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반도를 향한 외국 기독교인의 출발점
(1) 벨트브레(J.J. Weltevree, 한국명, 박연)
1626년, 31세의 네덜란드 인 “벨트브레”는 한반도에 입국한 최초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상선 “홀란디아”호(Hollandia)에 승선한후, 이듬해인 1627년 일본행 “위셀게르크에호”에 승선하였다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는 파선하고 동료인 “기이스베르츠”(Direk Gijzberts)와 “베르베스트”(Jan Verbaest)와 함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식수를 구하려고 인근 해변가 마을을 찾았다가 제주도 관내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나 한국으로 귀화하여 한국명 “박연”이라는 이름을 얻고 조선인 여자와 결혼까지 하여 슬하에 1남1여를 두는 등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1633년 병자호란때에 군인으로 참전하여 대장 휘하에서 항복한 왜병과 청병을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인조14~15년에 동료인 기이스베르츠와 베르베스트는 전쟁중에 전사하여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후 1653년 8월, 네덜란드인 “하멜”(H. Hamel)일행이 제주도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자 이들의 사후처러를 위임받고 일행 36명을 한양으로 압송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도감군오”(都監軍伍)에 배속되었으나 1667년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다시 귀국하였습니다. 벨트브레는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서양인들에게 조선의 풍습과 관제를 가르치는가 하면 서양무기의 조작법에 능숙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신무기들을 조작하는 일과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종법을 조선군에게 교육하는 일도 병행하였습니다.
벨트브레는 한반도에 입국한 최초의 기독교인이었지만 그가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입국했거나 복음을 전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벨트브레는 기독교적 사고와 바램으로 한반도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우연하게 시작된 듯한 출발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한반도의 문을 두드리며 복음의 씨앗을 뿌려 놓고 갔습니다.
(2)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선박선원 사격수였던 “하멜”은 1653년(선조35년) 상선 “스파르웨르”(Sperwer, Sparwehr)호에 서기로 승선하여 1차 목적지인 타이완 안핑까지 항해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7월30일,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향하던 중 타이완 해협에서 난파되어 8월16일 제주도에 표류하였습니다. 64명이 승선한 배에서 26명이 사망하고 38명이 구사일생으로 생존하여 제주도에 상륙한 것이었습니다. 8월17일 제주 목사 “이원진”에 의해 발견된 하멜 일행은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9개월동안 제주도에 기거하며 거처와 식량제공을 받고 조선어까지 배우는 혜택을 입었습니다. 10월29일, 하멜 일행은 조정에서 통역사로 파견한 “박연”(벨트브레, 58세)을 만났습니다. 먼 타국 땅, 나라 이름조차 생소한 조선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멜과 그 일행은 너무나 반갑고 기사회생할 것 같은 기대를 갖고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일본은 기독교인 박해국으로 처형될 것을 우려해 거절하였습니다. 그후 낙심에 빠진 선원 6명이 1654년 작은 선박을 타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태형선고를 받았습니다.
1654년 7월(효종5년), 하멜 일행은 어명에 의해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순풍으로 제주를 출발한지 하루만에 전남 해남에 도착하였으나 북상도중 1명이 급사하여 영암지역에 매장을 하였습니다. 7월26일, 한양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효종을 접견하고 효종은 이들을 “도감군오”(都監軍伍)에 배속하고 매월 70말의 쌀을 지급하여 군사훈련에 참가하는 등 효종행렬 호위군으로 근무케 하였습니다.
1654년 12월,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효종은 서양인을 조선에 억류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이들을 남한산성으로 일시 구금하였으나 이들 가운데 “제인스”(Hednrick Janse)와 “보스”(Hednrick Janse Bos)가 홍제교 인근에 은둔해 있다가 청나라 사신을 만났으나 오히려 체포되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연좌죄가 되어 하멜 일행 전원에게 태형 50대가 가해졌고 전라도로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유배당시 하멜 일행는 제초작업에서부터 나무 채취작업에 이르기 까지 힘겨운 일을 하였습니다. 1659년(현종1년), 조선에 3년간에 걸친 극심한 가뭄이 일어나 1663년(현종4년)에 14명이 사망하고 하멜 일행 가운데 생존자는 22명뿐 이었습니다. 그후 다시 6명이 죽고 16명이 남게 되었을 때 하멜 일행은 조선 탈출을 결심하고 조선억류 13년만에 네덜란드 선박에 의해 무사히 구출되어 8명이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국 심문에서 기독교인은 실종된 “제인스”(Jan Janse)뿐이라고 밝힘으로서 그들 가운데 순교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멜 일행의 조선억류로 일본국과 조선의 외교분쟁이 있었으며 이러한 분쟁으로 하멜일행은 1년동안 다시 일본에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1667년10월23일, 하멜 일행이 일본을 출발하여 자유의 몸이 된 하멜이 “마차이케르” 인도네시아 총독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이것이 1668년에 발간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이었습니다.
하멜과 그 일행이 조선에 사는 동안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적 행위를 하였다는 그 어떠한 행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매일 아침마다 기원하였던 기도를 조선인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기도대로 하멜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수백년전 조선땅에 기독교인이 두차례에 걸쳐 들어온 일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습니다.
(3) 영국군함 알세스트(Alceste)호의 함장 “막스웰”(M.Maxwell)대령과 리라(Lyra)호의 함장 “바실 홀”(Basil Hall) 대령
1816년, 영국군함 알세스트호와 리라호의 함장 “막스웰”과 “바실 홀”은 영국의 견중(遣中)사절 “아머스트”(Amherst)경을 호위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막스웰과 바실 홀은 해도작성의 임무를 가지고 서해안 충청도 비인 마량진에 입항하여 해도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기간중에 현감 “이승렬”이 사상 최초로 서양 군의관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바실 홀 대령은 지역 주민들과 어울리며 “페이숀스 서”(잠간 기다리세요)라고 영어를 말했을 때 주민들이 영어발음을 정확하게 구사하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시작한 영국인들은 28단어로 구성된 최초의 “한국어휘집”을 발간하여 주민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들은 문정을 나온 마량진 첨사 “조대복”(趙大福)에게 “한문성경”을 전해 주며 복음전파를 시도하였습니다.
1818년 영국으로 귀국한 바실 홀은 “조선해안 및 류쿠섬 항해기”를 발간하였으며 조도와 상조도와 설악산을 기행하며 감탄하였습니다. 특히 전남 진도군 조도 도리산에는 바실홀을 기념하는 바실홀 기념공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교회사적 관점으로 볼 때 바실 홀과 막스웰의 서해안 탐사와 보고서는 하멜의 동방견문록과 대비되며 조선을 유럽 세계에 알린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1817년 8월11일, 바실 홀은 나폴레옹에게 동방의 나라 조선의 조도와 135개의 섬을 설명하며 매우 감탄하였으며 그의 설명을 들은 나폴레옹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실 홀의 서해안 주민들과의 접촉에서 조선인들은 외국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고 그후 서해안을 방문하는 선교사들에게도 관대한 입장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aff, 1803~1851)
그후 1832년 서해안 고대도를 방문한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의 “칼 귀츨라프”(Karl F.A.Gutzllaff)선교사는 한문성경을 대량으로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주기도문”을 기록한 한글성경번역을 하여 “한국의 위클리프”로 불리웠습니다. 1803년 귀츨라프는 독일 프로이센 프리츠에서 경건한 기독교 가정의 독자로 출생하였습니다. 1821년 독일최초의 선교사 양성학교인 “베를린 선교학교”(Missionsschule in Berlin)를 졸업하고 1823년 베를린대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중병으로 중단하고 네덜란드 선교회 선교사로 지원하여 독립선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와 태국과 중국과 일본을 거쳐 1832년 7월17일, 범선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의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한 귀츨라프는 조선 몽금포 몽금도(대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후 외연도와 녹도와 불모도를 경유하여 고대도에 도착하였으며 귀츨라프는 이곳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귀츨라프는 고대도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한문과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였습니다. 1832년11월, 동역자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와 함께 중국어 성경 “신천성서”를 가져와 가르치고, “중국의 보고”(The Chinese Repository)라는 무크지에 “한글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최초로 한글을 유럽에 소개하였습니다.
한편 귀츨라프는 빈곤계층의 주민들에게 감자 재배법을 가르쳐 주며 한반도 감자전래의 최초의 기록이 되었고, 더 나아가 야생 포도재배와 과즙제조법을 가르쳐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해결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의약품 무료보급을 통해 독감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60명의 노인환자들에게 감기약을 처방해 회복하도록 하여 서해안 지역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8월17일, 귀츨라프는 로드 애머스트호를 따라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귀츨라프는 이곳을 일본과 만주와 중국을 연결하는 선교본부로서 매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851년 8월9일, 48세의 나이로 홍콩에서 사망하기 까지 제주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선교의 열망을 꿈꾸었으며 주님의 교회의 확산을 소망하며 한반도에 복음의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