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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순진한 편파
수필의 모든 담론(談論)은 작품과 작가를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삶을 읽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 대 사람, 일대일이라는 수필비평의 제한성과 동시에 수필만의 고유한 미학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긴다. 그 완결지점은 작가론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작가가 누군가.
수필에서 여성과 남성, 여성수필과 남성수필을 차별한 적은 없었다. 또 그 차이에 대해서 어떤 연구나 시도도 전무했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2017년 동리목월 가을호에 실린 수필 다섯 편의 작가는 모두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여성 수필가가 남성 수필가보다 수가 더 많을까. 그렇다. 실제 모 일간지에 따르면 남성은 시(詩), 여성은 수필(隨筆)을 선호한다는 조사가 나왔다. (울산매일 신문 2017.11.4) 굳이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남성 수필작가보다는 여성 수필작가가 많다는 건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호에 실린 작가 전체가 여성인 것도 자연스러운 수리적 편성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당연히 평자(評者)의 관점에서 볼 때, 다섯 작품에서 키워드는 ‘여성’이었다. 평론은 모범 답안의 자리에서 발화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한 편의 작품이 평자와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주관적 세계를 만난다는 것이다. 재조명이나 편파는 필연적 과정이다. ‘여성’이라는 주제성을 가지고, 마치 처음부터 평자의 소관이었던 것처럼 동일한 애정으로 작품 앞에 마주 앉았다.
‘비평은 흔히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말한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꾀하고 그 역사적 맥락을 정리하는 해석의 기능과 미학적이거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그 적절성 여부와 한계를 지적하는 기능이 그것이겠다. 한쪽이 작품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비평이라면 다른 한쪽은 평가로서의 비평이다. 두 기능은 당연히 상보적 관계에 있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을 옥죄기도 한다. 작가가 비평가에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화를 낸다면 대개는 앞의 기능이 뒤의 기능을 옥죈 경우이고, 칭찬을 받았는데 왜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허탈하게 여긴다면 대개 그 반대의 경우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후자 쪽이 가깝다. 즉, ‘지식으로서의 비평’이라기보다는 ‘평가로서의 비평’이다. 평자는 작품에 헌신하는 동시에 결국 자기 자신을 반영한다. 분석하고 해석하는 이면에는 평자의 철학과 주관이 관여함은 당연하다. 여성이라는 주제성을 바탕으로 역사적인 시각과 작품 상호간의 맥락을 잡아나갔다.
1. 여성과 소외, 혹은 밀려난 존재
-정성희, 「까마귀」, 『동리목월』, 2017년 가을호
내 삶의 기원을 찾기 위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남은 생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결국, 자기 정체성에 관한 작품이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학적 역할을 하는 장치가 있다. 까마귀와 무당이다.
먼저, 까마귀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까마귀를 신수 사나운, 소름 끼치도록 울어대는 불길한 흉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는 까마귀를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신성한 길조라고 재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당은 어떤가. ‘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중간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저당 잡힌 설움과 사회적 고립’ 속에 사는 사람이라지만 작가는 무당에 대한 시선을 달리한다. ‘민족의 뿌리와 같은 무속의 위상을 되찾고 계승’하고자 하는 열망이 내면에서 꿈틀대고 있다. 본질상 무당의 후사였음을 선언한다. 작가의 말이다.
‘나는 세포 속에 숨어 있는 미세한 입자들 하나하나에서 단군의 자손임을, 아니 당골의 피를 이은 후손임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며 내 인생의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새겨 두련다.’
작가는 여기서 ‘영혼을 싣고 나르던 신조인 까마귀가 어쩌면 전생에 무당이 아니었을까’하고 까마귀와 무당의 심리적 접촉점을 찾는다. 그렇다면 까마귀와 무당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작가는 둘 다 ‘뒷방으로 밀려난’ 존재로 보았다. 즉 소외자다. 이것은 이론적 근거가 아닌 심리적 근거다. 살아보니까 느껴보니 그렇다는 현상이다. 살면서 맞이하는 ‘소외의 현장’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떠나는 모든 존재가 겪는 실존적 경험이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선인들이 그래 왔듯이, 그도 문명의 거리에 휴지처럼 버려진 부도덕과 혼란을 잠재우고, 뒷방으로 밀려난 민속 문화의 옛 자취를 되찾으려는 염원으로 또 다른 긴 세월을 비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주제를 작가는 젠더적(gender)시선으로 보면서 까마귀와 무당에다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등장시킨 객관적 상관물 까마귀와 무당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상징체계의 변두리에 서 있는 여성적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적절했다.
또 하나는 여성적 자아를 까마귀와 무당의 연장선상에 놓고 있다. 작가가 소개한 무당의 성별은 여자다. 별말 안 해도 여자다. 작가는 무당을 이렇게 묘사했다.
①자르르 윤기 나게 빗은 쪽 찐 머리에 선명한 가리마, ②화사한 비취뒤꽂이는 아직도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 ③펄럭이는 쾌자는 세상 만물을 안으로 다 품으려는 넉넉한 마음.
우리의 보편의식 속에는 무당은 여자다. 남자 무당을 따로 구분하여 박수라고 하지 않는가. 왜 무당은 당연히 여자라야 하는가. 그것은 작가가 말대로 ‘목 좋은 자리를 치고 들어온 젊은 문명의 기세’와 서양의 근대적 사유에 밀려난 ‘무속’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무속도 밀려났고, 여자도 밀려났다. 밀려난 존재끼리의 동류의식이랄까. 이런 무속의 정신이 역사의 유역을 흐르며 치열하게 질곡을 버텨온 여성과 너무나 닮아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작가는 여성의 위치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는다거나, 애써 중심부로 자리를 이동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제 존재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 스스로 변방에 서는 정공법을 택했다. 바로 이 대목이다.
“얼굴이 보살형이야.”
오래전 늙은 무당에게 들었던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는 말이다. 결국은 무당집에다 자신의 영혼을 남겨두고픈, ‘그리고 언젠가는 두고 온 또 다른 나를 찾으러 그곳에 들러야 할 것 같다’는 당당한 회귀가 작가의 자의식인 것이다.
2. 여성 눈물론
-박월수, 「눈물의 기원」『동리목월』,2017년 가을호
눈물의 기원에 대해 작가만의 해석과 눈물의 가치, 유익, 울어야 할 이유를 제 나름대로 당위성 있는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보편적 공감을 이끈 작품이다. 특히 작가의 주장이 세련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동원한 화소 사용과 배치가 절묘했기 때문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절성을 유지했다. 다음은 각 화소의 소주제들이다.
·남자보다 여자가 평균수명이 긴 이유
·여자들이 잘 울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로 눈물을 흘린 사람은 누구일까-이브
·경로당에 할머니들 방-동영상, 할아버지들 방-정물화
·여자의 눈물에 홀려 떠내려간 남자를 몇몇 보았다.
·나는 울고 있는 남자를 보면 안고 싶다.
·아들이 얼마 전 혼자서 펑펑 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작가는 ‘눈물’이라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소주제별로 재구성했다. 전개가 자연스럽고 구도의 미적완성도가 높다. 동시에 눈물의 긍정적 우위를 여성에게 두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눈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실존적 비통을 자족과 해학으로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인생을 긍정의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여성이 흘리는 눈물의 다양한 역할을 소개했다. ①스트레스를 받을 때 쌓이는 나쁜 성분들을 몸 밖으로 내보는 착한 역할, ②실컷 울고 나면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같은 역할, ③에덴에서 추방당하게 된 아담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치유제 역할, ④남자를 홀리는 역할 등, 여성의 입장에선 ‘울 일이 천지에 널려’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물이 슬픔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성에게서 눈물은 삶의 일부요, 스트레스 해소법이요, 수다 현장에 없어서는 안 되는 레퍼토리 같은 것이다.
여성이 흘리는 눈물을 생물학적 성분으로 분석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나르시시즘적인 현상도 아닌, 나약함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여성만이 지닌 사랑이기도 한, 강력한 힘이기도 한, 감정의 수원지이기도 한 삶의 깊이에서 나오는 묘약 같은 것이다.
작가는 후반부에 ‘울어본 사람만이 우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법’이라 말했다. 이것은 눈물이 주는 공감의 힘을 의미한다. 같은 액체, 같은 성분, 같은 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슬픔, 같은 심정, 같은 마음의 무게를 말하는 것이다. 소외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저도 소외를 당해본 사람이다. 상실의 아픔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은 누굴까. 자신도 누군가를 잃어 본 사람이다. 눈물만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강렬하고 끈끈한 것은 없을 것 같다. 이것이 작가의 눈물 論이다.
3. 여성과 약함, 곧 강함
-서은영의 「어머니의 떼창」『동리목월』,2017년 가을호
삼광사 법당에 들어선 작가는 신도들의 염불 합창하는 장면에 압도된다. 염불 도량을 채운 제각각의 목소리는 작가의 귀에 합창처럼 들린다. 그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그것도 ‘이생의 막차에 한 발을 걸쳐 놓은 늙은 여자들’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인가.
①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지만 내어주기만 한 여자들
②더러운 것이나 깨끗한 것도 없다지만 추해 보이는 늘그막의 그네들
③늘어나가나 줄어드는 것도 없다는데 애초의 것-알몸 하나-만으로 견디는 어머니들
④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정성스럽게 외치는 늙은 여자들
⑤누에가 실을 토하여 제 몸을 씻듯 바닥에 끝없이 나란한 고치들, 늙은 육신덩이들
이것이 작가가 표현한 여성의 이미지다. 내어주기만 하는 희생적인 사람, 아름다움이 사라지면 더 추해 보이는 사람, 가느다란 몸 하나로 버텨야 하는 사람, 초월적인 존재에게 부르짖을 정도로 맺힌 한이 많은 사람, 더 내어주고 남은 것은 늙은 육신 덩어리. 하나같이 비루한 그림이다. 이것을 작가만의 편향성이라 말하기에는 여성의 사회적 포지션은 너무 버겁다. 또 일반적으로 느끼기에도 여성은 권력의 힘과 폭력의 그늘 속에 가려진 약자, 소외된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실제는 소외되어 있고, 사회적 질서 속에서는 자유보다 억압되어있는 이미지다.
주목해 볼 것을 작가가 내세운 나약한 여성적 대목에 대해서 정작 본인은 어떻게 하겠다는 항변의 제스처는 없다. 그저 이미지를 보여줄 뿐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작가의 진중한 의도와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한 번 보라는 것이다. 분석하지 말고, 설명하지도 말고 그냥 한 번 보라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처럼 힘없는 자는 인적이 드문 어느 산기슭에서 이러고 있으니 이 모습 그대로를 한 번이라도 좋으니 보라는 것이다. 무슨 심리인가. 사회 주류 질서로부터 소외당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려는 작가적 시도였다고 본다.
오히려 초월자에게 부르짖는 행위 즉 ‘여성들의 떼창’을 통해서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약하고 갈급하니 매달리는 길밖에 없다.’는 연약함에서 오는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약한 자가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여성이 강해질 때는 가장 약할 때이다. 하지만 강한 자나,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행위들이다. 기적은 강한 자에 적용되지 않는 법, 그러니 약한 자의 갈급함은 곧 능력이 된다. 더 나은 삶은 찾아올 것이고 이 고난은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완화되리라는 일말의 초월적인 힘을 전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서술 방식을 짚어보자. 서은영 작가는 기존 수필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어떤 힘이 있다. 자신의 수필을 포함한 주류를 이루는 수필 작법을 따르지 않은 점이다. 그것은 주제에 대한 비노출이다. 주제성을 명시하지 않았다. 여성들의 기도하는 장면만으로도 독자는 작가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지 느끼게 된다. 이미지화시켰다. 즉, 수사의 힘을 빌렸다. 떼창을 부르는 여성들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이 아름다운 간구에 대해서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민첩하고 생동하는 언어로, 빈틈없는 미학적 구조로, 함축적이며 절제된 묘사로, 지금처럼 말해야 한다. 작가는 우리가 여성이라고 부르는 편에 당당하게 서서 침착하고 영민한 어휘로 다 표현하고 있다. 마치 ‘곡진한 세월’도, 불행도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들것처럼 마땅히 있어야 할 권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4. 여성과 한국적 모성애
-정수자의 「군화 여섯 켤레」『동리목월』,2017년 가을호
네 번째 작품 정수자의 「군화 여섯 켤레」는 지금까지 다룬 여러 여성성 특징 중, 특히 모성의 측면에서 바라보게 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 사랑에서 그렇게 희생적이었지만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이기적으로 변한다. 이것은 가족 아닌 타자에게 대한 경계적 태도가 강해서라기보다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맹목적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작가는 가족을 확대한다. 다섯 명의 군화 주인공들이다. 타자에 대한 관심이다. ‘마음 같아서는 훈장이라도 달아주고 싶은’ ‘일일이 껴안고 고맙다고 등을 토닥이고 싶은’ 연민의 정을 발산하고 있다. 수필을 쓰는 작가이기에 글을 위해서 스스로를 미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문학적 경지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어휘가 있다. 그것은 ‘군화 여섯 켤레’다. 군화 여섯 켤레의 등장은 이렇다. 군대에 간 손자가 1박 2일 외출을 받아 이등병 동기생 다섯 명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온다. 작가는 군인들이 현관에 벗어 놓은 군화 여섯 켤레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작가의 진심을 보자.
군화 여섯 켤레가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현관은 젊음의 혈기로 가득하다. 가지런히 정리하며 그들의 부모님들을 떠올려 본다. 코끝이 찡해온다.
자식의 군화는 대한민국 어머니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모성적 상상력을 촉발하는 증거물이다. 내 품 안에 있었던 연약한 아이가 어느 날 강인한 남성이 되어 돌아왔다. 거칠고 투박한 군화는 어쩌면 변화된 아들을 대변하기보다 강인한 모성적 상징물에 가깝다. 부쩍 커버린 아들에 대한 낯섦이 아닌, 그런 아들조차도 내가 지켜야 한다는, 어느 때 보다 비장하고 굳건한 모성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아들과 어머니는 함께 커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군화만 봐도 코끝이 찡해질 수 있는 여자들이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이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이보다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는 연신 눈물을 훔치지만(…) 엄마는 연신 눈물을 훔친다.’
사실 여성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이념적 경향은 서구의 페미니즘에서 흘러들어왔다. 그 정신은 해방적이고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다. 하지만 이런 조류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인간의 근원적인 모성애나 아들을 보며 ‘연신 눈물을 훔치는’ 한국적인 어머니상이나 ‘입대하는 손자를 가진 잘난 할머니’가 있는 한국적 가족의 고유성마저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성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가정에다 큰 가치를 두지 않는 해방적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고유한 사회적 체계를 붕괴시킬 수는 있어도, 아들이 벗어놓은 군화만 봐도 코끝 찡해지는 한국 어머니의 모정 母情은 붕괴시킬 수 없을 것이다.
5. 그리고 여성과 나이 듦의 의미
-임수진 「주상절리에서」『동리목월』,2017년 가을호
작가가 주상절리에 전하는 서간체 형식의 수필이다. 대상을 인격화시켜 시간의 간극을 초월해 삶의 서사 속으로 끌어들임으로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세월의 축척을 통해 한 인간의 인격적 침잠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준 작품이다.
주상절리의 축적된 세월을 말해주는 언어들이 보자. ①그 뿌리에서 잎맥이 생기고 세월이 돋아나는 동안 ②세월이 층층이 쌓이다. ③네 나이를 가늠해 보는 건 어려웠다. ④장작을 쌓아둔 것 같다. 꽃봉오리다. 부채를 펼친 것 같다. 돌기둥이다. 신전이다. 작가는 주상절리의 나이 듦을 한 사람의 인간이 살아온 세월로 연결 짓고 있다. 즉, 작가는 주상절리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었다.
그래서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닌가 봐, 예전엔 꽃이 피었네, 예쁘네, 라고만 생각했지 꽃을 피우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나무에 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 (…)마음이 느긋하고 행복했다. 너를 보며 나를 생각했다.
이 대목을 주목하자. ‘너를 보며 나를 생각했다.’ 주상절리의 억겁(億劫)을 보며 붕괴하는 시간 속에 사는 유한한 존재, ‘나’를 발견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간은 머물지 않고 흘러가고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 소멸하고, 처음 것이 나중의 것이 되고, 새것이 옛것이 되는 무상(無常)한 속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시간론에서 시간을 이렇게 약술했다. ‘첫째, 시간은 결코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기에 우리는 현재라고 하는 순간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정해 머물게 할 수 없다. 둘째, 시간은 분열과 분산을 의미한다. 미래, 현재, 과거라는 시간의 세 양태는 시간 안에서 사는 인간 존재의 분산과 통일성의 결여를 시사하고 있다. 셋째, 시간은 일회성과 비 반복성의 성격을 지니므로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순환하지 않으며 어떤 목적을 향해 직선적으로 진행해나가는 역사적인 시간을 이룬다.’
이런 시간 속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시편의 작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우리의 세월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야 80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누가 당신 분노의 힘을 알 수 있으며, 당신 노기의 그 두려움을 알겠습니까.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시 90:10~12, 공동번역)’ 그렇다. 시간의 한계를 벗지 못하는 존재가 이런 시간성의 의미를 찾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시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진정한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있으면서도 있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의 내가 머물러 있는 한 지점, 곧 현재, 지금, 이 시간이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임을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그리고 여성은 ‘결코 머물러 있지 않은 시간’ ‘반복되지 않은 시간’ 안에서 이렇게 나이 들어간다. 한 여인의 나이 듦은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의 모든 ‘혼란의 순간을 네 몸에 고스란히 담고’ 세월을 쌓아가는 의미 있는 축적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상실, 후패, 소멸을 경험하면서 인생의 의미마저 상실될 것으로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상실과 이별이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축척의 의미 즉, 층층이 쌓이는 생의 의미를 잃는 것이 진짜 상실이다.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우리 세대는 주상절리에서 나이 듦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썼다.
“늙는다는 건 젊다는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성스러운 일이다.”
나가며
-수필, 나에게 전하는 연서(戀書)
다음은 35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면서 문학인으로서의 은퇴는 없다는 어느 노교수의 말이다.
1) 억압이 없는 사회를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친 마르쿠제는 억압이 없는 완전한 자유를 획득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 생애 처음으로 자유로워진 나는 그때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자유롭게 생각할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2) 1968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콜로키움에서 사르트르는 “배가 고파 우는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 앞에서 내 『구토』는 한 조각의 빵의 무게도 나가지 못 한다.”라고 개탄합니다. 이에 대해서 장 리카르두는 “어떻게 빵과 문학 작품을 같은 저울에 놓을 수 있느냐.”고 반박하면서 문학은 “배고픈 아이에게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에 배고픈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공박합니다.
3) 롤랑 바르트는 “에로티시즘의 극치는 옷깃 사이의 틈새에 비치는 살결에 있지 벌거벗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 세 가지 말을 기억하면서 문학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수필에서 여성만이 지니는 특수성이 있다. 그것은 분풀이다. 수필이 곧 분풀이일 수는 없지만, 수필의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이요, 치유기능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과 수필은 잘 어울린다. 여성으로서, 여성만이 느끼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삶의 고통을 목전에 둔 여성 문학의 역할과 다 말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옷깃 사이 틈새 같은 절실함이 주는 절제의 미학이 있는 한 여성의 수필은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둘러싼 환경이 아직 여성의 편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삶의 언저리에 있더라도, 상처가 아직 봉합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젠더적 위치를 초월한 인간 실존의 아픔을 감싸 안으려는 마음이 수필을 존재하게 만든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여성의 분풀이 방향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을 향해 울고, 자신에게 쏟아놓고, 자신의 앙가슴을 치고, 스스로에게 미안하다 사과하고, 스스로를 용서한다. 그래서 수필은 여성이 자기 자신에게 전하는 연서(戀書)와 같은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