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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방황
이 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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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도
세월의 약이 스며들면
아름다운 빛깔의 추억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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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상투적이고 어떻게 들으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말을 떠올리고 거듭 곱씹게 된 것은 길에서 준이 녀석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군에 가려고 휴학하고 빈둥거리는 녀석을 동 사무소 앞에서 늦은 시간에 마주친 것이다.
저녁에 술 마실 일이 있다 싶으면 차를 가져가지 않는다. 오늘도 술을 좋아하는 K박사와 저녁약속을 하고 차를 가져가지 않고 나갈 적에는 택시를 이용했다. 기분 좋게 한잔하고 들어올 적에는 이쪽 방향으로 오는 버스에 올랐다. 오랜만에 타는 버스라 노선은 잘 모르지만 우리 동네 입구를 거쳐 간다는 것만 알고 정류장에서 집까지 십오 분 정도 걸을 각오를 하고 버스를 탔다. 술자리가 약속되면 차를 가져가지 않는 이유는 대리운전을 한 번 부르면 전화번호를 알고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문자 메시지가 귀찮고 조금만 늦으면 차를 세울 곳이 없어 집주변을 몇 바퀴 돌아야 한다. 그게 성가셔서 차를 가져가지 않는 것이 버릇으로 굳어 이젠 차를 가져가지 않는 것이 편하다.
한잔하고 버스를 타고 동네 입구에서 내려 걸어오는데 녀석이 나를 지나치고 나서 뭔가 이상했던지, 아니면 핏줄이 당겼던지 나를 호명했다. 가로등 사각지역이라 좀 어두웠다. 녀석은 나를 지나치고 나서 등 뒤에서 불렀다.
-아버지!
-어? 누구? 준이냐? 이 시간에 어딜 가냐?
녀석은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멀리 나갈 모양새는 아니다.
-친구랑 산보 좀 하려구요.
그때서야 옆에 서 있던 녀석이 꾸뻑 인사를 했다.
-누구 준호냐?
-아니에요. 병재입니다. 근데 아버지 어디 갔다 오시는 길이예요?
-아버지 친구 만나서 한잔하고 버스타고 오는 길이다.
-택시를 타지 그러셨어요.
-이 자식아. 택시비가 없어서 버스를 탔다. 잔돈이 남더라. 여기 있다.
주머니에 든 동전을 꺼내 아들 녀석에게 장난스럽게 내밀었다.
-에게! 이게 다예요.
녀석은 마지못해 내미는 동전을 받았다.
-일찍 들어와라.
-병재가 낼 모레 군대 가요.
-그러냐? 육군으로 가는 거냐?
-예.
-지독히 더울 때 가는구나. 훈련소에서 고생 하겠는데........ 저녁에 술 먹을 거냐?
-모르겠어요. 무작정 나가는 거예요.
-그래?
모레 군대 간다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반바지 뒤주머니에 든 지갑을 꺼내 지폐 석 장을 병재에게 내밀며 말했다.
-낼 모레 군대 가는데 호프라도 한잔해라.
-고맙습니다.
키가 나보다 한 뼘이나 큰 병재는 꾸뻑 인사를 하고 망설임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술 먹고 사고 치지 마라.
-알겠습니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하고 녀석들을 보내고 돌아섰다.
그리고 걸어서 집으로 향하며 내가 녀석들의 시절을 돌이켰다.
*
벌써 삼십 년이 넘는 저쪽을 지금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돌이키지만 나 역시 한때 지독히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에서야 정체성의 혼란기라고 명명하는 그 시절을 돌이키면 아름다운 빛깔로 변해 있다. 당시에는 극심한 혼란으로 거의 죽을 맛이었지만 세월이 약이다. 시기로 따지면 억지로 들어간 따라지 대학을 휴학하고 군에 가기까지의 기간이었다. 준이 녀석과 비슷한 나이 때였다.
그 시절 나는 생의 목적 없이 좌절과 혼란에 빠져 하루하루를 대책 없이 죽이고 있었다. 나는 지방 따라지 대학을 한 달 다니다 휴학계를 냈지만 어떤 친구는 대학을 착실하게 다니며 로망스를 찾고 있었고 실업계를 나온 친구는 은행이나 회사에 취직하여 돈을 벌고 있던 시기였다. 나는 재수를 하는 아니고 취업을 한 것도 아니고 대학을 다나는 것도 아닌 채로 친구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공장이라는 곳에 두 번이나 취직을 했지만 두 곳 다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 두었고 재수 전문인 단과학원에 등록 했지만 빠지는 날이 더 많았다.
저녁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대학가를 방황했다.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 당시에 종말론이 퍼져 민심과 사회를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었는데 나는 꼭 그렇게 되어 지구가 없어지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때 좌절이라는 게 무엇인가 뼈저리게 느끼던 시기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집을 향해 걸으면서 그 시절을 회상했다. 정말 세월이 약이다. 생각하니 아름다운 시기였다는 생각이 압도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는 두 번째 취업한 정밀공장에 한 달을 다니면서 중대한 사고를 쳤다. 회사에서 홍일점인 경리 아가씨와 눈이 맞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인 나보다 한 살 작은 처녀, 숙이는 나를 무지 좋아했다. 내 방식대로 결과를 단칼에 푹 쑤셔 얘기하면 지금은 아내가 된, 철이 없는 그녀를 만난 지 보름 만에 임신을 시킨 것이다. 그런 기가 막힌 사고를 치고도 나는 딱 한 달을 채우고 그 공장을 그만두고 임신 사실을 모르고 연락을 끊고 생의 좌표를 찾아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빌고 빌었던 지구 종말은 결국 오지 않은 것이 실망스러웠다.
돌이키면 참으로 철없는 방황이었다.
방황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원하는 대학을 가기위해 마음을 다잡고 지금은 수능이라 명칭이 변했지만 당시의 예비고사를 치기 위해 친구의 자취방에서 수2 정석을 펴놓고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을 때, 까맣게 잊고 있던 두 번째 공장의 경리 아가씨가 어떻게 수소문하여 내가 있는 곳을 찾아내고 제 엄마의 손을 잡고 나를 찾아왔다. 골방의 책상 앞에 앉아 문제를 풀다가 밖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에 슬리퍼를 끌고 자취방 부엌을 통과하며 마당에 나와 보니 아랫배가 제법 불룩한 그녀가 제 엄마로 보이는 아줌마 옆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파악하는 순간 마른하늘에 번개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기고 지나갔다. 얼이 나간 정신을 수습하고 파랗게 질린 낯으로 공손하게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눈에는 내가 지금 안녕하게 보이니?
지금은 ‘조선에 없는 김 서방!’ 이라고 찬사와 총애를 아끼지 않는 나의 장모님께서 내게 뱉은 첫마디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때 눈빛은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그 말은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삼십오 년이 지났지만 그 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나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모르고 있는데 내 몰골 아래위를 훑어보던 숙이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나직하지만 역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집주인 아줌마가 대청 유리문을 열고 무슨 일인가 지켜보고 있는 까닭이었으리라.
-아! 예.......
맑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 숙이와 그녀의 엄마를 누추하기 짝이 없는 방으로 안내했다. 남학생들 자취방이 대충 그렇듯이 방은 앉을 자리조차 없을 정도로 미처 치우지 않은 라면 먹은 냄비와 빨랫감과 이불이 늘려있었다. 방을 둘러보니 앉으라는 소리조차 할 수가 없었다. 숙이 엄마 역시 앉을 자리가 없었든지 내가 수학 문제를 풀던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다 살아계시니?
-예........
-집의 전화번호를 불러라.
역시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숙이는 제 엄마 옆에 엉거주춤 서서 네게 순순히 가르쳐 주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이며 눈빛으로 주파수를 던졌다. 휴대폰이라는 통신 매체가 개발되지 않은 시절이라 당연히 지역번호와 집 전화번호를 불러줄 수밖에 없었다. 전화번호가 몇 번이더라........ 너무 당황해서 집 전화번호가 얼른 기억나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가까스로 기억을 더듬어 집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숙이 엄마는 내가 수학문제를 풀던 연습장에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는 그 페이지를 북 소리가 나도록 찢어서 접은 다음에 주머니에 넣고는 바로 일어섰다.
-가자. 긴 얘기 할 것 없다.
결연에 찬 목소리는 나에게 던진 말이 아니라 숙이에게 한 말이었지만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대문 밖까지 따라 나가 그녀들의 등 뒤에서 꾸벅 인사를 했다. 숙이 엄마는 돌아보지 않았고 구십 도로 인사를 한 내 척추에서 두두둑, 하는 뼈가 끊어질 듯 좌절의 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와서 펼쳐놓은 수2 정석을 소리가 나도록 탁 덮어버렸다. 그 이후로는 평생 그 책을 펴보지 않았다. 책을 덮어 벽으로 던져버리고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대충 챙겼다. 책은 다 버리고 옷가지만 챙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들이닥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자취방에 있기가 불안했었다.
어디론가 숨어야 한다고 마음먹고 가방을 메고 나섰지만 주머니는 비어 있고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막상 친구 자취방을 나오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7호 광장을 지나서 걷고 걸어 반고개를 넘어서다가 간판도 없는 허름한 막걸리 집에 들어갔다.
김치에 막걸리 반 되를 시켜놓고 앉아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감이 일지 않았다. 수심에 찬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세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담뱃불을 빌리자고 했다. 거기서 담뱃불을 빌려준 게 인연이 되어 그 자리에 앉은 김 기사를 사수로 모시고 포클레인을 배우러 떠났다.
인생이 한 순간에 그렇게 쉽게 바뀔 줄은 미처 몰랐다. 무엇보다 잘 곳이 있고 공짜로 먹여준다는 말이 더 없이 반가웠다. 생각할 여유가 없이 그 세 명중의 한 명을 따라서 토목공사 현장으로 가서 포클레인 조수가 되었다. 수심에 찬 나에게 막걸리를 따루어 주던 건장한 청년이 바로 나에게 포클레인을 가르친 사수,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연락이 끊겼지만 호형호제하던 김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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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레인 조수! 그게 내 평생 밥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벌써 삼십오 년 전의 일을 더듬다가 보니 주유소 앞을 지나고 있었다. 아득한 옛 생각에 잠겨 본능에 의해서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언제 붙였는지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담배가 꽂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숨는 게 최선의 묘책인 줄 알았다. 이 현장이 끝나면 저 현장으로 가고, 그 현장의 작업을 마치면 또 다른 현장으로 가고 친구들과도 연락을 두절한 채 그렇게 기술을 배우며 떠돌아 다녔다.
-김 사장님! 한잔하고 오시는 갑네.
주유소 최 사장이 마당을 서성이다 나를 보고 한마디 던졌다. 늦은 시간이라 종업원들은 퇴근을 한 모양이다.
-아, 예........ 아직까지 영업을 하시는군요.
-이제 문 닫으려고 내려왔어요. 오늘 어지간히 덥죠.
-그러네요. 수고하세요.
주유소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후덥지근하다. 아직도 식지 않은 아스팔트 열기에 목덜미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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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더듬이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아련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렇게 현장을 떠돌아다니며 중장비 조종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물론 집안에 거대한 태풍이 휘몰아치고 나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태풍의 눈 속에서 집은커녕 친구들과도 연락을 두절하고 육 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요즘에야 혼전임신을 예사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특히나 우리 김 씨 가문의 집성촌인 우리 부락에서 그런 불경스런 일이 생긴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집안뿐만 아니라 온 동네가 난리가 났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숨어 지냈다.
착실하게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며 기술을 배우니 사수가 없이도 하루나 이틀정도는 현장에 말썽 없이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이 되었다. 그 동안 짬짬이 공부하여 면허도 냈고. 사 개월이 넘어서자 나의 성실성을 인정한 차주가 얼마간의 월급도 주었다. 비록 용돈에 불과한 월급이지만. 나는 사수와 차주로부터 인정받은 것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러다가 다음 현장으로 옮겨갔는데 그곳은 시내 아파트 현장이었다. 그 현장으로 옮겨간 다음날 고향 친구인 종수를 만난 것이다. 종수는 방학을 이용하여 그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로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사수와 점심시간 교대를 하고 포클레인 조종석에서 내리는데 녀석이 막아섰다. 나는 놀랐다. 태풍의 눈을 따라 고요히 흘러 다니는데 그런데서 녀석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도 연락이 안 되서 배 타러 간 줄 알았는데 포클레인 기사가 되었구나. 실력이 대단한데........
녀석이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녀석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긴 했는데 기름 묻은 손이 부끄럽고, 너무 오랜만에 만나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씩! 넌 여기 웬 일이냐?
-방학이라 아르바이트 뛰는 거야. 용돈이 궁해서....... 그런데 너 집에서 찾고 난리가 났다. 빨리 연락해 봐.
드디어 나올 말이 녀석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집에서? 집에서 왜 찾아?
모른 척 하고 물었다.
-입대 영장이 나왔대. 얼마 안 남았을 걸?
입대영장이라........ 그게 뭐더라? 잠시 헷갈렸다. 하마터면 그게 다야? 하고 물을 뻔 했다.
녀석과 잠시 안부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녀석의 입에서 숙이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친한 친구 누구와 누가 입대했다는 얘기뿐이었다. 숙이 때문에 집안에 난리가 났을 터인데 그 문제에 대해서 먼저 물어볼 수가 없었고 종수의 얘기를 들어서는 입대일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입대 일자를 알고 입영장소를 알았더라면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입대했을 것인데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밤새 전전긍긍하다가 다음날 김 기사에게 입대가 임박했다고 얘기하고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그날 바로 태풍의 눈을 빠져나와 귀향길에 올랐다. 결코 금의환향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태풍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아버지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입술을 깨물고 북부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길은 참으로 정직하다. 한 번 지난 행보는 되돌릴 수 없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초조해지기는 당연한 사실, 집도 집이지만 숙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모든 궁금증을 억지로 눌러가며 창밖의 흘러가는 풍경을 훑었다. 송아지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까? 버스에서 내리면 십 분 정도 걸어야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에 도착하여 골목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기척을 듣고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다름 아닌 숙이었다. 부엌에서 몸배 차림으로 나온 숙이도 굳어 섰고 나도 마당에 그대로 굳어 눈을 의심했다. 숙이가 우리 집 부엌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그날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명치가 아리다.
숙이가 우리 집 부엌살림을 하고 있다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마당이 한 번 기우뚱거리고 멀건 대낮에 별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 현기증에 하마터면 쓰러질 뻔 했다. 밖에 무슨 기척이 났던지 방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방문을 벌컥 여셨다. 마당에 선 나를 보고 놀라며 반갑다는 투로 일갈하셨다.
-이이구! 이 사람아. 이렇게 구리알 같은 자식과 저렇게 이쁜 각시를 두고 어디를 그렇게 다니셨는감? 어여 들어오시게.
인사를 드릴 사이도 없이 방안으로 눈길을 던지니 할머니는 방안에서 갓난아기를 재우고 계셨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혔다. 묻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마도 과수원에 나가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애기를 보고 숙이는 부엌일을 하던 중인 모양새였다.
-입대영장 나왔다며?
숙이에게 던진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숙이는 그대로 굳어서 고개만 까딱였다.
-영장 가져와!
다분히 명령조의 말이었다. 숙이는 냉큼 방으로 들어가 문갑 위에 얹힌 영장을 들고 나왔다. 그 동안 나는 신발도 벗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숙이가 내민 영장을 보니 입대일이 겨우 보름 정도 남아 있었다.
-이 사람아! 너무 좋아서 그러는가? 방으로 들어와 자네 새끼를 좀 보게.
남의 속도 모르고, 할머니는 마루에 앉은 나를 보고 한마디 던졌다.
영장을 훑어보고 그것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말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집이라는 공간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거북하고 서먹서먹했다. 아무래도 집에 있기보다는 현장으로 가서 보름간이라도 포클레인을 타다가 바로 입대하는 게 아버지 어머니와도 마주치지 않고 나을 것 같았다.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가방을 들고 마당을 가로 질러 골목으로 향했다. 그것을 본 할머니가 고함을 쳤다.
-이 사람아! 어디 가누? 손부야 쟤 좀 잡아라.
할머니의 지시가 떨어지자 숙이가 냉큼 달려와 내 팔목을 잡고 매달렸다.
-이러지 말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
그렇게 밀고 당기고 있을 때 골목으로 지나가시던 재종조부가 나를 보고 아는 체 했다.
-너? 왔구나. 그렇잖아도 너그 아부지가 연락 안 된다고 걱정하던데.......
나는 숙이를 뿌리치고 재종조부께 꾸뻑 인사를 드렸다.
그러고는 얌전히 다시 마당으로 들어섰다. 안방으로 가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가 담배를 빼물었다. 분위기를 보니 내 방이 아니라 숙이의 방이 되어 있었다. 아니, 아기의 방이 되어 있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내 정체성을 더듬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의 항로는 멀고 험난할 것 같았다. 당장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우가 그렇다. 정말이지 면목이 없었다. 그 날 저녁에 넘어야할 거대한 폭풍과 파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 날 나는 방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포즈로 아버지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꼼짝도 안하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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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아버지의 연세는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돌이키니 정말 할 말이 궁하다. 그때의 내 나이가 된 준이 녀석이 그런 사고를 쳤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줄까.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렵다.
할 수 있는 말을 궁리하며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주유소 뒤편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들어갔다. 규모가 너무 작아 작은 공원이라기보다는 놀이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삼각형 땅이라 구획정리 하면서 팔리지 않고 보기 싫게 흉물로 남은 체비지에 불량 청소년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는 곳이 되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자 시에서 작년에서야 놀이터로 조성한 곳인데 어울리지 않게 놀이터 중간에 정자를 지어서 인근에 사는 아이나 어른들이 자주 애용하는 곳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시간이 너무 늦어서인지 놀이터는 비어있었다. 정자로 올라가 땀을 식히며 담배를 한 대 빼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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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게 핏줄을 당겼는지 과수원에 나가신 아버지는 경운기에 어머니를 태우고 그날따라 비교적 일찍 들어오셨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경운기 소리를 듣고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뵐 면목이 없었다.
저녁상을 받고서 수저도 들지 않고 나를 외면하시는 아버지 앞에 꿇어앉았다.
-사내들이야 헌 갓을 쓰고 똥 누기지. 때맞추어 왔구나. 그 동안 뭐하고 다녔냐?
-포클레인 운전배우고 있었습니다.
-면허는 땄냐?
-예.
-그래? 공부보다 수월하더냐?
-예.
-착실하게 군대나 다녀오거라.
그 말을 끝으로 저녁을 먹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말씀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은 물 건너갔다. 어머니는 내 눈치와 아버지의 눈치를 번갈아 보느라 아주 불편한 밥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날 난생처음으로 어머니 앞에도 꿇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걸 어떻게 하겠냐? 쟤 보기 껄끄럽겠다. 밥이나 먹자.
자포자기의 뉘앙스가 풍기는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수저를 들 수가 있었다. 수저를 들었지만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불편한 밥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숙이의 눈치를 보며 의무적으로 몇 숟갈 떠다가 아버지와 맞추어 숟가락을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그렇게 보라던 아기는 그때까지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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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생각하면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께 너무 불효를 한 것 같아 가슴이 쓰리다. 병재란 놈이 군에 가는데 내가 왜 이렇게 심란한지 모르겠다.
정자에 앉자 다시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그렇게 옛날 회상에 잠겨 있을 때 이웃에 사는 전직 한의사 최 노인이 바람 쐬러 나오셨다. 담배를 끄고 아는 체 하며 인사를 했다.
-김 사장이여? 야심한 시간에 여기 웬일인감?
-바람 쐬러 나왔습니다.
-나도 너무 더워서 잠이 안와서리........
-그럼 바람 쐬고 들어가십시오.
-그랴. 잘 자여........
극심한 열대야다. 밤이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른다. 방송에서는 삼십 년 만에 찾아온 늦더위라고 연일 때리고 있다. 빨리 들어가서 물이라도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자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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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기를 본 것은 설거지를 마친 숙이가 할머니 방에서 아기를 안고 와서 방에 누이고 잘 준비를 할 무렵이었다. 숙이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안고 들어왔지만 나는 한동안 벽을 보며 외면하고 있었다. 숙이가 이부자리를 펴고 중간에 아기를 눕히자 아기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숙이는 재바르게 아기의 기저귀를 살펴보고 기저귀를 가는 동안 아기를 보았다. 그때 내 마음이 동했다. 엄연한 인격체다. 네 잘못이 아니다. 뭐 그런 생각이 일어 기저귀를 갈고 있는 아기를 보았다. 콧날이 오똑한 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기를 보니 신기했다. 저 인격체를 나와 숙이가 만든 것이란 말이지. 이게 핏줄이 당기는 것인가 생각하며 담배를 빼물었다.
-담배는 밖에 나가서 피세요.
다분히 명령조로 던지는 숙이의 말이었다. 아참! 아기가 있는데 담배를 피워선 안 되지. 담배를 다시 갑에 넣으며 숙이의 노예가 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다음날부터 입대 전날까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하시는 과수원의 일을 도우며 말썽 없이 지내고 군에 입대했다. 몇 차례 휴가를 나오고 개구리복이라 불리는 예비군복에 예비역 병장 계급장을 달고 만기전역을 하고 오니 숙이의 품에 안긴 아기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둘 다 딸이었고 큰애는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개구리복을 벗어 옷걸이 걸면서 주머니에서 짤랑 동전소리가 나자 큰애가 쪼르르 달려와 두 손을 모아서 내밀었다. 말은 못하지만 벌써 돈을 알고 있었다. 기분이 참 고약해졌고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가슴을 눌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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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두 아기가 지금은 모두 아이 엄마가 된 준이의 누나들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사고를 쳤으니 아이가 귀한 줄을 몰랐다. 그때부터 나는 죽도록 일을 했다. 중기가 나의 직업이었다. 아버지께선 과수원을 물려받는 게 어떠냐고 하셨지만 나는 정중히 사양하고 중기 일을 했다. 딸 둘을 키우면서 피임을 하다가 실수로 아이가 생겼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 땐 살림이 너무 어려워서 셋을 키울 자신이 없어 삼 개월 된 아이를 지우면서 아내가 속칭 배꼽 수술이라는 것을 받았다. 내가 아니라 아내가 적극으로 나섰다. 당시만하더라고 정책적으로 그런 수술은 정부에서 공짜로 해주었다. 인구정책에 있어서 근시안적인 정부의 탓이다. 아이를 지우고 영구피임인 배꼽 수술하는 데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간다면 꿈도 꾸지 못하고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없앤 아이에게 참 미안하고 죄책감이 인다. 엄연한 살인행위였다. 핑계가 아니라 그 행위에 정부도 한 몫을 했다. 그 뒤로 절에서 천도제를 지내면 그렇게 사라진 아이를 꼭 올리곤 한다.
참 가슴 여미는 일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슬하에 자식이라곤 준이 누나 둘이어야 맞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결정적인 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상을 치면서였다. 장례를 치루는 내내 아들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의 생각도 그 때 동했던 모양이다. 장례를 마치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아내는 배꼽 수술을 후회하며 복원 수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돈이 많이 들고 성공 확률은 오십 프로 정도 된다고 했다. 아내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본 눈치였다. 나는 아내 보기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지금이야 셋째를 낳으면 출산에 드는 비용과 대학 등록금 전액을 면제해 준다고 떠들고 있지만 정부의 근시안적인 행정은 그 때만해도 달랐다. 셋째를 가지기 위해 복원 수술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고 셋째를 낳을 때 지원은커녕 의료보험도 적용시켜 주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출생신고를 마쳐야 의료보험이 적용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아내는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닌 모양이다. 그리곤 어느 날 수술 날자가 잡혔다고 나에게 통보했다. 오십 프로의 성공 확률이 찜찜했지만 아내가 결정한 일이라 그러라고 하고 수술비가 든 통장과 도장을 던져주었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복원 수술이 배꼽 수술처럼 간단한 시술인 줄 알았다. 나는 일하느라 바쁘다고 빙자하고 아내의 병원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사흘 만에 퇴원한 아내의 수술 부위를 살펴보니 배꼽아래 한 뼘이 넘게 절개하고 꿰맨 대수술이었다. 그 수술 부위를 보니 내가 못할 일을 저질렀다 싶어 아내에게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 때 수술비가 중소도시의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에 가까웠다. 그렇게 큰돈을 들이고 사람을 이토록 고생시켜 성공을 못하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수술 후 넉 달 만에 임신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래?
무표정하게 대답은 건성으로 했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었고 아들인지 딸인지 그게 엄청 궁금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미안해서 내색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사유는 잔뜩 눌러 놓은 용수철 같아서 충격을 주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종잡을 수가 없다. 준이 친구 병재란 놈이 군에 간다는데 내가 녀석들의 시절을 회상하며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참으로 뼈아픈 일이었지만 지금 돌이키니 세월의 약이 스며들어서인지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해있다.
그토록 어렵게 임신한 애를 봄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던 날 낳아보니 딸이었다. 딸 셋! 그 좌절보다 순산한 게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정상적으로 여자구실을 할 수 있도록 아내를 리모델링해 준 의료진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한편 딸이란 게 못내 서운했다. 그날은 잊을 수가 없다. 봄비가 줄기차게 사흘을 내렸다. 자고나면 갓난아기의 아랫도리를 살펴보고 또 확인을 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고추는 사흘이 지나도 갓난아기의 사타구니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살면서 늘 얘기했다. 일찌감치 아이를 낳았으니 사십대 중반이 되면 둘 다 시집을 보내게 된다. 그때부턴 버는 돈으로 여행만 다니자고 약속하고 우리의 찬란할 미래를 위해 죽도록 일을 했다. 그런데 덤으로 얻은 게 또 딸이니 우리의 삶의 목적에 혼란기가 찾아든 것이다. 얼마나 서운했으면 아이의 이름을 지어 출생 신고할 생각은 않고 서운이라 부르며 출생신고를 기간 내에 하지 않아 종내에는 소정의 과태료를 물고 출생신고를 하였다. 이미 우리가 계획했던 사십대 후반의 세계여행계획은 서운이로 하여금 물 건너갔다. 서운이를 낳을 때 큰 애는 초등학교 오 학년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이고 알 것을 다 아는 큰애에게 부끄러웠지만 오기가 생겼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일곱이든 여덟이든 낳자고 술에 취한 어느 날 밤에 아내에게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의외로 아내는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날부터 낮에 일을 마치고 오면 밤마다 아이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 때 나는 이미 포클레인 세 대나 가진 차주가 되어 있었다. 아이가 넷이라도 먹여 살릴 자신이 있었다. 나는 일을 하고 아내는 절에 다니며 생남불공을 드렸다. 아내의 기도 덕분인지 매일 밤 노력한 결과인지 서운이와 열한 달 차이로 아이를 생산했다. 기다리던 고추였다. 그 고추를 달고 나온 그 녀석이 바로 준이다. 그 녀석은 낳자말자 바로 다음날 출생신고를 했다. 그 때만해도 출산정책에 근시안적인 행정이라 읍사무소 직원은 네 번째 아이를 출생신고하자 무슨 원시인 보듯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나는 경멸에 찬 그 눈빛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렇게 낳은 녀석이 길에서 마주친 준이 녀석이다.
녀석이 군에 갈 나이이니까 그게 꼭 이십 년 전의 일이다. 아이가 넷이나 되니 어깨가 무거웠다. 그러나 나도 고추달린 자식이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을 했다. 돌이키니 책을 한 권 써도 모자랄 파란만장한 인생의 항로였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첫 아이를 임신시켜놓고 정체성 혼란기에 빠져 방황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십오 년이 된다. 늦게 낳은 녀석이 벌써 군에 갈 나이가 되었고, 세월은 참 빠르다. 늦게 낳은 자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넷에 낳았으니 요즘으로 따지자면 그리 늦은 나이도 아니다. 첫아이를 워낙 어린 나이에 낳았으니 서운는 제 언니와 띠동갑이지만 결코 노산은 아니었다. 녀석들은 말썽 없이 잘 자라주어 지금은 그 당시의 근시안적인 정책 산아 제한에 부응하여 아이를 하나 낳은 놈들이 나를 부러워한다.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일부러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우리 넷째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은근히 아이 많음을 자랑한다.
그렇다.
당시에는 견딜 수없는 고통과 아픔도 세월의 약이 스며들면 아름다운 빛깔의 추억으로 변한다.
집 앞에서 삼층을 올려다보니 아내의 방에 불이 켜져 있다. 셋째 서운이는 대학 기숙사에 있고 집에서 빈둥거리던 준이 녀석은 나갔다. 그렇다면 집에는 아내 혼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얼른 올라가서 아내에게 수작을 걸어 준이 녀석 동생이나 하나 만들어 볼까? 그것도 무지 재미있겠다. 환갑 밑자리 깔아놓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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