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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동북 삼성과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북아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산이다. 즉 단군조선과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 우리 민족사가 명멸하였던 지리적 중심점이자 우리 민족의 정신적 혼백(魂魄)이다.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백두산, 그 얼마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이름인가?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는 조종(祖宗)의 산이다. 높이는 2,750m이고, 활화산이다. 북위 41°31′∼42°28′, 동경 127°9′∼128°55′에 걸쳐 있고, 그 총면적은 대략 8,000㎢에 달한다.
백두산은 동쪽과 서쪽으로는 완만한 용암대지(熔岩臺地)가 펼쳐져 있고 남으로는 한반도를 굽어보며, 멀리 북으로는 만주 지방까지 굽어보는 동북아 중심부에 있는 최고봉이다. 동남쪽으로는 백두산을 정점으로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간백산(間白山, 2,164m), 소백산(小白山, 2,174m),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남포태산(南胞胎山, 2,435m), 백사봉(白沙峰, 2,099m) 등 2,000m 이상의 연봉(連峰)을 이루고 있어 양강도와 함경북도 일대가 만주에 포함된 영토라는 관념을 갖게 한다.
신경준 원저의 『산경표』와 백두산 이름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단군조선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었던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백두산의 영기(靈氣)가 한반도에 흐른다는 관념을 표현한 산줄기의 호칭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가. 조선지리학자들의 공통된 산세 인식
조선시대 이전 산에 대한 인식체계를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은 통일신라 후기에 도선(道詵, 827∼898)이 쓴 『옥룡기(玉龍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옥룡기』는 온전히 전하지 않고, 『고려사』 권제39, 「세가」 39 공민왕 6년. 윤9월 조에 나와 있는 사천소감 우필흥(于必興)이 상소에서 인용되고 있다.
즉 “『옥룡기』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에서 시작해서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수(水)는 뿌리가 되고, 목(木)은 줄기가 되는 땅이라, 흑으로 부모를 삼고, 청으로 몸을 삼는다.’ 하였으니, 풍토에 순응하면 번창하고 거스르면 재앙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司天小監于必興上書言 玉龍記云 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其勢水根木幹之地 以黑爲父母 以靑爲身 若風俗順土則昌 逆土則災…)”라고 한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의 여러 학자가 산줄기 체계에 관해 서술한 기록을 남겼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 「천지편하지리문(天地篇下地理門)」에서 제목 중에 하나를 ‘백두정간(白頭正幹)’이라고 하고 그 내용 중 ‘백두대간’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즉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祖宗)이다. ‥‥‥ 그 왼쪽 줄기는 동해를 끼고 뭉쳐 있는데, 하나의 큰 바다와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그 시작과 끝을 같이하였다. ‥‥‥ 대체로 그 한 줄기 곧은 대간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서 중봉을 이루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애당초 백두정간이라 이름 지은 것은 뜻이 있어서일 듯하다.”라고 한 것이다.
『택리지』, 이중환, 1912년(초판본), 조선광문회 발행. 필자 소장본. 1751년 실학자 이중환이 전국의 현지답사를 토대로 편찬한 지리서이다. 『택리지』는 『팔역지(八域誌)』‧『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형가승람(形家勝覽)』‧『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 등등의 여러 이름으로 전하여 오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1751) 「산수(山水)」 편에서 ‘백두대맥’(白頭大脈), ‘백두남맥’(白頭南脈), ‘대간’(大幹) 등의 표현을 하고, 당시까지 부분적으로 논의되던 것과 달리 전국에 걸친 산줄기의 흐름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여암 신경준(申景濬, 1712∼81)은 『산수고(山水考)』의 서두에서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이 산(山)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이 물(水)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나라 산천을 산경(山經)과 산위(山緯), 수경(水經)과 수위(水緯)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즉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인 틀을 날줄로 삼고, 지역별 산과 강에 대한 자세한 특징과 내용을 씨줄로 엮어 국토를 정리하였다.
또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역시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백두산을 두고 “팔도(八道)의 모든 산이 다 이 산에서 일어났으니 이 산은 곧 우리나라 산악의 조종(祖宗)이다.”라고 하였고, ‘백산대간’(白山大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청구도(靑丘圖)』(1834년) 범례에서 ‘산줄기와 물줄기는 땅의 근골과 혈맥(山脊水派爲地面之筋骨血脉)’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산줄기를 모두 연결하여 표현하고 물줄기는 수계별로 연결 표현하는 산경 및 수경 개념은 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에 더욱 체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의 고지도 중에서 정확성과 독창성이 가장 탁월한 지도일 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을 가장 잘 표현한 지도이기도 하다. 『산경표』처럼 산줄기 이름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산줄기를 모두 하나로 연결하여 표현하면서, 높이나 넓이 등 규모에 상관하지 않고 물줄기를 가르는 분수령 역할의 정도에 따라, 대간 - 정간‧정맥 - 지맥 - 기타 작은 갈래 등 4가지로 차등(위계)화하여, 과장하거나 과감하게 축소하여 표현하였다.
이러한 여러 문헌과 고지도에 나타나는 조선시대 산 인식체계의 공통점은 바로 ‘백두대간 산줄기의 흐름’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현행 산맥 체계와 달리 백두산에서 금강산, 태백산, 소백산의 죽령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는 산줄기가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데, 바로 이것이 조선 지리학자들의 공통된 조선의 산세 인식이었다.
나. 신경준 원저의 『산경표(山經表)』
『산경표』, 신경준 원저, 1913년(초판본), 조선광문회 발행.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 지리학자들의 공통된 산세 인식을 이어받아 조선후기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말년에 ‘산경표(山經表)’를 편저하였다. ‘산경표’에서는 산의 줄기와 갈래, 그리고 산의 위치를 족보의 횡보(橫譜) 형식으로 일목요연하게 나타내면서 백두대간, 정간, 정맥 등으로 산줄기에 위계를 부여하였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그 분포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 낙남정맥(洛南正脈), 청북정맥(淸北正脈), 청남정맥(淸南正脈),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湖南正脈) 등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하였다.
백두대간은 ‘산-고개-산-고개‥‥‥’로 이루어진 ‘연속된 산계(山系)’이다. 백두대간은 남북으로 길이를 가지면서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하면서, 동시에 동서로 폭(Width)을 가지면서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연속된 산계(山系, Mountain System)이다. 지도에서는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하는 면(面)과 면의 연결 구조로서 장대한 대상(帶狀)을 이루며, 지상에서는 넓고 높은 공간적 규모(입체, Mass, Body)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백두대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백두대간의 실체는 ‘지대(地帶, Zone)’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경준의 우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교지, 원본, 1761년 2월 10일.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신경준의 북청도호부사』 교지, 원본, 1771년 2월 17일.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일부에서 『산경표』가 신경준의 편저라는 사실에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많은 경우 편저가 사본으로 전사(傳寫)를 거듭하며 전해 내려오는 동안 일부 수정되기도 하므로, 판본이 아니라 필사본일 때 극히 일부의 표현으로 원저자를 부정한다는 것은 매우 성급한 결론이다. 『산경표』가 신경준의 편저(編著)라는 사실은, 1770년(영조 47)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담당한 「여지고」와 이 책은 결이 같다는 변함없는 사실에 의하여 논증된다.
물론 「여지고」에는 산줄기의 이름은 붙어 있지 않지만, 산의 줄기와 갈래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즉 『산경표』는 이 「여지고」 중의 「산천 총설1」을 족보식으로 도표화한 것이며, 이로써 현재 전하는 『산경표』의 백두대간의 모습이 그 이름과 함께 비로소 구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경표』 산맥체계의 특징은 대간과 정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하천의 수계를 기준으로 산줄기를 분류하였다. 또 산줄기의 맥락과 명칭을 체계화하여 대간, 정간, 정맥으로 산줄기에 위계를 부여하고, 산의 분포와 위치를 줄기 또는 맥으로 파악하여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북방강역도』, 신경준, 도침한 장지(壯紙)에 그린 채색필사본, 크기: 72.1×108.2cm.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후손 소장품. 평안도 대동강 하구와 함경도 안변(安邊) 이북의 전역을 그렸다. 오른쪽 상부의 백두산 모습이 매우 거대하고 위세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무엇보다 백두산을 국토의 중심 또는 출발점으로 인식했다는 점이 『산경표』의 특징이다. 나는 신경준이 관직을 퇴임한 이후 고향 순창(淳昌)으로 낙향한 시기 전후에 이르러 『산경표』를 지은 것으로 본다. 나는 신경준 원저(原著)의 『산경표』를 후학 가운데 누군가가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으로 본다.
다. 『산경표』 이후의 개화기 지리관
산줄기를 맥으로 인식하던 전통적 지리관은 개화기 이후에도 그 맥을 이었다.
현채(玄采, 1886~1925)가 쓴 『대한지지(大韓地誌)』(1899)는 갑오경장 이후 현대 교육과정에서 사용된 최초의 지리교과서다. 이 책은 백두산을 전국 산의 조종(祖宗)으로 여기며 산줄기를 정간이라 칭하고 정간이 지리산에 이르러 끝난다고 설명한다.
일제의 통감부 설치(1905년 11월) 이후에 나온 지리교과서도 같다. 정연호의 『최신고등대한지지(最新高等大韓地誌)』(1906), 장지연(張志淵)의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1908), 『증보문헌비고』 「여지고」(1908), 안종화(安鍾和)‧유근(柳瑾)의 『초등대한지지(初等大韓地誌)』(1908), 일제 강점기에 나온 남궁준(南宮濬)의 『조선전지(朝鮮全誌)』(1913) 등도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존재를 논했다.
『신단실기』 「백두산변」, 1914년(초판본), 대종교본사. 「태백산변(太白山辯)」에서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태백산은 백두산이라 논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신단실기』 「백두산고」, 1914년(초판본), 대종교본사. 「백두산고(白頭山考)」에서는 『강역고』와 『와유록』 『동방지명변』에서 발췌한 문헌을 싣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백두산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부각시킨 것은 대종교의 2대 교주였던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이다. 그는 1914년에 대종교본사에서 발행한 『신단실기(神檀實記)』의 「태백산변(太白山辯)」에서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태백산은 백두산이라 논하였고, 역시 같은 책에는 『강역고』와 『와유록』, 『동방지명변』에서 발췌한 문헌으로 「백두산고(白頭山考)」를 싣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연구로 인하여 전통적인 산줄기 체계가 흔들리고 백두산의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일제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1856~1935, 小藤 文次郞)는 1900년부터 1902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일대를 답사하고, 1903년에 14개월간의 지질조사 결과를 토대로 ‘조선산악론(朝鮮山嶽論)’이란 논문을 발표했고, 이 논문에서 그는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을 한반도의 등뼈 줄기로 삼아 산맥 이름들을 붙였다. 즉 우리 민족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이름을 태백산맥(太白山脈)으로 바꾼 것이다.
라. 『산경표』의 확산
『산경표』는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기봉방역지(箕封方域誌)』, 『산리고(山里攷)』, 『여지편람(輿地便覽)』, 『해동산경』(海東山經)』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한문 필사본이며, 서문이나 발문이 없고, 편자와 편찬년도를 밝히지 않았다.
이 책의 중요성에 주목한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소장본을 바탕으로 하여 1913년 2월 28일 자로 『산경표』를 발행함으로써 널리 보급되지만, 해방 후 198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 지리학자는 이 책의 존재를 몰랐다.
『산경표』는 모두 102쪽으로, 산‧고개‧일반 지명 1,580개 항목을 싣고 있는데, 누락 사항 등을 정리하면 산 1,139개, 고개 411개, 일반 지명 61개 등 모두 1,611개 항목이 된다. 『산경표』의 산줄기 이름은 산 이름을 사용한 것이 2개(백두대간, 장백정간), 지방 이름을 사용한 것이 2개(해서정맥, 호남정맥)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강 이름을 사용하였다.
눈에 보이는 지형을 중심으로 물줄기와 연계하여 분류한 것으로서, 다음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백두산을 국토의 출발지로 인식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영토 의식을 확립하였다. 둘째, 산줄기를 1대간 - 1정간 - 13정맥으로 위계(位階)를 두어 분류하고 이름을 붙였다. 셋째, 산의 흐름을 줄기[幹]와 갈래[派]로 파악하되 반드시 하천의 수계(水系)를 기준으로 하였다. 산줄기의 흐름이 물줄기에 의해 끊기지 않고, 강과 강이 산줄기에 의해 구분된다. 산줄기는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고 물을 만나는 곳에서 멈추며, 물줄기는 양쪽의 두 줄기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모으며 큰 강을 이루고 결국은 바다에 닿는다.
마. 백두대간 백두산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큰 산줄기’라는 의미로서, 백두대간이라는 명칭에는 백두산을 우리나라 국토의 출발지로 보는 시각이 포함되어 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 신화의 출발지이며, 신성한 산의 대표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상 영토의 중심이다. 즉 백두산은 고조선의 시발지이며, 고구려의 영토이고, 발해의 영토였다. 후기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시기를 남북조(남북국) 시대라고 일컫는 시각에서는, 백두산은 분명 우리 영토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간 여러 개의 산줄기를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백두대간의 지리적 영역을 확대 연구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만주를 잃어버린 후부터는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오직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만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엄연하게도 백두산으로부터 정북(正北)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부에는 엄청난 산악 줄기가 존재한다.
조종(祖宗)의 산, 백두산은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 불함산(不咸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린 단군신화의 배경인 태백산이 백두산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백두산을 신성시한 것은 고조선 시대부터였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세계」(高麗世系)에는, 고려 제18대 의종(毅宗) 때 학자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서, 조사(祖師) 도선(道詵, 827~898)이 곡령(鵠嶺, 개성의 옛 이름)에 와서 이르기를 “이 땅의 지맥은 북방(壬方) 백두산으로부터 물(水)의 근원(根)이요 나무(木)의 줄기(幹)가 되어 내려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에게 왕건(王建)이라고 이름을 지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왕건의 탄생 설화를 인용하고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는 같은 내용을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의 학자 김구용(金九容)의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고려는 918년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지만, 발해의 멸망(926)으로 북방의 영토는 회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백두산이 우리의 영토 안에 포함되지 않았고, 조선 세종 때 압록강 유역의 4군과 두만강 유역의 6진을 설치하여 행정력을 미치게 하고 국경을 확보함에 따라 우리 영토 내의 명실상부한 민족의 산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도 고려 중~후기의 학자들이 도선(道詵, 827~898)의 말을 빌어 태조 왕건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탄생했다고 기록했다는 사실은, 우선 왕건을 신성화하고,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표방한 고려가 북방 영토에 대한 애착을 두고 있고, 영토 회복에 대한 당위성과 그 실천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수록한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가 조선 시대에 편찬된 정사(正史)임을 상기해 보면, 조선조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북방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도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바. 백두산의 이름
백두산에 대한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조선」조에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고려사(高麗史)』의 광종 10년(959)조에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문헌에 나타난다. 즉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신라말에 보편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두산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문헌에 의한 백두산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다.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大荒北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고 이름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불함’에 대하여 최남선(崔南善)은 ‘ᄇᆞᆰᄋᆞᆫ’의 역음으로 보고 그 뜻을 천주(天主)인 신명(神明)으로 해석했다.
한대(漢代)에는 백두산을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고 부른 바 있으며 남북조의 위(魏) 시대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하였고, 또는 ‘도태산(徒太山)‧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북사(北史)』에 “말갈국 남쪽에 종태산(從太山)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이라 하며,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받들어 모셨다. 사람들은 산상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용변을 본 뒤 그릇에 담아갔다. 산에는 곰‧범‧이리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서(魏書)』와 『수서(隋書)』에 모두 도태산(徒太山)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북사』의 종태산(從太山)은 도태산의 오자(誤字)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당나라 때는 태백산이라 불렀고, 금(金)나라 때에 이르러 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 불렀다.
이렇듯 백두산의 명칭은 불함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장백산‧백두산 등으로 불리어왔으나, 한대 이후 불린 명칭의 공통점은 백(白), 즉 희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안호상은 백(白)을 ‘ᄇᆞᆰ’의 차음(借音)으로 보았고, 백두산, 곧 태백산을 순 우리 말로 ᄒᆞᆫᄇᆞᆰ뫼(한밝뫼)로 주장하였다.
사. 맺음말
『산경표』는 분단되기 이전의 우리나라 국토의 원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러한 산줄기와 물줄기에 따른 구분은 국토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려는 매우 소중한 실사구시적 시도이다. 이는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금나라와 청나라도 백두산을 신성시하였다. 백두산의 영기(靈氣)가 산줄기 따라서 한반도와 동북아에 흐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 지칭한 것으로 인하여, 이를 몽상적으로 과대하게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료‧금‧원‧청나라까지, 그리고 일본도, 심지어 아메리카 원주민까지도 우리 민족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현대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허무는 결과를 가져온다.
남북과 해외동포만을 우리 민족으로 묶어 세우고 단결하여야 현실적으로 민족은 유지되며 통일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료‧금‧원‧청나라도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동질성을 느낀다면, 현대의 치열한 국제정세에서 속에서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흡수당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종교에서는 몽상이라든가 환상이 허용되지만, 냉혹한 현금(現今)의 국제정세와 민족사학에서는 몽상이 허용되지 않는다.
아. 사족(蛇足)
내게 백민(白民)이라고 호를 지어주신 분은 20세기 후반부의 대표적인 애서가이자 국문학자이신 한실 이상보(李相寶, 1927~2020) 박사이다. 많은 사람이 이상보 박사에게 호를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면 모두 한글 호를 지어주셨는데, 내게 만은 동북아 세계를 돌아다니라고 백민(白民)이라 호를 지어주셨으니, 이 호는 ‘백의민족(白衣民族)’과 ‘백산민족(白山民族)’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상보 박사가 나의 호를 백민이라 지은 것은 나의 민족주의 성향을 아셨기 때문이다. 요즘 통화가 안 되어, 오늘 이 맺음말을 쓰며 검색해 보니, 몇 년도에 작고하셨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작고하신 것으로만 확인된다. 2020년인가 동숭동 서울대병원 외래에 갔다가 병원 택시 정차장에서 잠깐 마주친 것이 마지막으로 뵌 것이 될 줄이야‥‥‥,
1981년경부터 애서운동을 함께하였으니 알고 지낸 것이 40년은 족히 된다. 2000년대 초에 그분이 ‘한국고전문화진흥회’의 초대 회장을 하실 때 나는 상임이사로 봉사하였고‥‥‥, 이제 한 분 두 분, 우리 주위를 떠나가는데 더 늦기 전에 우리 시대의 애서가와 애서운동가, 민족문화주의자(民族文化主義者)들에 대하여 내가 아는 대로 간략한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 우리 종이책 세대의 이야기를 디지털 시대의 세대에 전하여야 할 의무가 내게는 있는 것인가?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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