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대곡천에는 이름난 암각화가 둘이나 있다. 하나는 '반구대 암각화'이고, 또 하나는 '천전리 각석'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그림만 있어서 '암각화'라고 이름 지으면 적절한데, 천전리의 벽에 있는 것은 사정이 좀 다르다. 거기에는 신라시대의 화랑들이 새긴 글씨도 있다. 이러다 보니 돌벽에 수많은 그림과 문양이 있는데도 '암각화'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어딘가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국보로 지정할 당시에 이름을 '천전리 각석'이라고 붙였다. 반구대 암각화와 달리, 천전리 각석은 역사 이전의 석기시대부터 역사 시작 이후의 신라 시대 화랑까지 오랜 세월의 자취가 쌓였다.
특이한 것은, '반구대 암각화'에도 있는 활쏘기 그림이 '천전리 각석'에도 있다는 점이다.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활쏘기 그림을 보면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같은 시대에 그려진 그림임을 확인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천전리 각석의 활쏘기 그림이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실감나는 사실성 때문이다. 만작 순간의 팽팽한 기운이 정말로 잘 살아나게 그렸다.
사진을 잘 보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상체가 뒤로 약간 기울었고, 가까운 곳의 목표몰을 겨누었는지 화살대의 방향이 수평선이다. 화살이 수평으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하여 깍짓손을 정확히 화살대 연장선 방향으로 중구미를 치켜들었다. 오늘날 활을 쏘는 활량의 눈으로 보기에도 손색이 없는 궁체이다. 아랫배를 든든하게 그린 모습은 흉허복실의 상태를 강조한 것이고, 어깨가 뒤로 빠진 것은 앞뒤 균형을 맞추기 위한 자세이다. 바위에 새겨져서 거친 듯하지만, 활을 쏘는 사람의 눈에는 완벽하게 그 궁체와 자세를 복원하고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을 종이로 옮긴 모사도를 잠깐 보면, 이 바위 속의 그림이 얼마나 사실성과 작품성이 높은지 짐작해볼 수 있다.
바위 속의 팽팽한 긴장이 모사도에서는 사라졌음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바위 그림과 달리 궁체가 엉거주춤하게 묘사되었다. 이 모사도는 활을 쏘는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고, 연구자들이 옮겨놓은 것이기에 활쏘기의 특징을 제대로 잡아낼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타난 현상이다. 모사한 사람을 탓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 천전리 각석도 암구대 반각화처럼 이곳 대곡천의 주민인 최경환이 처음 발견하고 학자들에게 제보하여 발굴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국보 147호로 지정되어 관리 중이지만, 세상에 드러난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심한 재해를 입어서 보존과 관리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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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각석을 처음 발견한 최경환은 반구대 바로 앞의 정자 '집청정'의 주인이고, 그 지역에서 한학을 하던 분이었지만, 지금은 작고했고, 그의 아들 최원석 접장이 집청정을 지키며 아버지가 세상에 알린 두 국보를 방문객들에게 안내하고 체험해보는 일을 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훌륭한 옛 자취를 알 수 있도록 홍보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대곡천에는 상류에서 하류까지 유명한 정자가 넷이나 있었다. 상류로부터 백년정-집청정-관서정-오산정이다. 그런데 다른 정자들이 보존이나 관리 소홀로 아예 무너져 사라지거나 폐혀가 되다시피한 데 반애 집청정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게다가 집청정은 정자의 형태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궁이가 있는 방이 둘이나 딸린 구조이다. 그런데도 아궁이가 무너지지 않고 지금도 불을 때면 그 방에서 달콤한 잠을 잘 수 있는 상태이다. 정자는 사람이 상주하는 건물이 아니어서 자칫하면 관리 소홀로 망가지기 쉽다. 그런데도 그런 건물이 아직까지 몇 백 년째 거뜬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그것을 관리하는 주인의 세심함 때문이다. 최경환-최원석으로 이어지는 이 분들의 애정과 관심이 아니라면 다른 정자 건물과 같은 운명을 따라갔을 것이다.
옛 사람들이 돌벽에다가 그림을 그리거나 새긴 것은, 원시시대의 제의와 관련이 있다. 꼭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의도가 기본을 이루지만, 그런 정보 전달과 소통에는 반드시 절차가 필요하고, 그 절차에는 신이 개입한다. 즉 신에게 자신들의 삶을 맡긴 원시인들은, 이런 절차를 신이 주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 그림은, 고래 잡기 위한 정보를 주는 단순한 그림에 그치지 않고, 고래를 잡게 하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어떤 신을 모시는 행위로 발전하다. 세상의 모든 옛 벽화는 이런 의식의 산물이다.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활쏘기 그림은, 그들이 활을 쏘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활쏘기에 신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옛 사람들에게 활쏘기는 하늘의 뜻을 전하는 방법이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 신화는 이런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부여 군사들에게 쫓기던 주몽이 절체졀명의 위기에서 활로 강물을 치자 자라와 물고기가 올라와서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게 했다는 것은 그런 의식의 산물이다.
천전리와 반구대의 그림은, 이곳이 활쏘기를 행하던 신성한 장소임을 중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활과 관련하여 역사를 따질 때 고구려 고분벽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10,000년 전의 돌 화살촉 같은 유물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그것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기에, 우리 활쏘기의 역사도 고구려 고분벽화를 비롯한 역사시대 안으로 제한되기 일쑤이다. 천전리와 반구대의 활쏘기 그림은 우리의 이런 제한된 상상력을 활짝 열어 2,000년의 역사를 단숨에 7,000년 전까지 끌어올린다. 전국의 석기시대 유물이 이 그림들로 하여 오늘날 활쏘기 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직접 연결된다. 우리 활의 역사는 대곡천에 와서 5,000년이 아니라 7,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를 매개로 하여 10,000년 전의 돌 화살촉까지 이어진다. 대곡천의 돌 그림들은 우리 활이 옛 자취를 10,000년 전까지 확장하는 중요한 기념물이다.
이런 중요한 지점에서 오늘날 활쏘기하는 사람들이 대회를 연다면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고헌정의 한량들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이 일고 있어 앞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 활의 역사를 7,000년 전으로 확장하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