라고 하더라. 보통 한국 사람들은 혼자 발표하고 질의응답은 하는 둥 마는 둥 해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15분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50분 질의 응답으로 가자, 결정을 해놓고도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겁은 좀 났다.(웃음) 1998년 초대 재경부 장관이 외평채 발행을 위해 갔던 똑같은 호텔, 똑같은 룸으로 예약하라고도 했다. 행사 당일, 월가 관계자, 대사, 학계 등 사람들이 많이 왔다. 골드만삭스에서 사회를 봤는데 그분이 “한국 경제에 이렇게 관심을 갖는 뉴요커가 많은 줄 알았으면 양키스타디움을 잡을 걸 그랬다” 멋지게 소개하는 순간부터 완전 기를 잡은 느낌이었다. 이후 “4년 전 전임자가 왔을 때 한국 경제는 정말 수렁에 빠져 있었다, 여러분에게 호소해서 외평채 40억 달러를 발행했던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그런 물질적・정신적 지원에 힘입어 오늘 우리 경제는 산업구조, 재정건전성 등 각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 투자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발표를 마치자 질문이 많았다. 하이닉스 매각, 중국과 남북 문제까지. 하지만 한국인들의 잠재력을 믿어 달라고 답하자 박수가 터졌다. 내 엉터리 영어 답변에도 여러 차례 박수를 받았다.
그러고는 무디스, S&P에 가서 한국 경제가 달라지고 있으니 신용등급을 두 단계 높여 달라고 조목조목 설명하고 논쟁을 벌이다가 돌아왔다. 4월 초 영종도국제공항에서 주요 장관, 시도지 사, 경제단체장 등이 모여 월드컵 최종 점검회의를 하고 있는데 무디스 신용등급이 두 단계 올라갔다는 메모가 들어왔다. 놀라서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는데 그 모습을 대통령께서 보시고 무슨 일인지 물으셨다. 그래서 무디스 신용등급이 두 단계 올라갔다는 전갈이 왔다고 보고드렸고, 30분 후 공식적으로 발표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다들 회의하다 말고 현장에서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특히 대통령께서 너무 기뻐하시는 그 모습이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때마침 KBS 박찬숙 앵커에게 축하 전화가 와서 “지난 4년간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낸 국민과 기업이 이긴 거다. 그동안 고생해준 국민들의 승리”라고 답했는데 그것이 공직생활 내 마지막 공식 멘트가 됐다.
절체절명의 시기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한 것이 다른 개도국과 구별되는 우리나라의 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지금도 위기는 계속 진행 형이다. 현 상황을 극복하고 ‘위드 코로나’를 이루기 위해 정부 혹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
코로나19가 우리 경제사회에 미친 부작용은 굉장히 크다. 특히 자영업자가 상대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만 겪는 것이 아니고 범세계인이 경험하고 있으니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싸움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포지셔닝할 것인가. 과연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생각해야 할 것이고 우리 국민들의 자질과 역량을 높여 성장잠재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예를 들어 노동 문제만 봐도 여전히 산업화 초기 노사관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할 수 있다(Can-do-Spirit)”는 비전을 줘야 하는데 오늘날 비트코인 같은 일확천금에 기대고 내 집 마련의 꿈은 사라지고,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야겠다는 정서가 퇴색하고 있는 게 제일 큰 걱정이다.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게 하고 어려운 계층에게는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면서 사회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가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총리께서는 한국 경제 발전 과정에서 KDI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시는지 향후엔 어떤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보시는지 궁금하다.
KDI가 자체 싱크탱크 역량을 갖고 좋은 정책 대안을 제시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정부와 교류하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정책 전달자’가 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일례로 5개년 계획을 만든다고 하면 언론인, 학계, 관계단체 이런 곳들을 연계해 정책토론을 열고 의견을 모아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역할이 사라졌다. 경제부 기자, 부장들과 정부 담당자들이 같이 1박 2일 토론하고 논쟁하는 창구 역할을 맡았었는데 지금은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고 있다.
그럼 앞으로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
주요 정책연구기관으로서 KDI가 플랫폼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 난 못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 보건, 산업 각 분야별 연구소들은 그들 나름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본다. 사회 전체 맥락을 읽고 종합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KDI가 주도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하고 있으니 위상이 떨어지고 어려움이 생기는 것 아닌가.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최근 들어 정부 공무원들도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자조적인 얘기가 들려온다. 자기비하적이고 자기패배적이다. 자신의 위치는 자신이 지켜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지키려는 자존 없이 공직사회를 누가 존중하겠나. KDI도 마찬가지다.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싱크탱크로서의 플랫폼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시점에 KDI의 포지션은 어디이고 집중해야 할 정책 어젠다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KDI에 오래 있었던 원로, 혹은 바깥에 있더라도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자문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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