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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산(陸九淵) 「왕안석 사당기(荊國王文公祠堂記)」의 개혁파와 보수파 비판 및 왕양명의 왕안석 긍정 평가
2021년 8월 15일
육상산이 고향 인물 「왕안석 사당기」를 쓰면서 왕안석을 포폄하였는데 육상산의 본의가 칭찬이냐 폄하이냐 옛날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현재도 많은 연구자가 포폄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많은 정주학자는 폄하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명나라 초기에 금화학파 소백형(蘇伯衡, 1329-1392)은 좌구명(左丘明) 이래로 20여 명이 훌륭한데 왕안석도 들어간다고 칭찬하였습니다.(“古今之士,自左丘眀以下,僅二十餘人,而介甫亦與焉。”) 심지어 양명학 연구자들도 왕양명까지 육상산이 왕안석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를 놓고 연구합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육상산은 왕안석에 대하여 폄하가 칭찬보다 무겁고 내용도 많습니다. 물론 연구자 개인마다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왕양명은 육상산의 심학을 긍정하고 지지하였습니다. 또 왕양명이 43살에 남경 강학에서 육상산을 깊이 연구한 뒤부터는 육상산이 왕안석을 평가한 개혁 관원의 태도 곧 강력한 개혁 의지와 청렴한 도덕적 지조를 자주 말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왕안석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목공휘(穆孔暉)가 왕도(王道)에게 보낸 서신에서 왕양명이 남경에서 학생들과 함께 육상산의 「왕안석 사당기」를 읽고 토론하였는데 목공휘는 당시에 왕양명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공휘에 따르면 왕양명은 육상산이 왕안석을 용서하였다고 이해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왕양명이 육상산처럼 왕안석을 어느 정도 용서하고 긍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穆孔暉,「與武城王文定公〔道〕論王介甫書」:“昨在陽明先生坐上,同觀象山「荊國祠堂記」,予時未敢謂然者,必象山之意,多爲荊公恕。”)
목공휘의 기록을 보면 왕양명이 육상산처럼 왕안석을 어느 정도 용서하고 긍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양명이 육상산의 왕안석 긍정 평가를 받아들인 내용은 개혁적인 관원이 왕안석처럼 강력한 개혁 의지와 청렴한 도덕적인 태도뿐입니다. 왕양명의 문인 왕도(王道)가 나중에는 왕양명을 멀리하고 주자학을 지지하는 위교(魏校)와 가깝게 지냈던 까닭에는 사실상 왕양명이 왕안석을 어느 정도 긍정한 것도 있습니다. 목공휘 이외에도 왕양명이 육상산의 「왕안석 사당기」를 읽고 토론할 때 왕양명의 학생 정선부(鄭善夫)도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선부는 육상산이 왕안석을 긍정한 것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정선부는 적극적으로 왕안석을 변호하였습니다. 따라서 왕양명과 당시 주자학자들 사이에서도 왕안석 평가를 놓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상산 「왕안석 사당기」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육상산이 왕안석을 칭찬한 요순 정치를 회복하려는 의지와 도덕적 지조 모두 중요한 내용이 아니고 실제로는 이런 칭찬조차 다시 비판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육상산이 이정(二程)이 천리(天理)를 강조한 낙학(洛學) 관점에서 왕안석의 신학(新學)을 부정하려는 태도를 분명하게 나타냈습니다. 동시에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이 어느 정도 긍정한 노자와 황로 사상의 국가 방임주의 정책까지 비판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당기」 끝을 보면 육상산이 왕안석을 칭찬한 내용은 사당기를 부탁한 전상조(錢象祖)의 뜻을 반영한 것뿐입니다.
육상산은 「사당기」 맨 앞에서 요순 정치와 노자의 황로 정치를 서로 비교하고 요순 정치는 천리(天理)이고 황로 정치는 개인화와 사유화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육상산의 정치사상은 황로 정치의 국가방임 경제정책을 반대한 것입니다. 많은 역사 서적에서는 한나라와 당나라 두 왕조의 경제발전은 왕도와 패도를 겸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식(蘇軾)은 한나라 초기에 황로 정치를 채택하여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한무제가 유가 정치를 채택하여 재정적자에 빠졌다는 것은 오해라고 유가 정치를 변호하면서도 황로 사상의 장점도 있다고 긍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식은 만년에도 아우 소철(蘇轍,1039-1112)이 수정한 『노자 신해(老子新解)』를 보고 평소에도 긍정한 황로 정치를 아주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육상산은 낙학(洛學)의 천리(天理) 관점에서 이런 역사지식과 소식과 소철 형제의 견해를 비판하고 또 한나라와 당나라 경제 제도까지 비판하였습니다. 다만 당나라 조용조 납세방법만 긍정하였을 뿐입니다. 육상산은 사실상 이정(二程)이 소씨 형제를 비판하였던 관점에서 소씨 형제의 황로 정치를 비판한 것입니다.
『蘇軾全集』,卷45,「御試製科策」:“孝文(漢文帝)尙老子而天下富殖。孝武(漢武帝)用儒術而海內虛耗。”
蘇軾:“昨日子由(蘇轍,1039-1112)寄『老子新解』,讀之不盡卷,廢卷而嘆。使戰國有此書,則無商鞅、韓非;使漢初有此書,則孔、老爲一;使晉宋間有此書,則佛、老不爲二。不意老年見此異特。”)
칭찬한 점을 보면, 첫째는 왕안석이 요순 정치의 회복을 주창한 것이고 둘째는 뛰어난 재능과 우뚝한 도덕성입니다. 그런데 칭찬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둘 다 비판하고 비난하였습니다. 뛰어난 재능이 오히려 북송 왕조의 몰락을 초래하였고 우뚝한 도덕성은 쌀쌀맞은 성격이라서 남들과 소통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왕안석은 재능이 뛰어났기에 자기 확신이 지나치고 고집이 너무 세기에 자신이 선발한 관원들조차 무시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당기」 끝에는 증공(曾鞏, 1019-1083)이 왕안석을 독불장군처럼 고집불통이라고 비판한 글을 실어 자신의 평론을 대신하였습니다. 따라서 육상산이 왕안석이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고 얼음처럼 차가울 만큼 도덕 행실이 높았다는 점을 칭찬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이런 성격을 비난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성격 때문에 당시 신법을 반대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여 결국 당쟁이 일어나고 소인들이 득세하는 것도 몰랐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비판한 점을 보면, 첫째, 왕안석이 요순 정치의 핵심(天理)을 몰랐기 때문에 신법(法度)이 애초부터 잘못이라고 비판하였고 결국 개혁이 실패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둘째, 왕안석은 요순 정치의 구체적인 각종 제도를 몰랐기에 인종 황제와 신종 황제에게 그저 요순을 본받으라고만 요구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또 신종 황제가 요순 정치를 회복하려는 희망을 저버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결론으로 요순 시기와 하은주 삼대의 제도는 모두 하늘이 내려주신 것(天理)인데, 왕안석의 신법은 하늘이 내린 천리가 아니고 다만 복잡한 제도를 간략화하는 간이화(簡易)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왕안석의 신법 실행과정에서 신종 황제와 구법당 인사 모두를 비판하고 개혁 실패의 책임이 모두에게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신종 황제는 자신이 요순 정치를 모르고 또 왕안석도 요순 정치를 모르는데 등용하였다고 비판하고 신종 황제도 신법 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 당시에 신법을 반대하였던 군자들(구법당, 대표자 사마광)도 요순 정치의 핵심을 몰랐기에 정책의 옳고 그름(是非)을 따지지 않고 편 가르기(異同)만 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신종 황제와 구법당 모두 싸잡아 비난하였습니다. 또 사마광이 신법을 모두 폐기하고 신종 황제(왕안석 포함)가 실행한 좋은 정책(예를 들어 모역법)조차 유지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것은 소식(蘇軾)이 사마광의 전면적인 신법 폐기를 반대하고 특히 모역법을 존속하자는 입장(「辯試館職策問劄子」)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나라와 명나라의 경제정책 기본은 사마광이 주장한 국가예산관리(理財)와 경제성장 정책(生財)을 참고하였습니다.
육상산은 설상선에게 보낸 서신에서 「왕안석 사당기」의 내용을 요약하여 “왕안석의 학술은 옳지 않고 재능이 뛰어나고 의지력이 강력한데 결국에는 송나라를 패망시켰다.”고 비난하였습니다.(『象山集』,卷十三,「與薛象先」:“荆公之學,未得其正,而才宏志篤,適足以敗天下。「祠堂記」中論之詳矣。自謂聖人復起,不易吾言。”) 이것이 왕안석 사당기의 요점입니다.
육상산 「왕안석 사당기」의 포폄을 요약하면 신법당(왕안석)과 구법당(사마광과 소씨 형제 포함) 및 신종 황제 모두 비판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왕안석의 신법(法度)은 요순 정치의 핵심(天理)가 아니고 또 구법당 사마광의 경제정책이 노자와 황로 사상의 국가 방임주의와 개인의 사유화에 근거하였다고 암중 비난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소씨 형제까지 암중 비난하였습니다.
육상산은 「왕안석 사당기」를 지으면서 참고한 자료는 많지 않았습니다. 왕안석의 「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皇帝言事書)」를 읽어본 것은 확실합니다. 육상산의 선배 학자 여조겸이 일찍이 왕안석 신법의 조짐이나 출발점이 이 글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宋史記事本末』,卷三十七,「王安石變法」︰“呂祖謙(1137-1181)曰︰安石變法之蘊,亦略見於此書。) 이외에 참고한 자료는 소백온(邵伯溫)의 『소씨견문록(邵氏聞見錄)』과 진곡(陳鵠)의 『기구속문(耆舊續聞)』 같은 필기류 자료를 본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육상산은 왕안석과 신법에 관하여 깊이 연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왕안석을 비판한 내용은 이미 다른 문헌에 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육상산은 이정(二程)의 낙학(洛學)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 왕안석의 신법을 비판하고 비난하였고 또 사마광과 소씨 형제를 암중 비난하였습니다.
물론 육상산 자신이 사람 됨됨이와 정치 참여 등 여러 수준에서 왕안석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왕안석을 포폄하면서 상당히 조심하였고 자신이 함부로 포폄할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내용은 소식과 소철 형제의 왕안석 비판을 인용하였습니다.
최근 2018년에 『왕안석 연보 장편』이 출판되어 앞으로 왕안석 연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王安石年譜長編』,2018年1月1日,中華書局,劉成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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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구연(陸九淵, 1139-1193), 「왕안석 사당기(荊國王文公祠堂記)」 :
출처 : 『육구연집(陸九淵集)』, 권19.
참고 자료 :
宋、趙與時(1172-1228),『賓退録』,卷七,「荊國王文公祠堂記」.
요순 이제(二帝)가 실행한 올바른 정치(道)는 하은주 삼대(三代) 시기에도 성행하였습니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말기에 요순 정치(治世)에서 시간상 멀지 않아 높은 관원들 가운데 모범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라 말기에 이윤(伊尹)이 하나라 걸(桀)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였고 은나라 말기에는 삼인(三仁 : 微子, 箕子, 比干)이 상나라에 남아 간언하였는데 이것은 요순 정치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말기에는 요순 정치가 마치 흔적도 없이 물이 말라버리듯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이기적으로 바뀌었고 지식인들도 학술을 사유화하였기에 각가지 옳지 않은 주장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노자는 개인화와 사유화가 좋다(“老氏以善成其私”:『老子』:“聖人以其無私,故能成其私”。)고 조장하여 많은 주장(諸子百家) 가운데 우뚝하게 유행하였습니다. 노자를 배운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천하에서 노자의 사상을 실현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한(漢)나라에 와서는 노자의 통치술이 더욱 유행하였는데 장량(張良, ?-기원전 186)이 어렸을 때 배운 스승이 황석공(黃石公)이고 조참(曹參, ?-기원전 190)은 제(齊)나라 승상이면서 국가행정을 처리하는 정당(正堂)을 내놓아 황로(黃老) 사상에 밝은 개공(蓋公)을 모셔다가 묵도록 하였습니다. 한나라 고조(高祖)와 혜제(惠帝)는 장량과 조참의 통치 성과를 거두었고 문제와 경제의 성세(文景之治)도 두 사람의 황로 사상을 지속하였기 때문입니다.(蘇軾:“孝文(漢文帝)尙老子而天下富殖,孝武(漢武帝)用儒術而海內虛耗。”) 공자가 요순 정치 쇠퇴에 몹시 불안하였을 때도(皇皇:蘇軾,「策略」(二):“吾君吾相終日皇皇焉應接之不暇。”) 초나라 은사(隱士, 沮溺) 육통(陸通, 字接輿) 같은 무리는 노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세상을 걱정하지 않고 은일(隱逸)하였습니다. 뒤에 맹자가 언제나 요순 정치를 찬양하였으나 듣는 사람마다 맹자의 요순 정치를 거의 몰랐습니다. 맹자 당시에 요순 정치의 쇠퇴 상황은 실이 끊길 듯이 아주 위급하였다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요순 정치의 쇠퇴가 더욱 심각하였습니다. 요순 정치가 수천 년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 거의 잊혔는데 왕안석이 우뚝하게 나타나서 요순 정치의 뜻을 재발견하였으니 위대하지 않습니까!
신종(神宗,生卒,1048-1085,在位,1067-1085)이 희녕(熙寧) 원년(1068) 4월 왕안석을 불러서 만나 “당나라 태종은 어떤 임금입니까?”라고 물었고, 왕안석은 “폐하께서는 모든 정책에서 요순 정치를 본받아야 합니다. 당나라 태종의 식견이 짧아 요순 정치까지는 몰랐기에 그의 정책들은 요순 정치의 제도(法度)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종이 “당신은 당나라 태종의 정책이 요순 정치의 제도에 부합하지 못한 책임이 당 태종에게 있다고 비판하였는데, 나도 요순 정치를 알지 못하기에 아마도 요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당신의 뜻에 부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마땅히 최선을 다하여 나를 보좌하여 요순 정치를 실현하도록 합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임금과 신하의 토론은 요순 정치를 서로 기대하였습니다. 왕안석을 희녕 2년(1069) 2월에 재상 다음으로 실권을 가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하면서 “나를 보좌하면서 도움이 되는 정책이 있다면 꺼리지 말고 모두 말하십시오.” 또 “나를 채찍질하여 요순 정치를 실현하는 큰일을 하도록 보좌하세요.”고 말씀하셨고 또 “하늘이 훌륭한 인재(왕안석)를 낳으셔서 백성을 돌봐주시려고 하시니까 마땅히 나도 죽을 힘을 다하여 왕안석을 도와주어야 하며 그를 돕지 않고 세월을 헛되이 낭비하는 것은 황제가 하늘의 뜻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로 임금으로서 요순 정치를 알았던 임금이 있었습니까? 후세에 정치가들이 요순 정치를 알면서도 마음속에 숨기고 임금이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를 떠보았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증공량(曾公亮,999-1078,字明仲,號樂正,爵位,魯國公)이 “임금님께서 왕안석을 이렇게 알아주시고 신임하시니 왕안석이 목숨을 다하여 보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고 거들었습니다. 왕안석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협조하는 것은 각자가 각자의 올바른 도리를 다하여야 합니다.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여야 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여야 하며 누가 누구에게 가르치듯이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진나라와 한나라 이래로 정권을 잡았던 지식인 관료들이 요순 정치를 제대로 잘 알았겠습니까? 후세 정치가들이 요순 정치를 알면서도 마음속에 숨기고 임금이 실현하려는지 의지를 떠보았겠습니까? 안타깝습니다! 왕안석도 학문이 부족하여 요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신종의 의지를 끝내 실현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신종의 개혁 의지를 저버렸습니다. 또 요순 정치를 깊이 연구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요순 정치를 잘 모르고 어두웠습니다.
인종이 가우(嘉祐) 3년(1058) 10월 27일 왕안석을 외직(江南東路의 提點刑獄)에서 중앙정부로 불러들여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탁지판관(度支判官, 재상이 국가재정을 독람하였던 것을 북송시기에는 재상권을 분권화하려고 度支, 戶部, 鹽鐵 三司를 두었음)에 임명하고 서울(汴京)에서 근무하게 하였습니다.(왕안석은 이듬해 4월에 취임함) 왕안석이 「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皇帝言事書)」를 올려 당면한 문제들의 조목을 들어 폐해를 상세하게 분석하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풍부하고 대체로 적절하였습니다. 핵심내용을 요약하면 “현재 제도는 요순 정치의 제도(法度)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안석이 요순 정치를 깊이 연구하지 못하여 결국에 자신도 잘 몰랐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분명히 보입니다. 왕안석이 신종에게 아뢴 내용도 이것과 다르지 않고 신종 황제에게 요순 임금을 본받으라는 것뿐인데 “모든 정책에서 요순을 본받으세요.”라고 간단히 아뢴 것으로 어찌 요순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나라 태종은 본받기에는 부족합니다.”라고 평가한 것은 옳지만 “당 태종의 정책들은 요순 제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고 평가한다고 어찌 당 태종을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송나라 지식인들은 당나라 陸贄의 租庸調 방법이 요순 정치의 井田什一稅 방법에 부합한다고 평가하였는데 이것을 육상산이 인용함) 요순 정치의 내용을 모르기에 당 태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였습니다. 왕안석의 학술과 신종 희녕 연간에 일으킨 신법 사업 모두 「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皇帝言事書)」의 잘못된 주장을 숨기지 않고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왕안석을 몰아냈던 원우(元祐) 연간의 사람들은 왕안석이 신종 황제에게 아첨하였다, 영합하였다, 평소의 뜻을 굽혔다, 학술에 어긋났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들도 왕안석의 학술과 신법 내용을 제대로 평가한 것이겠습니까? 서로 기분이 맞지 않기에 서로 미워하였으며 그래서 서로 욕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배척과 비난은 개인의 사적인 감정입니다. 왕안석을 일찍 기용하지 못한 까닭은 왕안석을 평소에 비난하였던 장방평(張方平, 1007-1091, 字安道), 여회(呂誨, 1014-1071, 字獻可), 소순(蘇洵, 1009-1066, 字明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왕안석을 미워한 것은 그들의 기분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안석의 잘못도 있었으나 어찌하여 세 사람의 비난을 초래하였습니까? 왕안석은 아주 뛰어나고 남들보다 앞서나가기에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술 마시면서 노는 사교를 하찮게 여겼으며, 사교와 영달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결백한 행동거지는 얼음이나 서리보다 차가웠습니다. 이것은 왕안석의 타고난 성격입니다. 속세 학문(과거시험 공부)의 타락한 것을 씻어내고 잘못된 제도의 답습을 털어내고 정치는 반드시 공자와 맹자를 본받고 공적(功勳)은 반드시 이윤과 주공만큼 이루는 것이 왕안석의 목표이었습니다. 왕안석은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나 인기와 명예가 빛났는데 당시 높은 관원과 원로들도 왕안석보다는 낮았습니다. 왕안석이 얻은 높은 인기와 명예가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전성기 또는 중흥기라는 좋은 시대를 맞아 신종 황제가 아주 뛰어나더라도 임용하고 싶은 신하가 있다면 먼저 배워본 뒤에 신하로 삼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은나라 개국조 성탕(成湯)이 이윤(伊尹)과 중훼(仲虺)에게 배운 뒤에 신하로 삼고, 제23대 고종(武丁)이 부열(傅說)에게 배운 뒤에 신하로 삼았던 것처럼 중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기에 신종 황제가 조금이라도 의심하면 왕안석은 병을 핑계로 사퇴하겠다고 말하고 신종 황제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여야만 왕안석이 나와서 행정업무를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왕안석은 신종 황제의 신임을 혼자서 독차지하였습니다. 왕안석의 신법을 논의할 때부터 조정 전체가 큰소리로 시끄러웠고 실행하자 곧바로 세상인심이 들끓었습니다. 왕안석은 『주례』를 들고나와서 신법의 겉과 속(精白:『楚辭、橘頌』:精色內白,類可任兮。)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자신의 학술을 굳게 믿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군자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신종 황제가 왕안석의 편을 들었기에 차례대로 사퇴하였고 소인들(呂惠卿, 章惇, 蔡確)이 왕안석에게 영합하자 왕안석은 이들과 사사로이 정책들을 결정하였습니다. 결국에 충실하고 솔직한 군자들은 사퇴하거나 좌천되었고 사기 치고 교활한 소인들만 득세하였습니다. 왕안석은 이런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는데 이것도 왕안석의 잘못입니다. 국가의 제도(典禮)와 작형(爵刑)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천리(天理)입니다. 예를 들어 홍범과 구주는 사실상 하늘의 상제가 내려주신 것(「洪範九疇」:“箕子乃言曰:‘我聞在昔,鯀堙洪水,汩陳其五行。帝乃震怒,不畀‘洪範’九疇,彝倫攸斁。鯀則殛死,禹乃嗣興,天乃錫禹‘洪範’九疇,彝倫攸敘。’”)입니다. 옛날 요순 시기와 하은주 삼대의 헌법, 제도, 전례 등은 모두 하늘이 내려주신 천리입니다. 왕안석이 주장한 헌법과 제도가 어찌 하늘이 내려주신 천리입니까?
왕안석이 신법 초안을 올리고 신종 황제가 채택한 뒤 얼마 안 되어 신종 황제가 간원(諫院)에서 올린 상소문을 왕안석에게 보여주며 함께 평가하였습니다. 간원에서 신법이 지나치게 간이화(簡易)한다고 비판한 것에 대하여 왕안석은 “현재의 제도가 복잡하고 간단하지 않기에 신법의 제도를 만들어서 간이화하려는 것입니다.”고 신법을 변호하였습니다. 신종 희녕 연간의 신법 핵심은 이 말에 있습니다. 이 말을 빼놓고 신법의 여러 제도가 옳다 그르다를 아무리 많이 논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왕안석 신법의 핵심은 천리가 아니고 다만 간이화라고 폄하하였습니다.)
『중용』에서 “훌륭한 정치는 현명한 신하들에게 달렸고 현명한 신하를 얻는 것은 군주 자신입니다. 군주는 도리에 따라 자신을 닦아야 하며 도리는 인(仁)입니다.”라고 말하였고 맹자는 “인(仁)은 사람의 타고난 마음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묵자도 현명한 신하가 정치의 근본이라고 말하였고(『墨子、尙賢』:尙賢者,政之本也) 군주 자신은 현명한 신하를 얻는 주체(근본)이며, 타고난 어진 마음은 군주의 근본입니다. 근본의 어진 마음을 닦지 않고 끄트머리의 정치를 잘하겠다면 정치도 잘될 수 없습니다. 『대학』이 온전하게 전해오지 않기에 옛날 요순 정치를 연구하지 않아 모르는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왕조마다 관원이 되려는 사람들의 동기는 대체로 노자 사상(개인의 사리사욕)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군자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서 스승에게 경서를 배워 자신의 자질을 향상한 뒤에 천하에서 실행하면서 능력대로 세상을 돕습니다. 그런데 요순 정치를 연구하지 않았으면 세상을 크게 돕지 못합니다. 왕안석 신법을 반대하였던 군자들은 당시 정치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기에 신법에 대하여 긍정과 반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자신의 주장도 없이 요행히 개인적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만 생각하였습니다. 왕안석은 당시 세상을 요순시대처럼 만들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하였는데 이런 군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겠습니까? 끄트머리 정치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요순 정치의 근본적 의의를 연구하지 않은 것은 당시 군자들도 왕안석과 다를 것이 없으나 왕안석을 공격한 까닭은 왕안석이 이들과 당파가 달랐다는 것뿐입니다.(犯害則異者 : 陸九淵, 「與薛象先」 : “天下之理, 但當論是非, 豈當論同異?” 옳고 그른 是非를 따져서 공격한 것이 아니고 나와 같으냐 다르냐 편가르기 異同 때문에 공격하였다고 보았습니다.) 저들 군자들이 긍정과 반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였기 때문에 신종이 왕안석을 발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희녕 연간에 신법이 실행되자 왕안석을 공격한 사람들은 비방하고 훼손하는 말을 아주 심하게 하였는데 지극히 옳은 도리로 왕안석을 꺾지 못하였고 공평한 내용이 10-20%이라면 격분한 내용이 80-90%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위로는 신종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왕안석의 잘못을 설득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왕안석의 생각만 강화해주고 신법을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법의 책임은 여러 군자에게도 있습니다. 철종 원우 연간(1086-1093)에 사마광 같은 대신들이 신법을 폐기하였는데(주로 모역법을 폐기하고 차역법을 재건함.) 과연 편파적이 아니고 또 끼리끼리 편 가르기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양시(楊時, 1053-1135)가 노래하였듯이 좋은 옥(玉)처럼 갈고 닦는 군자는 흠을 숨기지 않고 포용합니다.(楊時,「枕上」︰“瑕瑜不相掩,君子此良玉。” 육상산은 원우 연간의 군자들이 왕안석의 신법 일부를 유지하고 포용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양시는 성리학자로서 왕안석 비판의 대표자였는데 사실상 육상산은 사마광의 신법 폐기와 양시의 왕안석 비난 모두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옛날 좋은 역사서는 사실을 있는 대로 기록하였기에 옳고 그름(是非)과 좋은 나쁨(善惡)을 드러내서 옳고 좋은 것을 권장하고 그르고 나쁜 것을 징벌하여 경계하라고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참고합니다. 그런데 원우 연간의 군자들이 왕안석 신법에 대하여 시비와 선악을 평가하면서 평가자 개인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덧붙이고 실제의 사실을 왜곡하였기 때문에 장돈(章惇)과 증포(曾布) 같은 소인들이 이것을 트집 잡아 원우 당원들에게 격노하였습니다. 어찌 소인들이 군자들에게 바랐던 올바른 평가이었겠습니까? 철종이 친정(親政)한 소성 연간에 신법을 부활하였으나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을 보더라도 어찌 왕안석에게만 죄를 덮어씌울 수 있겠습니까?
희녕 연간 초기부터 왕안석은 자기가 주장한 신법이 실행되면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반대자들을 속류(俗流)라고 비난하거나 소인이라고 배척하였습니다. 나중에 여러 군자가 왕안석을 배척하자 왕안석은 속류 또는 소인이라는 말보다 심한 욕으로 다시 맞대응하였습니다. 쌍방이 서로 자극하였기에 개혁 또는 반개혁 모두 더욱 어그러지고 올바른 시비(是非)도 더욱 흐려졌습니다. 원우 연간에 사마광 같은 여러 고관이 왕안석 신법의 문제점들을 완전히 뜯어고칠 수 있었으나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육경(六經)의 올바른 뜻도 왕안석이 자신의 틀린 생각을 수식하는 데 이용하였는데, 소인들이 왕안석의 틀린 생각에 투합하였으니 무슨 나쁜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철종 소성 연간에 장돈(章惇)과 증포(曾布) 같은 실력자들이 잘났다는 만큼 신법을 부활시키지 못하자 어찌 잔꾀를 숨겨가며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지 않았겠습니까? 권력이 뒤바뀌면서 휘종 숭녕(崇寧)에 채경(蔡京) 같은 실력자들의 간사함을 초래한 실제 원인은 원우 연간에 관각(館閣)에 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신종 원풍 말년에는 채확(蔡確)과 형서(邢恕)가 황제가 되지 못할 신종 황제의 아우 옹왕 조호(雍王 趙顥)와 조왕 조왕 조군(曹王 趙頵)을 옹립하려고 시도하였고 거짓을 조작하여 태황후 고씨(高氏)와 재상 왕규(王珪)를 모함하였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관각에서 학문을 논의하면서 비분강개하며 정의를 주장하였기에 군자들도 이들을 깊이 긍정하였습니다. 맹자의 말처럼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학술은 『상서, 입정(立政)』에서 상백(常伯), 상임(常任), 준인(準人)이란 관직을 올바르게 선발하라고 말하였듯이(“文王、武王,克知三有宅心,灼見三有俊心,以敬事上帝,立民長伯。”) 좋은 관원이 되려면 스스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정책의 세부사항들을 시끄럽게 떠들면서 편 가르기를 좋아하였기에 소인들이 틈새에 끼어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자신들에게 유리하면 찬성하고 불리하면 반대하는 것은 소인들과 똑같습니다. 근세(남송 시기)에 학자들도 편 가르기를 하며 조정에서 크게 싸우는데 어찌 북송 시기 선배들의 당쟁 전철을 반성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안석은 임천현(臨川縣)에서 대대로 살았으나 희녕 9년(1076) 10월 사직하고 판강녕부(判江寧府)가 되어 강녕부(현재 남경)로 이사 갔습니다. 북송 말기 선화 연간(1119-1125)에 임천현에 있는 옛날 집터에 임천현 인물들이 지현에게 사당을 세우도록 요구하였고 남송 소흥 연간(1131-1162) 초기에는 자주 수리하였으나 지금까지 40년이 지난 뒤에는 무너진 곳이 많아 지나가는 사람마다 안타까워 혀를 찼습니다. 왕안석이 아들(王雱, 1044-1076)의 명복을 빌려고 강녕부에 있는 집과 정원을 불교에 기증하였는데 지금까지 잘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안석은 세상을 덮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고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도덕적 행실을 지켰는데 모두 산천의 밝은 영령을 받은 것이며 세상에 드문 인물입니다. 그의 사당이 잘 정비되지 않아 고향 사람들도 제사를 올릴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왕안석에 대한 평론이 공정하지 않고 또 사람들도 왕안석을 꺼리고 의문을 가졌기 때문인가요! 무주(撫州) 지주 전상조(錢象祖)가 1년 동안에 지방행정을 안정시키니 지방 사람들도 화목하였습니다. 무주 학교의 정비를 마친 뒤에 울컥하여 사당을 헐고 새로 지었는데 옛날보다 확장하였고 사당 관리를 학교 관원에게 맡기고 때마다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저(육상산)는 신축하였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속으로 지주 전상조를 존경하였는데 저에게 사당 신축 기록문을 지으라는 부탁을 받고 나니 저는 지식인들이 요순 학술을 연구하지 않기에 왕안석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남들이 비난하는 대로 옳고 그름을 따르며 종합하여 판단하지 못하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왕안석이 강남동로 제점형옥(提點刑獄)을 맡았을 때 무주 고향 사람 사인 증공(曾鞏, 1019-1083)이 답장(「與王介甫(二)」)을 보내 비판하면서 말하길 “당신께서는 현재 남의 견해를 잘 경청하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제가 최근에 듣기로는 당신께서 선발하여 잘 아는 사람들을 오히려 부족하다고 무시합니다. 아마도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당신의 견해를 조금도 꺾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육상산)는 자신의 분수도 모르면서 지주 전상조의 부탁을 받고 삼가 아는 대로 사당에 올립니다. 당신(왕안석)께서도 기꺼이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순희 15년 무신년(1188) 정월 길일에 고향 사람이 육구연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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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九淵(1139-1193),『陸九淵集』,卷十九,「荊國王文公祠堂記」:
唐虞三代之時,道行乎天下。夏商叔葉,去治未遠,公卿之間,猶有典刑:伊尹適夏,三仁在商,此道之所存也。周歷之季,跡熄澤竭,人私其身,士私其學,橫議蜂起。老氏以善成其私,長雄於百家,竊其遺意者,猶皆逞於天下。至漢,而其術益行,子房之師,實維黃石,曹參避堂以舍蓋公,高惠收其成績,波及文景者,二公之餘也。自夫子之皇皇,沮溺接輿之徒,固已竊議。其後,孟子言必稱堯舜,聽者爲之藐然,不絕如線,未足以喻斯道之微也。陵夷數千百載,而卓然復見斯義,顧不偉哉!
裕陵(永裕陵,宋神宗,生卒,1048-1085,在位,1067-1085)之得公(王安石,1021-1086,1069年任參知政事,1070年任宰相,1074年罷宰相),問:“唐太宗何如主?”公對曰:“陛下每事當以堯舜爲法,太宗所知不遠,所爲未盡合法度。”裕陵曰:“卿可謂責難於君,然朕自視眇然,恐無以副此意。卿宜悉意輔朕,庶同濟此道。”自是君臣議論,未嘗不以堯舜相期。及委之以政,則曰:“有以助朕,勿惜盡言。”又曰:“須督責朕,使大有爲。”又曰:“天生俊明之才,可以覆庇生民,義當與之戮力,若虛捐歲月,是自棄也。秦漢而下,南面之君,亦嘗有知斯義者乎?後之好議論者之聞斯言也,亦嘗隱之於心以揆斯志乎?”曾魯公(曾公亮,999-1078,字明仲,號樂正,爵位,魯國公)曰:“聖知如此,安石殺身以報,亦其宜也。”公曰:“君臣相與,各欲致其義耳。爲君則自欲盡君道,爲臣則欲自盡臣道,非相爲賜也。”秦漢而下,當涂之士,亦嘗有知斯義者乎?後之好議論者之聞斯言也,亦嘗隱之於心以揆斯志乎?惜哉!公之學不足以遂斯志,而卒以負斯志;不足以究斯義,而卒以蔽斯義也。
昭陵(永昭陵,仁宗,生卒,1010-1063,在位,1022-1063)之日,使還獻書,指陳時事,剖析弊端,枝葉扶疎,往往切當,然覈其綱領,則曰︰“當今之法度,不合乎先王之法度。”公之不能究斯義,而卒以自蔽者,固見於此矣。其告裕陵,蓋無異旨,勉其君以法堯舜是也,而謂“毎事當以爲法”,此豈足以法堯舜者乎?謂“太宗不足法”可也,而謂其“所爲未盡合法度”,此豈足以度越太宗者乎?不知言無以知人也。公疇昔之學問、熙寧之事業,舉不遁乎使還之書。
而排公者,或謂容悅,或謂迎合,或謂變其所守,或謂乖其所學,是尙得爲知公者乎?氣之相迕而不相悅,則必有相訾之言,此人之私也。公之未用,固有素訾公如張公安道(張方平,1007-1091,字安道)、呂公獻可(呂誨,1014-1071,字獻可)、蘇公明允(蘇洵,1009-1066,字明允)者。夫三公者之不悅於公,蓋生於其氣之所迕,公之所蔽,則有之矣,何至如三公之言哉?英特邁往,不屑於流俗、聲色、利達之習,介然無毫毛得以入於其心,潔白之操,寒於冰霜,公之質也。掃俗學之凡陋,振弊法之因循,道術必爲孔孟,勛績必爲伊周,公之志也。不蘄人之知而聲光燁奕,一時巨公名賢爲之左次,公之得此,豈偶然哉?
用逢其時,君不世出,學焉而後臣之,無愧成湯、高宗。君或致疑,謝病求去,君爲責躬,始復視事。公之得君,可謂專矣。新法之議,舉朝讙嘩,行之未幾,天下洶洶。公方秉執『周禮』,精白言之,自信所學,確乎不疑。君子力爭,繼之以去,小人投機,密贊其決,忠樸屏伏,憸狡得志,曾不爲悟,公之蔽也。典禮爵刑,莫非天理,洪範九疇,帝實錫之,古所謂憲章、法度、典則者,皆此理也。公之所謂法度者,豈其然乎?獻納未幾,裕陵出諫院疏,與公評之,至簡易之說,曰:“今未可爲簡易,修立法度乃所以簡易也。”熙寜之政,粹於是矣。釋此弗論,尙何以費辭於其建置之末哉?
“爲政在人,取人以身,修身以道,修道以仁。”“仁,人心也。”人者,政之本也,身者,人之本也,心者,身之本也,不造其本而從事其末,末不可得而治矣。『大學』不傳,古道榛塞,其來已久,隨世而就功名者,淵源又類出於老氏。世之君子,天常之厚,師尊載籍以輔其質者,行於天下,隨其分量,有所補益。然而不究其義,不能大有所爲。其於當時之弊,有不能正,則依違其間,稍加潤飾,以幸無禍。公方恥斯世不爲唐虞,其肯安於是乎?蔽於其末而不究其義,世之君子未始不與公同,而犯害則異者。彼依違其間,而公取必焉故也。
熙寧排公者,大抵極詆訾之言,而不折之以至理,平者未一二,而激者居八九,上不足以取信於裕陵,下不足以解公之蔽,反以固其意,成其事,新法之罪,諸君子固分之矣。元佑大臣一切更張,豈所謂無偏無黨者哉?所貴乎玉者,“瑕瑜不相揜”也。古之信史,直書其事,是非善惡靡不畢見,勸懲鑒戒,後世所賴。抑揚損益,以附己好惡,用失情實,小人得以藉口而激怒,豈所望於君子哉?紹聖之變,寧得而獨委罪於公乎?
熙寧之初,公固逆知己說之行,人所不樂,既指爲流俗,又斥以小人。及諸賢排公,已甚之辭,亦復稱是,兩下相激,事愈戾而理益不明。元佑諸公可易轍矣,又益甚之。六藝之正,可文奸言,小人附托,何所不至?紹聖用事之人,如彼其傑,新法不作,豈將遂無所竄其巧以逞其志乎?反覆其手,以導崇寧之奸者,實元佑三館之儲;元豐之末,附麗匪人,自爲定策,造詐以誣首相,則疇昔從容問學,慷慨陳義而諸君子之所深與者也。格君之學,克知、灼見之道,不知自勉,而戛戛於事爲之末,以分異人爲快,使小人得間,順投逆逞,其致一也。近世學者雷同一律,發言盈庭,豈善學前輩者哉?
公世居臨川,罷政徙於金陵。宣和間,故廬丘墟,鄉貴人屬縣立祠其上,紹興初常加葺焉,逮今餘四十年,隳圯已甚,過者諮嘆。今怪力之祠,綿綿不絕。而公以蓋世之英、絕俗之操,山川炳靈,殆不世有,其廟貌弗嚴,邦人無所致敬,無乃議論之不公、人心之畏疑使至是耶!郡侯錢公,期月政成,人用輯和,繕學之既,慨然撤而新之,視舊加壯,爲之管鑰掌於學官,以時祠焉。余初聞之,竊所敬嘆,既又屬記於余,余固悼此學之不講,士心不明,隨聲是非,無所折衷。公爲使時,舍人曾公復書切磋,有曰:“足下於今,最能取於人以爲善。而比聞有相曉者,足下皆不足之,必其理未有以奪足下之見也。”
竊不自揆,得從郡侯,敬以所聞,薦於祠下,必公之所樂聞也。
淳熙十有五年歲次戊申(1188)正月初吉,邦人陸某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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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士禎,『池北偶談』,卷八,
「穆文簡(穆孔暉)論王安石」︰
堂邑穆文簡公(孔暉),弘治中,鄉舉領解,出王文成公(王陽明)之門,爲理學大儒。然其學多入禪宗,其古文精勁,自子書出,可匹崔文敏公後渠,如「送沈朝綬」、「送王如行」諸序可見。予尤喜其「與武城王文定公(道)論王介甫書」,今錄於此。
孔暉(穆孔暉)頓首純甫(王道)先生足下:
昨在陽明先生坐上,同觀象山「荊國祠堂記」,予時未敢謂然者,必象山之意,多爲荊公恕;不爲人之社稷計,不爲天下生靈憂,不爲後學慮。恕一夫而不憫天下後世,此何心哉?不然,乃象山之偏見自喜也。將以正名定罪,釋天下蒼生之憤,爲社稷大計,不當姑隨也。大舜殛鯀於羽山,鯀之惡不大於安石,安石之罪浮於鯀。予謂以安石擬鯀可也,鯀名重,安石亦名重;鯀悻直自用,安石亦悻直自用;鯀圮族,安石亦圮族;鯀堙汨,安石亦堙汨,鯀不能除天下之害,亦不能成功;安石禍及天下生靈;生靈何辜?宋之元氣,遂不復振,其罪尙爲不浮於鯀乎?夫以傾人社稷,流毒四海者,尙取其志,堯舜當取鯀之志矣。何者?鯀之志,欲平水土也。孟子曰:“食志乎?食功乎?”安石之操介,在古人一節之士甚多,未可以一節而揜元惡也。非聖人無法,聖人作『春秋』以訓萬世,安石獨廢之,此不容誅矣。安石秉『周禮』,蓋功利之心勝也。何者?『周禮』之政,天無曠時,地無曠利,人無曠力,此聖王所以富天下者,盡三才之道者也。安石慕其近似,專以利言,又無管仲之才,所以萬無一利,而害不可勝言矣。天下以爲君子者,安石惡之;天下以爲小人者,安石好之。好人之所惡,惡人之所好,此之謂拂人之性,辟則爲天下僇矣。欲恕安石者,是求爲過高之論,恐誣後學不淺。不審聰鑒以爲何如?孔暉頓首。
* 蘇軾과 蘇轍의 差役法 반대 :
蘇軾,『蘇軾全集』,卷五十三,「辯試館職策問劄子」,第二首:
今者不避煩瀆,盡陳本末。臣前歲自登州召還,始見故相司馬光,光即與臣論當今要務,條其所欲行者。
臣即答言:“公所欲行者諸事,皆上順天心,下合人望,無可疑者。惟役法一事,未可輕議。何則?差役、免役,各有利害。免役之害,掊斂民財,十室九空,錢聚於上,而下有錢荒之患;差役之害,民常在官,不得專力於農,而貪吏猾胥,得緣爲奸。此二害輕重,蓋略相等,今以彼易此,民未必樂。”
光聞之愕然,曰:“若如君言,計將安出?”
臣即答言:“法相因則事易成,事有漸則民不驚。昔三代之法,兵農爲一,至秦始分爲二。及唐中葉,盡變府兵爲長征之卒,自爾以來,民不知兵,兵不知農,農出穀帛以養兵,兵出性命以衛農,天下便之,雖聖人復起,不能易也。今免役之法,實大類此。公欲驟罷免役而行差役,正如罷長征而復民兵,蓋未易也。先帝本意,使民戶率出錢,專力於農,雖有貪吏猾胥,無所施其虐。坊場河渡,官自出賣,而以其錢雇募衙前,民不知有倉庫綱運破家之禍,此萬世之利也,決不可變。獨有二弊:多取寬剩役錢,以供他用實封;爭買坊場河渡,以長不實之價。此乃王安石、呂惠卿之陰謀,非先帝本意也。公若盡去二弊,而不變其法,則民悅而事易成。今寬剩役錢,名爲十分取二,通計天下,乃及十五,而其實一錢無用。公若盡去此五分,又使民得從其便,以布帛穀米折納役錢,而官亦以爲雇直,則錢荒之弊,亦可盡去。如此,而天下便之,則公又何求?若其未也,徐更議之,亦未晚也。”
光聞臣言,大以爲不然。
臣又與光言:“熙寧中常行給田募役法,其法以系官田及以寬剩役錢買民田以募役人,大略如邊郡弓箭手。臣時知密州,推行其法,先募弓手,民甚便之。此本先帝聖意所建,推行未幾,爲左右異議而罷。今略計天下寬剩錢斛約三千萬貫石,兵興支用,僅耗其半,此本民力,當復爲民用。今內帑山積,公若力言於上,索還此錢,復完三千萬貫石,而推行先帝買田募役法於河北、河東、陝西三路,數年之後,三路役人,可減大半,優裕民力,以待邊鄙緩急之用,此萬世之利,社稷之福也。”
光尤以爲不可。此二事,臣自別有畫一利害文字,甚詳,今此不敢備言。
及去年二月六日敕下,始行光言,復差役法。時臣弟轍爲諫官,上疏具論,乞將見在寬剩役錢雇募役人,以一年爲期,令中外詳議,然後立法。又言衙前一役,可即用舊人,仍一依舊數,支月給重難錢,以坊場河渡錢總計,諸路通融支給。皆不蒙施行。及蒙差臣詳定役法,臣因得伸弟轍前議,先與本局官吏孫永、傅堯俞之流論難反復,次於西府及政事堂中與執政商議,皆不見從,遂上疏極言衙前可雇不可差,先帝此法可守不可變之意,因乞罷詳定役法。當此之時,台諫相視,皆無一言決其是非。今者差役利害,未易一二遽言,而弓手不許雇人,天下之所同患也,朝廷知之,已變法許雇,天下皆以爲便,而台諫猶累疏力爭。由此觀之,是其意專欲變熙寧之法,不復校量利害,參用所長也。臣爲中書舍人,刑部大理寺列上熙寧已來不該赦降去官法凡數十條,盡欲刪去。臣與執政屢爭之,以謂先帝於此蓋有深意,不可盡改,因此得存留者甚多。臣每行監司守令告詞,皆以奉守先帝約束毋敢弛廢爲戒,文案具在,皆可復按。由此觀之,臣豈謗議先朝者哉!
所以一一縷陳者,非獨以自明,誠見士大夫好同惡異,泯然成俗,深恐陛下深居法宮之中,不得盡聞天下利害之實也。願因臣此言,警策在位,救其所偏,損所有餘,補所不足,天下幸甚。若以其狂妄不識忌諱,雖賜誅戮,死且不朽。臣無任感恩思報,激切戰恐之至。取進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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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安石年譜長編』,2018年1月1日,中華書局,劉成國。
目錄
卷一
家族世系
宋眞宗天禧五年辛酉(1021),一歲
乾興元年壬戌(1022),二歲
宋仁宗天聖元年癸亥(1023),三歲
天聖二年甲子(1024),四歲
天聖三年乙丑(1025),五歲
天聖四年丙寅(1026),六歲
天聖五年丁卯(1027),七歲
天聖六年戊辰(1028),八歲
天聖七年己巳(1029),九歲
天聖八年庚午(1030),十歲
天聖九年辛未(1031),十一歲
明道元年壬申(1032),十二歲
明道二年癸酉(1033),十三歲
景祐元年甲戌(1034),十四歲
景祐二年乙亥(1035),十五歲
景祐三年丙子(1036),十六歲
景祐四年丁丑(1037),十七歲
寶元元年戊寅(1038),十八歲
寶元二年己卯(1039),十九歲
康定元年庚辰(1040),二十歲
卷二
康定二年、慶曆元年辛巳(1041),二十一歲
慶歷二年壬午(1042),二十二歲
慶歷三年癸未(1043),二十三歲
慶歷四年甲申(1044),二十四歲
慶歷五年乙酉(1045),二十五歲
慶歷六年丙戌(1046),二十六歲
慶歷七年丁亥(1047),二十七歲
慶歷八年戊子(1048),二十八歲
皇祐元年己丑(1049),二十九歲
皇祐二年庚寅(1050),三十歲
皇祐三年辛卯(1051),三十一歲
皇祐四年壬辰(1052),三十二歲
皇祐五年癸巳(1053),三十三歲
皇祐六年、至和元年甲午(1054),三十四歲
至和二年乙未(1055),三十五歲
卷三
至和三年、嘉祐元年丙申(1056),三十六歲
嘉祐二年丁酉(1057),三十七歲
嘉祐三年戊戌(1058),三十八歲
嘉祐四年己亥(1059),三十九歲
嘉祐五年庚子(1060),四十歲
嘉祐六年辛丑(1061),四十一歲
嘉祐七年壬寅(1062),四十二歲
嘉祐八年癸卯(1063),四十三歲
宋英宗治平元年甲辰(1064),四十四歲
治平二年乙巳(1065),四十五歲
治平三年丙午(1066),四十六歲
治平四年丁未(1067),四十七歲
卷四
宋神宗熙寧元年戊申(1068),四十八歲
熙寧二年己酉(1069),四十九歲
熙寧三年庚戌(1070),五十歲
卷五
熙寧四年辛亥(1071),五十一歲
熙寧五年壬子(1072),五十二歲
熙寧六年癸丑(1073),五十三歲
卷六
熙寧七年甲寅(1074),五十四歲
熙寧八年乙卯(1075),五十五歲
熙寧九年丙辰(1076),五十六歲
熙寧十年丁巳(1077),五十七歲
卷七
元豐元年戊午(1078),五十八歲
元豐二年己未(1079),五十九歲
元豐三年庚申(1080),六十歲
元豐四年辛酉(1081),六十一歲
元豐五年壬戌(1082),六十二歲
元豐六年癸亥(1083),六十三歲
元豐七年甲子(1084),六十四歲
元豐八年乙丑(1085),六十五歲
宋哲宗元祐元年丙寅(1086),六十六歲
卷八
譜餘
附録
一、傳記資料四種
二、著述考附王雱
三、參考書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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