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오세정
지난해 느닷없는 정부 R&D 예산 삭감에 대한 항의가 한창일 때, 서울대 학생 3명이 필자를 찾아왔다. 이공계 대학원생 2명과 학부생 1명이었는데, R&D 예산 삭감에 대한 서울대학교 대책위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R&D 예산 삭감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지에 대해 필자의 의견을 물은 뒤, 한가지 아주 뼈아픈 질문을 하였다. 자기들은 학생 신분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교수님들이나 수많은 과학기술 단체들은 왜 좀 더 적극적인 대응이 없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항의 성명 발표 등의 행동은 주로 학생 단체나 대표가 하였고,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이공계 교수들이나 연구자들의 모임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공학한림원 등 과학기술단체들은 공식적으로 정부에 제대로 된 항의 성명조차 내지 못했다.
물론 이들 단체가 아무 일도 안 한 것은 아니다. 대표자들이나 실무자들은 끊임없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정부와 소통하고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다만 공식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다. 왜 명백한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공식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한국의 과학기술 단체들이 정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단체는 정부로부터 직접 예산을 받거나 프로젝트 형태로 상당한 지원을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에 반대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우리나라의 현실은 미국의 경우와 대비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과학기술 단체인 AAAS(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는 매년 정부의 과학기술 예산을 평가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가감 없는 의견을 제시한다. 필자가 1980년대 초 미국 유학 중에 인상 깊었던 일이 있다. 당시 Ronald Reagan 대통령이 Star Wars Program을 제안했는데, 이는 고출력 레이저나 particle beam을 이용하여 우주공간에서 적의 미사일을 요격하는 미사일 방위시스템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물리학회에서는 전문가 패널을 조직하여 그 기술적 가능성을 조사 연구하여, 당시 가지고 있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많은 물리학 분야 연구가 필요하여 물리학계에는 큰 연구비가 기대되는 일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학회가 정부의 입장이나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계없이 전문가적 양식에 기반한 객관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에 과학자들이 대중의 신뢰를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같이 한국과 미국의 상황이 다른 이유는 미국의 AAAS는 재정이 완전히 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지만, 한국의 과학기술 단체들은 대부분 정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AAAS는 회원들의 회비와 Science 잡지 출판 등으로 재정적인 독립을 이루고 있다. 반면 한국 과학기술 단체들은 회비 수입도 부족하고 특별한 수익사업도 없어서 정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아마도 자발적인 회원 위주의 시민 운동 성격을 지닌 과학기술 단체가 이러한 빈 자리를 메워줄지도 모른다. 작년의 R&D 삭감 사태에 대해 ‘바른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이 그나마 제대로 된 항의 성명을 낸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쨌든 우리도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과학기술 단체가 필요하고, 이러한 단체는 오로지 과학기술자들 힘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필자소개
미국 Stanford 대학 물리학 박사
서울대학교 제27대 총장
한국연구재단 제2대 이사장
기초과학연구원 초대 원장
20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