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파미르의 유일한 불교유적, 브랑스투파
일반적으로 얌춘요새를 떠난 나그네들의 다음 목적지는 랑가르로 직행하지만, 시간여유가 있고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 관심있는 나그네라면, 이스카심에서 7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잠르(Zamr-i-atish-parast)‘ 유적지를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잠시 들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8km를 더 가면 얌그 마을에 도착하는데, 이곳에는 조그만 박물관이 하나 있다. 뭐 정신 박물관이라기보다는, 무바라크[Mubarak Kadam Wakhani(1843–1903)라는 슈피의 기념관인데, 그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이슬람 시아파의 분파인 슈피즘(Sufi mystic)을 와칸에 전래시킨 사람으로 지금도 부락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천문학자이며 음악가이기도 했는데, 박물관 안에는 그의 무덤과 그가 쓰던 악기들과 해시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해시계는 지금도 이슬람의 축제일 날짜를 결정하는데 사용된다고 한다.
다음 마을이 바로 부랑(Vrang)이다. 이 조그만 부랑 마을에 필자 같은 동북아시아의 나그네들이 잠시 들리거나 하루를 머물게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불교스투파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와칸 아니 중앙아시아 전체에서 유일한 불교스투파이기 때문이다.
브랑 중심지에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청해서 길 안내를 해주겠다는 아이들을 따라 나섰다. 그 스투파는 마을의 북쪽 뒷산 절벽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을입구에서 큰 다리를 건너기 전에 우회전하여 인공수로를 따라 쭉 올라 가서 산 아래에 도착하여 우선 배낭을 내려 놓고, 카메라만 든 빈 몸으로 수로를 건너 뛰어 오른쪽으로 작은 산의 가파른 길을 한참 기어 올라가니 그곳에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 스투파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 브랑 과 와킨주랑 지도

▼ 스투파 뒤로 보이는, 브랑마을의 토굴들의 원경

▼ 브랑마을 중심지

▼ 브랑 스투파

▼ 얌그의 작은 시골박물관 정문
▲ 필자가 건, <실크로드 총서> 발간을 회향하는 기원의 오색의 기원깃발

필자는 이날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가지고 다녔던 오색깃발, ‘다루초[經幡]’을 배낭에서 꺼내들고 그 앞에 엎드려 넙죽이 삼배 아니 오배를 올렸다. 그 다루초는 필자가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 출간을 기념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에는 법현, 송운, 현장, 의정, 혜초 등의 5명의 순례승의 이름과 『불국기』,『송운행기』,『대당서역기』,『서역고승전』,『왕오천축국전』등이 일일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5분의 순례승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공양물인 셈이었기에 3번이 아니라 5번의 오체투지를 올린 것이다.
몇 년 전에 러시아와 타지크학자들이 참여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 스투파의 건립연대는 대략 4세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쿠샨왕조(Kushan)의 말기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천축 순례의 양쪽 길을 모두 바닷길을 택한 의정삼장을 제외한 4분 순례승들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을 것이 확실하기에 나의 감회는 더욱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도움으로 분주히 깃발을 걸고 이른바 ‘인증샷’을 몇 장 찍고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스투파 앞에 걸터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를 한 참이나 바라다보았다.
천하의 모든 불탑들이 서 있는 곳이 그러하듯이 과연 명당 자리였다. 그곳에서는 저 멀리 여러 갈레의 판지강이 은빛 물결이 바라다보였고 그 위로는 힌두쿠시의 은봉, 옥봉이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의 절반쯤 솟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 아래로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내가 달려온 길과 달려갈 길이 동서로 뻗어 있었다.
그렇게 눈 아래 펼쳐진 브랑 평야와 판지강을 한참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다시 찬찬히 스투파를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그때서야 스투파의 전모가 눈에 들어왔지만 전 세계의 불탑을 두루 보아온 내 눈에는 역시 한눈에도 좀 문제가 있어 보이는 형태였다. 우선 3층으로 보기도 그렇고 5층으로 보기도 애매한 층수도 그렇거니와 층간의 비례도 애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의문이 되는 점은 내가 스투파의 원조격인 아쇼카 왕이 세운 산치스투파를 비롯하여 옛 간다라 고지인 현 파키스탄이나 아프간에서 수 없이 보아왔던 쿠샨시대의 전형적인 복발형의 스투파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 브랑스투파는 한눈에도 완전히 오리지널의 원형이 아니었다. 아마도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를 근래에 새로 복원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조잡한 형태였기에 오래된 역사의 이끼냄새는 전혀 맡을 수 없었다. 순간 허탈함이 온 몸으로 파고 들어왔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현재 와칸계곡에는 불교의 흔적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교도의 것을 남겨두지 않는 배타적인 이슬람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지 천 수백 여 년이 지났으니 그것이 당연한 상황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조로아스터교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것과 대비되어 혹시나 하는 부픈 기대감으로 그곳을 찾은 해동의 나그네를 허탈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현장 등의 구법승들이 지나갔을 중세기에는 이곳은 불교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7세기 이곳을 지나가면서 현장은 “사원은 10여 곳이 있지만 승려들은 적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혜초도,
승려도 있고 사원도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진다. 왕과 수령, 백성들 모두가 불교를 섬기며 외도에 귀의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는 외도가 없다.
혜초는 불교가 성행한 곳에 대해서는 ‘족사족승(足寺足僧)’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으나, 이 대목에서는 ‘유사유승’ 즉 ‘절도 있고 중도 있다’고 하여 비록 거창하게 성행하지는 않지만, 외도의 견제 없이 독자적으로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하나같이 불교를 믿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와칸지역에서 불교는 8세기 후반, 이슬람의 동진 이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브랑스투파가 서 있는 산 바로 아래와 마을 건너편 암벽에는 인공 또는 자연석굴의 입구가 여러 개 보인다. 비록 기록상으로는 찾을 수는 없지만, 고고학적 발굴로는 그중 12개 정도에서 사람이 살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한다.
또한 지방 촌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중 몇몇 동굴에서는 벽화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도 하고 또한 강 건너 아프간령 와칸, 즉 현재의 칸두드(Khandud)에서도 여러 개의 석굴이 있다고 한다. 이는 현장의 다음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혼타다성(昏馱多城)이 이 나라의 도읍인데 그 안에 사원이 있다. 이 나라의 선왕이 바위를 뚫고 계곡에다 이 사원을 세웠다.
이 구절은 예배용 차이티야(Chaitya)형 동굴과 거주용 비하르(Vihara)형의 석굴이 혼합되어 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석굴이 있다는 뜻이다. 특히 거주용 석굴에 대해서는 위의 현장 뿐 아니라 여러 자료에서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위서』「서역전」를 보자.
발화국(鉢和國)은 갈반타(渴槃陁) 서쪽에 있는데, 대단히 춥고 사람과 가축이 함께 땅굴 속에서 산다.
또한 우리의 혜초사문도 ‘9개 식닉국’ 조에서는,
… 나머지는 다 독립해 있어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 그 근처에 두 명의 석굴 속에서 사는 왕이 있는데 중국에 투항하여 안서(安西)도호부까지 사신을 보내어 왕래가 끊어지지 않는다.
이 기록으로 보아서는 이 나라는 독립된 나라로 보기보다는 산골에 동굴에 은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일종의 산적들의 소굴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 현장도 "살육하는 것을 태연스레 저지르고 도적질을 일삼고 있고 예의를 알지 못하며 선악도 판가름하지 못한다." 라고 지적하고 있고 또한 『신당서』권221 하「식닉전」에서도, 사람들은 즐겨 공격하고 상인들의 물건을 겁탈한다고 하였고 왕을 비롯해 이 나라 사람들은 ‘굴실(窟室)’ 즉 굴속에서 살기 때문에 ‘굴왕(窟王)’ 즉 ‘굴속에 사는 왕’이란 말을 쓰고 있다는 점으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갈 길 바쁜 나그네가 그 많은 석굴들을 모두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스투파 아래에 걸터앉아 망연히 와칸계곡을 바라보던 필자는 기울어지는 저녁 해에 쫓겨서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스투파를 맴돌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 스투파에 진리의 화신인 바이로차나 붓다[法身佛]께서 앉아 계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천여 년 만에 멀리 해동반도에서 온 나그네여! 정말 오랜만에 오체투지의 절을 받으니 반갑기 그지없네그려!…”
마을 중심지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아담한 카페 한 곳이 눈에 띄었다. ‘카페’란 단어는 내가 키릴어로 처음 배운 단어라, 그것을 보는 순간 스투파에 흥분하여 끼니도 거른 처지라 시장 끼가 밀려왔지만, 그 사이에 차를 놓칠까 염려되어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검문을 하는 경찰이 친절하게도 그곳에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을 한다. 그래서 카페에 들어가 ‘라그만’ 이란 국수와 차 한 포트를 시켜놓고 지나가는 차를 기다리면서 한편 내게 몰려들어 관심을 보이는 노인장들에게 지도를 펴놓고 손짓발짓으로 근처의 고적들을 탐문해보니 근처에도 고성이 하나 더 있다는 이야기였지만 이미 시간상으로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부랑에서의 아쉬운 반나절을 정리하고 경찰이 골라서 테워주는 차에 올라타고 천년고목이 늘어서 있는 가로수 길을 따라 내달리려는데, 문득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문득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 단지 내가 탄 차를 따라라오는 흙먼지 뿐이었지만, 그런데도 그 부름소리는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아마도 그 소리는 멀리서 누군가가 내게 보내는 전음술(轉音術)에 의한 이별사였으리라…
“해동의 나그네여, 안녕히 가시게!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리 슬퍼 마시게, 세월처럼 무상한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세월이야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는 법이거늘....”
▼ 브랑마을의 천년 가로수 
첫댓글 감동...
특히" 마지막 구절인 "해동의 나그네여......." 가 압권입니다. .
"아니차~~~" 로고....
아니차? 무상?
@다정/김규현 네 그 Anicha 입니다.
메아리. 훍먼지만 풀~풀~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