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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파(Marpha) 유서 깊은 옛길
* 애플로드(Apple Road)
* ‘순례지로(巡禮之路: Pilgrimage Road)’
* ‘망명지로(亡命之路: Exil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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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로드(Apple Road)
삶은 곧 길이다. 길에서 시작되고, 길에서 끝나지만,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 길은 끝나지 않는다.
현재 내가 며칠 머물며 글을 쓰고 있는 이곳 마르파는 옛 무스탕(Musthang) 왕국의 젖줄인 칼리 간다키(Kali Gandaki)강이 고원을 벗어나면서 부챗살 모양의 드넓은 계곡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강 둔치에 자리 잡은 조그만 전원마을이다.
이 마을에 이방인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우선 절경인 경치 때문이다. 이 마을은 세계 7위의 거봉이며 ‘하얀 산’이라는 뜻을 가진 다울라기리(Dhaulagiri, 8167m)를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푸른 산’이라는 뜻을 가진, 닐기리(Nilgiri, 6940m)를 바라보는 포인트이기에 아침저녁마다 찬란한 설산의 변화를 볼 수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매력적인 곳이다.
마을 뒷산 위에는 적지 않는 규모를 가진 티베트불교사원과 하얀 스투파가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시멘트를 전혀 쓰지 않고 흙과 나무와 돌로만 지은 티베트식의 가옥들과 골목골목 이어지는 돌길은 오랜 세월의 자연스런 마모로 인해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로 고풍스러움을 자랑하고 있다. 더구나 그 아래로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온 마을이 공명상자처럼 온 마을을 울려 퍼져서 정말로 인상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더구나 저렴하고 편하고 친절하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깨끗한 롯지도 여러 곳 있어서 트렉킹에 지친 나그네들이 며칠 묵어가는데 불편함이 없다. 그런 곳 중에 한 집을 골라서 우선 짐을 풀고는 먼저 애풀쥬스를 한 잔 들이키면 뱃속까지 상쾌한 기분이 된다. 그리고 석양의 베란다에 앉아 설산을 바라보며 ‘마르파 표’ 애플브랜디를 한 잔 시켜서 애플파이 한 조각을 안주삼아 홀짝홀짝 마시면 더 바랄게 무엇이겠는가?
이런 멋진 마을 앞으로 유서 깊은 길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길은 드넓은 강 둔치를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데, 위로는 좀솜(Jomsom)과 무스탕의 무게중심인 로만탕(Ro Manthang)을 거처 다시 히말라야 고개를 넘어 티베트고원으로 올라가고, 아래로는 투크체(Tukuche), 코방(Kobang), 나르중(Narjung), 레떼(Lete), 가사(Gasha)를 지나 온천으로 유명한 따또빠니(Tatopani)에서 강 길을 버리고 안나푸르나 산길로 접어들어 시카(Sikha)를 지나 우레리(Ulleri)를 지나 우리학교와 동네가 있는 비레탄티(Birethanti) 다리를 건너 포카라로 이어진다.
물론 길은 하나이다. 그러나 이름은 여러 개로 부칠 수 있다. 그 대목이 마르파의 옛길이 가진 매력이니까.
우선 낭만적으로 들리는 ‘애풀로드’ 에 포인트를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앞에서 이미 이야기 한 것처럼 이 자그만 전원마을은 예부터 사과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마르파의 토양과 기후가 과일재배에 적합해서 그랬으리라. 그래서 사과가 익어가는 가을철이 되면 인근의 수많은 당나귀들은 여름 내 온갖 기화요초들을 뜯어 먹으며 체력보강을 끝내고 마을로 모여들어 장도에 오를 준비를 한다. 그들은 빈 바구니들을 등 양쪽에 메고 모여들어 주인의 지시에 따라 사과를 가득 싣고 떠나게 된다.
그들 행상들은 북쪽으로는 과일이 귀해지는 무스탕왕국의 도읍지인 로만탕(Lo Manthang)을 지나 히말라야 티베트 본토에 까지 여러 날을 걸어 올라가서 비싼 값에 사과를 남기고 돌아올 때는 불교용품, 소금, 유제품, 모피 등을 싣고 내려온다. 또한 남쪽으로는 강 둔치를 따라 네팔 중부의 최대도시 포카라까지 내려간다. 이름하여 ‘애플로드(Apple Road)’이다. 얼마나 낭만적인 이름인가?
요즈음이야 새로운 신작로가 생겨 산길을 오르지 않고 큰 트럭에 사과를 가득 싣고 하루 만에 바로 포카라로 내려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또빠니에서 안나푸르나 산길을 올라 고래빠니를 거처 내가 머물고 있는 비레탄티 마을의 다리를 건너 포카라로 나아갔다고 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롯지의 주인장인 가젠드라(Gajendra Gauchan)는 원래 음식사업으로 유명한 타깔리족(Thakali)이지만 부모 대에 고향을 떠나 비레탄티에 와서 정착하였기에 고향에 해당되는 이곳 무스탕, 좀솜, 마르파에 대한 정보가 신속하고 정확한 편이다. 그런 그가 지도를 펴 놓고 손으로 짚어가며 루트를 설명하면서 ‘애풀로드’라는 단어까지 쓰는데서야 내가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팔 최대의 다샤인(Dashain) 축제가 되면 수천마리 염소들이 먼 무스탕에서부터 몇 달을 걸려 목동들의 인솔하에 걸어 내려와 온천마을 따또빠니에서 국도를 버리고 안나푸르나 트렉킹 코스를 따라 고래빠니를 거처 우레리 급경사면을 타고 내려와 치게둥가에서 계곡길을 따라 비레탙티 마을로 내려와 우리 롯지 앞 다리를 건너 포카라로 가는 광경을 수년 째 보아왔던 터라, 나는 언젠가는 그 루트를 답사해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만 그 ‘애풀로드’란 말 한 마디에 끌려 그만 바로 길을 나서게 되었다.
하~ 내가 누구인가? ‘역마살’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 아니더냐?
마침 축제기간이라 학교도 문을 닫은지라 다음 날 바로 길을 나서서 바그룽(Baglung) 마하데비(Maha Devi)사원에서 수백 마리 염소 목을 잘라서 신께 바치는 힌두교의 ‘피의 잔치’를 보다가 그 피 비린내에 쫓겨 바로 좀솜(Jomsom)까지 올라갔다가 대도시가 주는 번잡함이 싫어서 당일로 마르파로 내려왔던 길이었다.
* ‘순례지로(巡禮之路: Pilgrimage Road)’
이 길은 맛있고 향기 나는 사과만이 나귀등에 실려 올라가고 내려간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소금과 차 같은 이 지방에서는 생산되지 않지만, 인간들 생명줄과 같은 귀중한 물건들이 전문 보따리 상인들에 의해 지역차익과 시세차익을 위해 이용하던 대상로였다. 이름하여 또 다른 ‘차마고도’였다.
또한 이 길은 먼 무스탕 염소들이 피의 희생잔치를 벌이려고 수 천여 년 동안 해마다 죽음의 행진을 하던 길과 겹쳐 있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적 축제날에 맞추어 한 날 한 시에 목이 땡강 잘려 죽으려고 먼 포카라까지 몇날며칠을 목동들의 채찍에 맞아가며 쫓겨 내려가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이는 며칠 전까지도 ‘현재진행형’이라는데 의미가 깊었다.
또한 이길 위에는 종교적 구도심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험난한 구도의 길을 떠났던 수많은 구도자들의 순례길이기도 했다. 역시 말을 만들어보자면 ‘순례지로(Pilgrimage Road)’였다.
역사상 이 길을 오가간 순례자들이 어찌 한 두 명이었겠냐 마는, 그중에서 나는 이 마르파의 한 골목에서 특기할만한 한 인물을 ‘다시’ 만났다.
또한 이 길은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그 부속적 문화가 교차적으로 오르내렸던 길이다. 이는 단지 종교만 지나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종교는 “문화를 실어 나르는 배” 노릇을 충실히 했다는 사실조차도 사족일 것이다. 인도에서 탄생하여 전륜성왕(轉輪聖王:CakhraVartin)이라 불리는 아쇼카(Ashok)대왕 시대에 크게 번창하던 불교는 그 뒤 계속적으로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견제와 잠식 그리고 이슬람교의 침공으로 인해 본토에서 설 자리가 점차로 없어지자 당시 일부 승려들은 살 길을 찾아 히말라야를 넘어 설역고원 티베트로 들어가 딴뜨릭 불교를 전파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티베트불교는 고유의 전통신앙인 뵌뽀교와 한 편으로 대립하고 한 편으로 융합하면서 반탄력을 키우며 4갈레로 갈라졌지만, 결국 티베트불교는 각기 뿌리를 굳게 내리면서 외부 조류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근대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무신론자들의 집단인 중국공산당에 의해 나라와 영토를 빼앗기게 되자 다시 옛 초기 전파길을 따라 옛 고향 인도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망명길이었다. 물론 그들이 다시 내려왔던 길은 여러 갈레였지만, 가장 중요한 루트가 바로 무스탕과 좀솜과 마르파를 지나는 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사적으로 간과해서는 안 될 몇 가지 문제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지금의 티베트불교는 옛날에 티베트로 들어갈 때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반탄력이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천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져온 승려조직은 승려들 각자의 체질과 능력에 따라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외부 속인이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승려들 자체로만 단단하고 거대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논리적인 경전을 넘어 신통력에 가까운 수행력으로 중무장한 막강한 승려집단은 이미 일당백의 능력을 구비하여 마치 천하무적의 군대처럼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이는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대신 티베트불교의 잠재력은 세상의 어떤 종교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젠 대승불교나 소승불교 같은, 남방불교나 북방불교 같은 구태의연한 분류법은 세계불교사적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다. 이젠 네팔이나 인도는 그저 티베트불교란 막강한 적황색 옷을 입은 점령군이 잠시 스쳐가는 경유지일 뿐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 ‘망명지로(亡命之路: Exile Road)’
마르파의 바로 위에 있는 도시인 좀솜(Jomsom)이란 곳부터가 무스탕이다. 물론 그 위는 티베트 땅이고…. 과거 무스탕에는 무장투쟁세력이었던 '티베트해방전선‘ 사령부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정부의 전방위적 압박과 네팔 정치권이 친중국적인 마오이스트가 집권한 이후에는 무스탕에서 ’뵈랑쩬(Be’ Rangzen)‘ 즉 ’자유 티베트‘로 대변되는 무장봉기에 의한 티베트독립은 사실상 물 건너 간지 오래다. 점점 자국위주의 경제논리로 기울어가는 냉엄한 국제정세에서 그래도 티베트인들에게 네팔은 고마운 나라이다.
흔히 친티베트 인사들은 중국을 원흉이라 질책하지만,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될 당시의 국제정세를 곱씹어 보면 나쁜 나라는 중국뿐만이 아니고 영국도 같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은 책상머리에서 지도만 보고 당시까지만 해도 티베트령이었던 라닥왕국, 시킴왕국, 무스탕왕국을 인도와 네팔로 잘라서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1959년 달라이라마 성하가 망명길에 오른 이후로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망명길에 올라 현재까지 네팔에 20만 명의 난민이 등록되어 있다지만, 네팔도 1989년 이후로는 망명을 허용하고 있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네팔로 넘어 오려는 난민들에게 사격을 가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외신보도도 나올 때도 있다.
각설하고, 이 마르파 앞길에 체취를 남긴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을 빼놓을 수가 없다. 바로 까규종파 까르마파의 제17대 법주인 걀와 까르마빠(Galwa Karmapa)이다. 1985년생이니 현재나이 33살의 약관의 청년이지만 전 세계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차세대의 티베트불교의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걀와 까르마빠는 '깨달은 행위의 승리자'란 뜻을 가진, 한 종파의 수장에게 부치는 이름이고, 실제 법명은 오겐 틴레 도르제(Ogyen Trinley Dorje)인데, 이 이름은 제4대 까르마빠 당시부터 예언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달라이라마 제도보다 이전에 ‘전생제도(轉生制度)’를 확립한 유구한 종파인 셈이다. 한 까르마빠 법주가 열반하면 차기 법주를 찿아내어 법좌에 옹립하는 방법은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고 있지만, 여전히 신비의 구름에 가려있다.
7살짜리 어린이를 까르마종파의 본산인 티베트 본토의 출푸사원(Tsumphu Gompa)에서 제17대 법주로 옹립하는 진산식을 거행한 것은 1992년 9월 27일인데, 당시 2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당국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어린 그를 키워 달라이라마에 대응하는 세력으로 이용하려던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2000년 정초 몇 명의 측근만 거느린 채 중국 당국의 감시망을 뚫고 한겨울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무스탕으로 넘어와 네팔을 통해 인도에 도착했으니, 중국으로서는 멋지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중국당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인도정부의 허가를 얻지 못해 시킴(Sikim)의 룸텍(Rumtack)사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직도 인도 다람살라 규토사원에 주로 머무르며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이 차세대 티베트불교의 구심점이 될, 무거운 짐을 짊어진 그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기에 이 대목에서 조금은 흥분하기 마련임을 독자들이 이해해주기 바란다. 1997년 한해 당시 나는 티베트대학에서 수학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어렵게 출푸사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12살의 어린 소년이었는데, 반갑게 나를 맞이하고 내 손목에 행운의 손목걸이를 매어주면서 축복을 해주었다.
벌써 20년 전 일이니 오랜 세월이 흘러 갔지만, 내 기억은 마치 어저께 일처럼 생생하다. 그는 언제쯤이나 까르마파의 인도 내의 본산인 룸텍사원으로 들어가, 바로 자신이 전생에 앉았던 바로 그 법상(法床)에 앉을 수 있을 것인가?
1)네팔 히말라야 산맥 카르날 지구에 있는 산군(山群)으로 동쪽의 투크체(6,920m)에서 서쪽 푸타히운출리(7,426m)까지 40Km에 걸쳐 주산맥과 지맥들로 이루어졌는데 이 안에 다울라기리 1봉에서부터 6봉이 연이어 있고, 그밖에 추렌히말, 구르자히말 등이 솟아 있다. 다울라기리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 어의 '하얀 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산 위에 항상 눈이 덮여 있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1960년 스위스 등반대가 처음으로 등정하였다.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박철암 대장이 이끄는 경희대학팀이 정찰하였고 1988년 부산합동대(대장 조정술)가 등정에 성공했다.
2)The Thakali are an ethnolinguistic group originated from the ‘Thak Khola region’ of the Mustang District in the Dhaulagiri zone of Nepal. According to 2001 census, Thakali's population of around 13,000 constitute only 0.06% of Nepal's population. The Thakalis are some of Nepal's most successful businessmen. Furthermore, many are owners of Nepal's hotels and motels.
4) 일부 사가들은 티베트란 나라가 없어지면서 오히려 티베트불교는 세계로 비상하는 게기가 되었다고 평하고 있을 만큼 티베트 열풍은 거셌다. 그 60년 동안 전 세계에서 티베트불교센터가 없는 나라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티베트 불교에 대한 높은 관심은 출판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최고의 출판물 판매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아마존(www.amazon.com)’ 검색창에 티베트 불교를 검색하면 관련 출판물이 5천여 종에 이르지만, 한국불교는 3백여 종, 일본불교는 1천8백여 종, 중국불교는 2천여 종밖에 안 된다.
5) 닝마빠의 종조로 알려진 그루 린포체(빠드마쌈바바; 연화생)의 제자이며 대예언가로 유명한 촉규르 링바(1829-1870)는 티베트의 종파를 초월 개혁운동에 참여한 이색적인 인믈이었는데, 그는 이후 환생할 까르마빠에 관한 유명한 예언을 남겼다. 에를 들면 14대 텍촉(수승한 수레)가 열반하면서 제15대는 데웨 닥니(환희 바로 그것) 제16대는 릭빼 도르제(깨달음의 금강) 그리고 현재의 17대는 오겐 틴레(깨달은 행위의 구루 린포체) 그리고 다음 18대는 삼텐(고요한 선정)으로 예언하였다는 것이다. .
첫댓글
이러지 마세용....가슴 아퍼용....무스탕 가려다 홍수 만나 되돌아온 사람입니다.....티벳 라싸 거쳐 가로질러 가다가요.....근데 돌아온 지점이 워디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