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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두류~법계사~천왕봉(점심)~제석봉~향적사~서천당~촛대봉~세석~거림
<개요>
김종직_유두류록
○ 1472년 8월 15일, 기묘일(양력 9월26일)
<전략>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날씨가 개이게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술과 과일을 올리고 성모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 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을 사모해 왔으나, 직무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구름 사다리〔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여서 산과 바다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승려가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눈썹과 눈,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갈라진 틈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나라는 천 개 백 개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라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 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 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도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무례하고 방자하며 공경스럽지 못한 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습하고 찬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사당 안에서 네 사람이 서로를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차가운 기운이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두터운 솜 옷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누(壘)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와 사방이 서로 한데 잇닿아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퇴지(退之)의 정성과 일의 기미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그대들과 함께 기모(氣母)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 1472년 8월 16일, 경진일(양력 9월27일)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몇 리쯤 가니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석혈(石穴)을 뚫고 나와 힘껏 걸어 향적사에 이르렀다. 향적사에는 승려가 남아 있지 않은 기간이 벌써 2년이나 되었지만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문의 자물쇠와 향반(香槃)의 기름이 이전처럼 남아 있었으므로, 깨끗이 청소하도록 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 자욱한 구름이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어,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너른 바위로 나아가 바라보니, 육천(䔖川)이 길게 이어져 있고, 여러 산과 해도(海島)는 완전히 혹은 반쯤만 드러나고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과 같았고, 꼭대기를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옆에 있는 흰 깃발은 남쪽으로 펄럭였는데, 회화승(繪畫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내키는대로 구경하면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않았다. 다시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드니,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 1472년 8월 17일, 신사일(양력 9월29일)
새벽녘 해가 양곡(暘谷)에서 솟아오르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기운이 노을 빛깔이었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하여 다시 천왕봉을 오르기는 힘들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컨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어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준 것인데,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면 평생 동안 마음속에 담아온 것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지레 석문(石門)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이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라고 하고, 이에 유극기, 해공과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조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나는 큰 기러기와 고니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 날 수는 없었다.
이 때 막 날이 개니 사방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다만 대단히 아득하여 끝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체로 먼 데를 구경하면서 그 요령이 없다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아주 잘 일러 주었다.
이 산은 북쪽에서 이어와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우뚝 솟아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인데, 동쪽으로 거의 이백 리를 뻗어 와 이 봉우리에 이르러 재차 우뚝하게 솟아 올라 북쪽으로 이어져 다하였다. 그 사면(四面)의 빼어남을 경쟁하고 흐름을 다투는 조그만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계산에 능한 사람이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살펴보면 성첩(城堞)을 끌어서 둘러놓은 것과 같이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듯하고, 청황색이 복잡하게 섞인 속에 흰 무지개가 관통한 것과 같은 모습은 진주(晉州)의 강과 같은 듯하며,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씩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늘어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듯하다. 산음(山陰),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고을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지척에 있는 산들은 바로 황석(黃石) [안음(安陰)에 있다.]과 취암(鷲巖) [함양(咸陽)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덕유(德裕) [함음(咸陰)에 있다.], 계룡(鷄龍) [공주(公州)에 있다.], 주우(走牛) [금산(錦山)에 있다.], 수도(修道) [ 지례(知禮)에 있다.], 가야(伽耶) [성주(星州)에 있다.]이다.
또 동북쪽으로 지척에 있는 산들은 황산(皇山) [산음(山陰)에 있다.]과 감악(紺嶽) [삼가(三嘉)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팔공(八公) [대구(大丘)에 있다.], 청량(淸涼) [안동(安東)에 있다.] 이다.
동쪽으로 지척에 있는 산들은 도굴(闍崛) [의령(宜寧)에 있다.]과 집현(集賢) [진주(晉州)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비슬(毗瑟) [현풍(玄風)에 있다.], 운문(雲門) [청도(淸道)에 있다.], 원적(圓寂) [양산(梁山)에 있다.]이다.
동남쪽으로 지척에 있는 산은 와룡(臥龍) [사천(泗川)에 있다.]이고, 남쪽으로 지척에 있는 산들은 병요(甁要) [하동(河東)에 있다.]와 백운(白雲) [광양(光陽)에 있다.]이고, 서남쪽으로 멀리 있는 산은 팔전(八顚) [흥양(興陽)에 있다.]이다.
서쪽으로 지척에 있는 산은 황산(荒山) [운봉(雲峯)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무등(無等) [광주(光州)에 있다.], 변산(邊山) [부안(扶安)에 있다.], 금성(錦城) [나주(羅州)에 있다.], 위봉(威鳳) [고산(高山)에 있다.], 모악(母岳) [전주(全州)에 있다.], 월출(月出) [영암(靈巖)에 있다.]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성수(聖壽) [장수(長水)에 있다.]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용이나 범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하늘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유극기에게 알 만한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자축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은 많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라고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바위에 걸터앉아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였다. 여기에서 영신사와 좌고대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있었다.
속히 석문(石門)을 통해 내려와 중산(中山)에 올라가 보니 이곳도 토봉(土峯)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갔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유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만 하였으므로, 종자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가져오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가져왔다.
증봉(甑峯)을 넘어 진펄의 평원에 이르니,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은 단풍나무가 좁은 길에 서 있었는데, 그 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려야 했다.
<하략>
▼ 옛날에는 진주에서 두방재를 넘어 덕산으로 진입했고
함향에선 악양이나 쌍계사로 접근하는길은 팥두재~당두재~오봉마을~새재~무재치기~느진목재~신선제단~천왕사~묵계재~회남재로 넘어다녔다고한다. 트랙을 그려보니 일직선이다.
▼ 순두류 셔틀버스는 단풍구경 온 유산객이 많아 수시로 운행중이다
▼ 순두류에서 산행을 산행을 시작한다(10:08)
▼ 로타리 대피소(11:01)
▼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높이 1,400m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로서 544년에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 6·25 때 불탄 뒤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에 법당이 준공되어 절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법당 왼쪽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삼층석탑이 있다
▼ 연혁을 기록해 놓은 마애석각 끝에 華嚴寺立이라 적혀있다
▼ 흉물인 낙서
▼ 법당 뒷쪽으로 옥녀봉까지 이어진 옛길이 남아있다
▼ 인증샷으로 길게 널어선 대기줄(12:11)
▼ 영랑대
▼ 당겨본 좌고대(4.4km)
▼ 촛대봉
▼ 시루봉(장군봉)
▼ 창불대방향
▼ 영신봉 방향
▼ 연하봉
▼ 일출봉
▼ 하늘금 따라 백운암 능선
▼ 도착한 순서대로 점심을 먹고
▼ 후미와 합류해서 제석봉으로 향한다(13:03)
▼ 당겨본 남벽
▼ 통천문
▼ 의탄리 방향
▼ 통천문 전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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