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준위 핵폐기물 처리를 비롯하여 원전 내 잡무를 도맡아 하는 갸리, 원전 내 세탁장에서 일하는 카롤, 연료봉과 가장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서 일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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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의 약혼녀인 카롤은, 피폭이란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며 제 약혼자를 앞에다 두고 신입 원전노동자인 갸리에게 뜬금없이 키스를 한다. 원전에서 일상적으로 울려 퍼지는 네 번의 사이렌이 ‘연습’을 의미하듯, 이 키스는 일종의 ‘연습’인 셈이었다. 문제는 사이렌이 네 번에서 그치질 않는다는 것이다. 주의보를 의미하는 다섯 번을 넘어, 여섯 번(경보) 그리고 일곱 번(중대 경보)까지, 사이렌은 제 마음대로 울릴 수 있다. 원전 노동자들과 인근 주민들이라면 속수무책 네 번을 넘겨 울려대는 그 소리를 무력하게 들어야 하듯, 갸리와 카롤의 사랑도 네 번의 사이렌을 넘어 일곱 번을 향해 위태롭게 달음질친다.
사랑의 경험과 피폭의 체험에 닮은 구석이 많다고 여겼노라고 감독 레베카 즐로토브스키는 말했다. 아이디어가 몹시 기발하고, 레아 세이두와 타히 라힘의 젊음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런데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매력적이지 않다. 왜 일까. 이건 영화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방사능 같은 사랑’이라는 현대적 사랑의 물질성이 무얼 의미하는지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무지 탓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방사능을 잘 모르기에, 이 사랑의 치명적 매력 역시도 공감대를 얻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사랑이, 특히 불륜이라는 사랑이 아무리 피폭과도 같은 치명적 에너지로 다가온 다해도, 우리는 그걸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방사능의 위험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것과 몹시도 가까워져버린 일상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영화는 네 번의 사이렌마냥 관객들의 삶을 인상적으로 두드릴 뿐, 그 안으로 도통 다가서질 못한다. 어쩌면 이게 바로 방사능과 우리의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네 번의 사이렌까지만 들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사이렌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버린 것이다. 그러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을 향해가는 누군가의 ‘사랑’은 아예 사랑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사랑이든, 방사능이든, ‘어찌할 수 없음’이라는 팻말 뒤로 숨어버리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영화야말로 또 하나의 좋은 팻말이 되어준 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