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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재집(直齋集) 이기홍(李箕洪)생년1641년(인조 19)몰년1708년(숙종 34)자여구(汝九)호직재(直齋)본관전주(全州)초명기주(箕疇)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直齋集卷之一 / 詩 / 甓寺。陪尤菴先生。仍次畏丈贈先生韻。
黃驪之上甓寺秋。桂樹相樛山更幽。
珠邱咫尺葬聖人。是時赤舃來淹留。
平生山斗小子誠。暮年金丹先生憂。
三夜丁寧受頂鍼。魯質何堪此恩酬。
여강증어(驪江贈語) : 이기홍(李箕洪)이 송시열에게 지어 준 시. 《직재집(直齋集)》 권1 시(詩)에 ‘벽사배우암선생 …… 증선생운(甓寺陪尤菴先生 …… 贈先生韻)’이란 제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가 있는데 이를 가리킨 듯함. 벽사는 여주의 신륵사(神勒寺)를 가리킴.
운어(韻語) : 이기홍(李箕洪)이 보낸 시(詩)를 말함. 《직재집(直齋集)》의 시편(詩篇)에 이기홍이 덕원으로 유배 가는 스승인 송시열을 평구역(平邱驛)에서 작별하며 지은 ‘평구역배별우재선생(平邱驛拜別尤齋先生)’이란 칠언절구(七言絶句) 두 수가 있는데 이 시를 지적한 말인 듯하나 분명하지 않음.
直齋集卷之一 / 詩 / 平邱驛。拜別尤齋先生。先生謫德原。路經平邱。○乙卯○二首
숙종 | 1 | 1675 | 을묘 | 康熙 | 14 | 69 |
浮雲蔽日雁嘶酸。忍見先生泣楚蘭。嶺外春寒猶積雪。祗祈行李日平安。
師門心事暴無由。北塞誰憐白首囚。髭髮從看平昔勝。湧州今日似涪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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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汝九箕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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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九十 / 書 / 答李汝九癸丑十月十八日
현종 | 14 | 1673 | 계축 | 康熙 | 12 | 67 |
別後微吟李白潭水千尺之句。至今十餘日。而情思益耿耿。豈老懷易感而然耶。卽於便中。得十一日惠書。稍慰此心也。此歸到山裏。適大雪彌漫。雖朝鵲暮鴉亦不至。回思郊外時。不知如何忍耐耳。疏本。賴吾友周旋。何幸如之。賤疾方苦。前日贈語及問目。俱不得奉報。當俟少間矣。千萬把筆甚艱。只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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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九十 / 書 / 答李汝九癸丑十二月二十六日
來書鄭重。甚荷不鄙。驪江贈語。每欲奉報。而一病三冬。無意筆硏之役。訖玆遷就。茹恨而已。竊惟其所論說。有警於賤謬者甚深。蓋人之經營富貴。設色相高者。固不足道。而至於美其文詞。好其言語。務以勝於衆人者。無他。其病根皆從此一字生出。而如賤謬者。不能醫治。勢將以此終身矣。今吾友已知此字罪過如此之大。其能知之端。卽能治之藥。推此以往。將無病之不攻。無過之不改矣。其所成就。何可量也。然人心如水。易動難定。須涵養深厚。省察精密。然後眞可以庶幾也。古賢云。一時意能幾時子。此言當深味也。荷吾友相與之深。傾倒至此。還切愧悚。○頃承喜看退溪集。此意雖善。然豈若先讀程朱書乎。此書。衰老後則難讀也。尊王父大監前。不敢作書。晨昏之際。詮達此意如何。
別紙
仄伏聞以閔敎官嶪子廢疾立孫事。先生有所論說。然否。近日京中士大夫以閔事。論議紛紜。不審先生只據朱子喪服箚意而論之耶。抑又因禮經明文而論之耶。子廢疾立孫通行於士庶人。則題主一款。當何以爲之耶。以孫名題主。則與不忍死其親之意相戾。何以則得其宜耶。人家遭此變者亦或有之。此禮必須細考廣證。得其通行之的文。然後永爲上下遵行之地。伏乞詳細回諭。
凡喪。子有廢疾。則其孫代執其喪。分明有朱子說。而其說旣曰自天子以至於庶人云云。則可見其通貴賤言之也。今人之喜爲紛紛者。抑何見歟。至於題主一款。則未有分明可據之文。故京外之論。尙今多岐。然大綱旣正。則其小者異同。俟後歸一未晩矣。來諭以以孫題主與不忍死其親之意爲相戾。然則代執其喪。亦可以忍死其親乎。惟遞遷一節。似爲妨礙矣。然以朱子老而傳而告廟之文見之。則似亦有說矣。
槩聞於今日閔家之事。士林論議相背。是之者絶少。而非之者滔滔如是者。無他。春翁之議。與先生不合之致。而頃見玄石聞之。則春翁之議。始雖不合。而終與之同云。然則士論庶有歸一之路矣。所謂終合云者。未知有形諸文字之事耶。抑只以說及於酬酢之間耶。
閔禮事。已知其非之者多矣。同春之答喪家書。亦非敢以朱子之說爲非也。大意以爲當初以朱子說。爲必可行。其後思之。則多有窒礙處云云矣。及見愚說。亟走一力。追還其所答而不及云。蓋不但以鄙說爲不悖。亦意其因此以致紛紜也。今日果如此。眞所謂李文靖眞聖人也。愚也杜門却掃。不復言及此事。雖有來問者。亦一例以不知答之矣。今以來問之及。遽爾破戒。自笑其無定力耳。
凡喪。父在父爲主。不但子婦之喪。孫及孫婦之喪。皆當主之。若孫之喪。其父主之而祖不得主。則三年後祔廟時。以誰爲主而祔於何處耶。주-D002
據禮則其祖當爲主而祔於其祖。所謂中一而祔者也。周時。貴貴大夫。不主庶子。故庶子各主其子。後世不然。故無長庶。皆其父主之矣。
中庸註禮樂刑政之屬。○張谿谷曰。舍本章所言戒懼愼獨致中和切近之訓。而遠擧禮樂刑政以爲敎。此余之疑云云。未知其意。
a111_188a禮樂刑政。聖人設敎之具也。戒愼恐懼。君子由敎之事也。二者各異。而合而觀之。故不相入而相病。
谿谷曰。操則存。舍則亡。出入無時。莫知其鄕。惟心之謂歟。此孔子之言。而孟子引之以論心也。范淳夫女子讀此章曰。孟子不識心。心豈有出入。伊川先生聞之曰。此女不識孟子。却能識心。朱子曰。淳夫女知心而不知孟子。此女當是實不勞攘。故云無出入而不知人有出入。猶無病者不知人之疾痛也。余嘗讀此說。竊服伊川之言精透的實。而於朱子說。不能無疑。且已無勞攘。而不能知人之出a111_188b入。則聖人之生知安行者。終無以周知人心物態之情僞也。竊以爲谿谷之致疑朱子說者。恐未深思而精察也。范女之不識孟子。由不知人有操舍之道矣。朱子之論。豈不親切而易曉者耶。朱子之言。只以范女之無勞攘。而不知人之有操舍出入也。何可引此而推之於聖人之生知安行。而聖人之生知安行。亦豈徒無勞攘而已也哉。惟精惟一允執厥中者。其惟聖人。則人心物態之情僞。固無所逃於聖人明鑑之中矣。豈可以一婦女之無勞攘。擬之於聖人之極功也哉。
a111_188c心有眞體實用。體如鑑之明。用如能照。此何嘗有出入。伊川范女之以動靜而論心。是也。至於出入二字。則朱子謂之有善有惡。方其舍時。此心忽然在四方萬里之外。安得不謂之出也。旣謂之出。則其操而在此者。安得不謂之入也。此則孔子,孟子,朱子以操舍而論心。是也。二者各有所指。而今欲合而言之。故言愈多而義愈晦也。至於所論谿谷生知安行之說。則恐不審乎谿谷立言之本旨而遽加攻斥也。谿谷之以爲聖人之心無有人情物態之不正。而亦能知人情物態。則豈可謂范女自無勞攘而不知人之勞攘a111_188d乎。其意不過如此。非謂范女亦能生知安行如聖人也。
[주-D001] 賤 :
賤一本作淺
[주-D002] :
一本問目作答辭,答辭作小註
송자대전 제90권 / 서(書) /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계축년(1673) 12월 26일
보내온 편지가 정중하기 이를 데 없으니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매우 고맙네. 여강증어(驪江贈語)는 늘 답서를 보내려 하였으나 한겨울을 내내 병 속에서 지내다 보니 붓을 잡는 일에 마음이 내키지 않아 지금까지 이럭저럭 미뤄오며 안타까워할 따름이네.
가만히 생각건대 자네가 논설한 바는 나의 오류를 깨우쳐 줌이 매우 깊었네. 대체로 부귀를 위해 노력하면서 겉치레나 하는 것으로 서로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말할 것도 못 되지만 문사(文詞)를 아름답게 꾸미고 언어를 듣기 좋게 하면서 여러 사람을 이기려 하는 자들에 이르러서는 다른 것이 아니요 그 병근은 순전히 이 한 글자[一字]에서 빚어져 나온 것이네. 나같이 잘못된 자는 능히 다스려 고칠 수 없으니 형세로 보아 이렇게 세상을 마칠 것 같네만 지금 자네는 이미 이 글자의 잘못이 이같이 큼을 알았으니 그 알 수 있는 단서는 곧 다스릴 수 있는 약이네. 이를 미루어 간다면 앞으로 병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 없고 허물이 고쳐지지 않을 것이 없게 될 것이니, 그 성취를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 마음은 물과 같아서 흔들리기는 쉽고 안정되기는 어렵네. 모름지기 함양(涵養)을 깊게 하고 성찰(省察)을 정밀히 한 다음에야 참으로 거의 되었다고 할 것이네. 옛 현인이 이르기를 ‘한때의 뜻이 얼마나 갈 수 있는가.’ 하였는데 이 말을 마땅히 깊이 음미하여야 할 것이네. 자네가 나를 인정해 준 깊은 마음에 감동되어 이같이 가슴속의 말을 다 하고 보니 도리어 매우 부끄럽네.
저번에 《퇴계집》을 즐겨 본다는 말을 편지에서 읽었네. 그 뜻은 비록 좋으나 어찌 먼저 정자(程子)와 주자의 글을 읽는 것만 하겠는가. 이런 책은 늙어 쇠약하여지면 읽기 어렵네. 존왕부(尊王父 남의 할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대감께 감히 편지를 드리지 못하니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릴 때 이 뜻을 아뢰어 줌이 어떻겠는가?
별지
어렴풋이 들으니 교관(敎官) 민업(閔業)의 아들에게 폐질(廢疾)이 있어 손자를 세우는 일에 대해 선생께서 논하신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요즈음 서울 안의 사대부들이 민(閔)의 일로 논의가 분분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선생께서 단지 주자의 상복차자(喪服箚子)의 뜻에 의거하여 논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예경(禮經)의 분명한 글에 의해서 논하신 것입니까? 아들에게 폐질이 있으면 손자를 세우는 것이 사서인에게 통행하게 된다면 제주(題主)의 한 조항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자의 이름으로 제주한다면 ‘차마 어버이를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지 못한다.’는 뜻과 서로 어긋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람의 집안에 이런 변고를 만나는 일이 또한 혹 있을 것이니, 이 예(禮)는 반드시 자세히 고증하고 널리 증명을 해서 통행할 수 있는 확실한 문구를 얻은 다음에야 길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준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상세히 답장해 주십시오.
모든 초상(初喪)에 아들에게 폐질이 있으면 그 손자가 대신 상(喪)을 주장한다는 분명한 주자의 말씀이 있네. 그 말씀에서 이미,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하셨으니, 그것은 귀천을 통틀어 말씀한 것임을 볼 수 있네. 지금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기를 좋아하는 것은 대체 무슨 견해에서인가 모르겠네. 제주(題主) 한 조항에 이르러는 분명하게 증거할 만한 문구가 없는 까닭에 서울과 지방의 의논들이 아직도 여러 갈래이네. 그러나 큰 벼리가 이미 바루어졌으면 그 소소한 것의 서로 틀리는 부분은 후일을 기다려 귀일하게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네. 보내온 편지에 손자로 제주(題主)를 하는 것은 ‘차마 어버이를 돌아가신 것으로 간주하지 못한다.’는 뜻과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대신 상을 주장하는 것은 또한 차마 어버이를 죽었다고 할 수 있어서인가? 다만 체천(遞遷)하는 한 절차가 좀 방애될 듯하네. 그러나 주자가 늙어서 손자에게 전하고 사당에 고한 글을 의거하여 본다면 또한 그에 대한 변명이 될 듯도 하네.
대개 요사이 민씨 집안 얘기를 들으니 사람들의 논의가 서로 틀려서 옳다고 하는 사람은 극히 적고 그르다고 하는 사람들은 극히 많습니다. 이 같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춘옹(春翁 송준길을 가리킴)의 의견과 선생님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 데에서 초래한 것입니다. 며칠 전 현석(玄石)을 만나 그 말을 들으니 ‘춘옹의 의견이 처음에는 합치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선생의 의견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비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될 길이 있을 듯합니다. 이른바 합치되었다는 말은 모르겠습니다만 문자에 나타낸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언급된 것입니까?
민씨 집안 예(禮)는 이미 그르다는 사람이 많은 줄 아네. 동춘(同春)이 상가(喪家)에 답한 편지에도 주자의 설을 감히 그르다 한 것이 아니었네. 그 대의는 ‘당초에는 주자의 설을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 뒤에 생각하여 보니 막히는 곳이 많이 있었다……’ 하였고 나의 설을 보고는 급히 한 사람을 달려보내 그 답장을 되돌려 오려고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네. 대체로 다만 나의 말을 패려되지 않았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자기의 편지로 인하여 시끄럽게 될까 염려하더니 오늘날에 과연 이렇게 되었으니 ‘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한 말과 꼭 같네.
내가 문을 닫고 들어앉아 일체 내객(來客)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비록 편지로 물어 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한결같이 알지 못한다고만 대답하였네. 그런데 이제 자네가 편지를 보내 물어 오자 갑자기 파계(破戒)하고 말았으니 정력(定力)이 없음을 자조(自嘲)하는 바이네.
무릇 초상에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아버지가 주상(主喪)이 됩니다. 다만 아들과 며느리의 상(喪)뿐이 아니고 손자며 손부(孫婦)의 상까지라도 모두 당연히 주상이 됩니다. 만일 손자의 상에 그 아버지가 주상이 되고 할아버지가 주상을 하지 못했다면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 부묘(祔廟 신주를 사당에 올리는 것) 때 누구로 주상을 삼고 어느 자리에 합부(合祔)하여야 합니까?
예(禮)에 근거한다면 그 할아버지가 당연히 주상이 되어야 하고 그 할아버지 자리에 합부하여야 하니 이른바 ‘중일이부(中一而祔)’라는 것이네. 주(周) 나라 때에는 귀한 사람을 귀하게 여겼으므로 대부는 서자(庶子 맏아들이 아닌 아들들)의 주상이 되지 않았었네. 그런 때문에 서자들은 각기 자기 아들들의 주상이 되었네. 그러나 후세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장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이 모두 그 아버지가 주상을 하는 것이네.
《중용(中庸)》의 예악 형정(禮樂刑政) 주(註)에 대하여.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이,
“본 장구에서 말한 계구(戒懼)ㆍ신독(愼獨)ㆍ치중화(致中和)와 같이 아주 가까운 훈(訓)을 놓아두고 멀리 예악 형정(禮樂刑政)을 들어 교(敎)라 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의심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는데,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예악 형정은 성인이 가르침을 베푸는 기구이며, 계신 공구는 군자가 가르침을 행하는 일이네. 두 가지는 각기 다른 것인데 하나로 합쳐서 보았기 때문에 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서로 병통이 된 것이네.
계곡(溪谷)이 말하기를,
“잡으면 간직되고 놓으면 없어지며 드나듦이 때가 없어서 그 향하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은 오직 마음이라고 한 것은 공자의 말씀인데 그것을 맹자가 인용하여 마음을 논한 것이다. 범순부(范淳夫 범조우(范祖禹))의 딸이 이 장구(章句)를 읽고서 ‘맹자는 마음을 알지 못했구나. 마음이 어떻게 드나듦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천(伊川) 선생은 그 말을 듣고 ‘이 여자가 맹자는 알지 못하였으나 마음은 능히 알았다.’ 하였고, 주자는 ‘순부의 딸이 마음은 알았으나 맹자는 몰랐다. 이 여자가 그때에 참으로 고생이 없었던 까닭에 드나듦이 없다고 말하였고 남들에게 출입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병 없는 사람이 남의 아픈 사정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러한 설들을 읽고서 속으로 이천의 말이 정밀하게 꿰뚫고 적실(的實)함에 탄복하였으나 주자설에는 능히 의심이 없지 못하였다. 또 자기에게 고생이 없다 하여 남들이 출입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생이지지(生而知之)하고 안이행지(安而行之)하는 성인이 끝내 인심(人心)과 물태(物態)의 진실과 거짓을 두루 알릴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계곡이 주자의 설에 의심을 품은 것은 아마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정밀히 살피지 않아서라 여겨집니다. 범씨의 딸이 맹자를 알지 못한 것은 사람에게는 붙잡고 놓는 방법이 있음을 알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인데 주자의 의논이 명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말씀은 단지 범씨의 딸이 고생이 없어 남들에게 잡고 놓음에 따라 드나듦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를 이끌어 성인의 생이지지와 안이행지까지 미뤄 나갈 수 있겠습니까.
성인의 생이지지와 안이행지도 어찌 한갓 고생이 없을 뿐만이겠습니까. 정밀히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서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은 사람이 오직 성인이고 보면 인심과 물태의 진실과 거짓은 참으로 성인의 밝히 살피는 명감(明鑑)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한 부녀의 고생이 없는 것을 가지고 성인의 극공(極功)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는 진체(眞體)와 실용(實用)이 있는데 체(體)는 거울의 밝음과 같고 용(用)은 능히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니 여기에 어떻게 일찍이 드나듦이 있겠는가. 이는 이천과 범씨의 딸이 동정(動靜)으로 마음을 논한 것이네. 그리고 드나듦[出入]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주자가 선도 있고 악도 있다.’ 한 것인데 바야흐로 놓았을 때는 이 마음이 홀연히 사방 만리 밖에 있게 되니 어떻게 나갔다[出]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미 나갔다고 말하였다면 붙잡아서 가슴속에 있게 한 것을 어찌 들어왔다[入]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공자ㆍ맹자ㆍ주자가 붙잡고 놓는 것으로 마음을 논한 말이네. 두 가지가 각기 지향한 바가 있는데 지금은 두 가지를 합하여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말은 더욱 많아지고 뜻은 더욱 어두워진 것이네.
자네가 논한 계곡의 생이지지니 안이행지니 하는 설은 생각건대 계곡이 말한 본의를 살피지 못하고 성급하게 공격을 가한 듯하네. 계곡은,
“성인의 마음에는 인정(人情)과 물태(物態)에 부정(不正)한 것이 있지 아니한데도 인정과 물태를 알았으니 어찌 범씨의 딸이 자기에게 고생이 없었다고 하여 남에게 고생이 있음을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네. 그 뜻은 이런 것에 불과하며 범씨의 딸이 또한 생이지지며 안이행지를 성인처럼 했다는 말은 아니었네.
[주-D001] 여강증어(驪江贈語) :
이기홍(李箕洪)이 송시열에게 지어 준 시. 《직재집(直齋集)》 권1 시(詩)에 ‘벽사배우암선생 …… 증선생운(甓寺陪尤菴先生 …… 贈先生韻)’이란 제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가 있는데 이를 가리킨 듯함. 벽사는 여주의 신륵사(神勒寺)를 가리킴.
[주-D002] 별지 :
이 별지는 민씨 집안의 주상(主喪)에 대한 변법에 대해 그 전말을 문답하고 있다. 당시에 교관(敎官)을 지낸 민업(閔業)이 죽자 그의 아들 세익(世益)이 미친병 때문에 집상(執喪)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집안에서 집상을 그 손자에게 대신 시켜도 되는지를 박세채(朴世采)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 등에게 물어 왔다. 그러자 송시열과 박세채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있는 걸토론상복차자(乞討論喪服箚子)의 뜻에 따라 손자인 민신(閔愼)이 아버지 세익을 대신하여 승중복(承重服)을 입어야 할 것이라고 편지하였고 송준길은 그와 다른 의견을 말하였다가 다시 송시열의 뜻에 기울어졌다. 그래서 민신이 승중복을 입었는데 김우명(金佑明)이 이에 반대하여, 설사 약간의 정신병이 있다 해도 살아 계신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한다는 것은 경전의 ‘차마 돌아가신 아버지일망정 죽었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뜻과 어긋나며 신주를 쓰는[題主] 데에도 세익이 집상을 한다면 ‘현고(顯考)……’라 할 것이나 민신이 집상하게 되면 ‘현조고(顯祖考)……’라 하여야 하며 또 신주 한 쪽에 집상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는 것[傍題]도 세익이 아니고 신이어야 하니 그렇게 되면 신에게 5대조는 사당에서 당연히 체천(遞遷)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모두 예에 어긋난다고 소를 올렸다. 이 일로 인해 박세채는 삭거사판(削去仕版)의 벌을 받기도 하였다. 《燃藜室記述 閔愼代父服斬》
[주-D003] 체천(遞遷)하는 …… 글 :
체천은 종손(宗孫) 집 사당에서 봉사(奉祀)하는 대수(代數)가 다 되었을 때 대수가 아직 끝나지 않은 손자의 집으로 신주(神主)를 옮겨 감을 말함. 예를 들면 종손이 5대손이라면 5대조는 친함이 다 되어[親盡] 사당에서 나가야 하므로 그 할아버지와 유친(有親)한 3대손이나 4대손의 집으로 신주를 옮겨 모심을 말함. 주희(朱熹)가 늙어서 손자에게 전하고 고한 글은 《주자대전(朱子大全)》 치사고가묘문(致仕告家廟文)에 아직 어린 손자에게 제사 받드는 일을 넘겨주고 두 아들에게 잘 받들 것을 당부하였다고 사당에 고한 글을 말함.
[주-D004] 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 :
이 문정은 송 진종(宋眞宗) 때 정승인 이항(李沆)을 말함. 문정은 그의 시호. 이항이 정승이 되어 날마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수재(水災)와 도적의 피해를 세세히 아뢰자 당시 참정사(參政事)이던 왕단(王旦)이 의아하여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이항은 “나이 어린 폐하가 지금 세상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면 나중에 여색에 빠지지 않으면 반드시 토목(土木) 공사를 벌일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왕단은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후일 진종이 과연 이항의 말처럼 되어 버리자 왕단은 이 말로 이항의 선견지명을 탄식한 것이다. 선견지명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宋史 卷282 李沆列傳》
[주-D005] 정력(定力) :
불가(佛家)의 말.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양(修養)된 힘.
[주-D006] 중일이부(中一而祔) :
사당에 신주(神主)를 합부할 때 소목(昭穆) 법에 의거하여 손자는 아버지 한 대를 건너뛰어 할아버지에게 합부하는 법을 이름. 할아버지가 생존했으면 증조의 자리를 건너뛰어 고조의 자리로 합부됨. 곧 가운데 한 자리를 거름을 이름.
[주-D007] 중용(中庸)의 …… 주(註) :
《중용장구》 제1장 솔성지위교(率性之謂敎)의 교(敎) 자 주석을 말함. 주희가 교(敎) 자 주에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품절(品節)하여 천하의 법으로 삼은 것을 일러 교(敎)라 하니 예악과 형정 따위가 그것이다.”고 한 데 대해 장유는 제1장 중의 원문에 있는 “계신 공구(戒愼恐懼)하여 중화(中和)를 이룩한다.”는 것으로 교(敎) 자를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음.
ⓒ 한국고전번역원 | 김재열 (역)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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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九十 / 書 / 答李汝九乙卯八月三十日
○ 6월, 長鬐에 圍籬安置되다.
與汝九別已久矣。非惟思想之切。而耳中絶不聞談道辨理之言。此尤引領向風而不已者也。玆於石室便。得奉前月晦日書。備悉示諭之意。慰幸非虛語也。前一書。得於南爲之後。仍有韻語。諷詠屢回。不覺淸風生吻也。此中辛楚之狀。固非一端。然以朱子所受師門旨訣言之。則古人至不堪者。必有倍蓰於此者矣。此眞得力之良法也。爲學圖得之幸甚。第略有未契處。猥有所論。幸於的便。復以見牖。則雖犯時諱。當附小說於其下。以不孤見屬之意也。尊王父大監燕申增祐否。每念見愛之厚。此身常如趨履也。
別紙
栗谷先生爲學之方圖
此呈爲學方圖。乃栗谷先生手畫者。而但無論說於其下。此可恨已。不審先生曾已得覽否。此圖有益於後學。誠非淺少。伏乞先生爲著一段文字於圖後。以發揮栗翁之意。而親寫遠惠。則箕疇雖不敏。敢不銘心鏤骨。以爲終身受用之a111_190b地耶。千萬懇祝之至。
此圖綱領。實聖學之大門戶。第其條目。分屬於愚意。略有未安者。蓋體認體驗。雖於講學。不至全不相干。而終不如屬之省察者之尤爲的當。至於廢興存亡之看破。則專是講學事。而今皆互換。未知其意。且虛心平氣熟讀精思。是非得失廢興存亡。當屬事物看。靜坐潛玩體認體驗。公私邪正危微操舍。當屬身心看。而今此分屬界畫。無甚井井。更考原本而見示如何。愚見如不是。幷望斤正以敎也。
송자대전 제90권 / 서(書) / 이여구(李汝九)에게 답함 - 을묘년(1675) 8월 30일
여구와 헤어진 지가 너무도 오래되어 그리움만 간절할 뿐이 아니라 귓가에 도(道)를 담론하고 이치를 변증하는 자네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니 이것이 더욱 목을 빼고 자네의 풍도를 향하여 마지못하게 하는 점이네. 이러던 차에 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 인편에 지난달 그믐날에 부친 편지를 받고 자네가 깨우쳐 준 뜻을 모두 잘 알았네. 위로와 다행이란 말이 결코 허튼 말이 아니네.
저번에 보낸 편지는 남쪽 유배지에 도착한 뒤에 보았네. 운어(韻語)가 있어 여러 번 반복하여 읊조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청신한 바람이 일었네.
이곳의 괴로운 귀양살이 형상은 참으로 한두 가지가 아니네. 그러나 주자가 받은 사문(師門)의 지결(旨訣)로 말한다면 ‘옛사람이 견디지 못할 환경에 이르렀던 것은 반드시 이것보다 몇 갑절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참으로 힘을 얻는 좋은 방법이었네.
위학도(爲學圖)를 받아 보니 매우 고맙네. 다만 조금 맞지 않은 곳이 있어 외람되이 논한 데가 있으니 바라건대 적당한 인편에 다시 편지를 보내어 깨우쳐 준다면 비록 시속의 금기를 범한다손 치더라도 나의 작은 견해를 도(圖) 아래 붙여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네. 존왕부(尊王父) 대감께선 요즘 기거가 어떠하신가? 늘 사랑해 주시던 후의를 생각하노라면 이 몸이 마치 항상 그 앞에 서있는 듯하네.
별지
삽화 새창열기
여기에 올리는 위학방도(爲學方圖)는 율곡 선생이 손수 그리신 것입니다. 다만 그 아래 논의하신 말씀이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혹시 선생께서도 보신 적이 있는지요? 이 도(圖)가 후학에게 유익함이 참으로 많습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 일단의 글을 도(圖) 아래 기록하여 율옹(栗翁)의 뜻을 발휘하시고 친히 베껴 보내 주신다면, 기주(箕疇 이기홍(李箕洪))가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오나 감히 마음에 다짐하고 뼈에 새겨 종신토록 수용하는 바탕으로 삼겠습니다. 천만번 간절히 비옵니다.
이 도표의 강령은 참으로 성학(聖學)의 큰 문호이나 그 분속(分屬)한 조목에는 나의 뜻에 약간 적당치 않은 것이 있네. 대체로 체인체험(體認體驗)이 비록 강학(講學)과 전혀 서로 상관되지 않을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으나 성찰(省察)에 소속되는 것만큼 아주 적당하지는 못하고, 폐흥존망(廢興存亡)을 간파(看破)하는 데 이르러는 이는 오로지 강학의 일인데 여기에서 모두 서로 바꾸어 배속시켰으니 그 뜻을 알지 못하겠네.
또 허심평기(虛心平氣)ㆍ숙독정사(熟讀精思)와 시비득실(是非得失)ㆍ폐흥존망(廢興存亡)은 당연히 사물간(事物看)에 소속시켜야 할 것이며, 정좌잠완(靜坐潛玩)ㆍ체인체험(體認體驗)과 공사사정(公私邪正)ㆍ위미조사(危微操舍)는 당연히 신심간(身心看)에 소속시켜야 할 것인데 이 도표에서는 나누어 소속시켰으니 한계를 지음이 그리 정연치 못하네. 다시 원본을 고찰하여 편지를 줌이 어떻겠는가. 나의 견해가 만일 옳지 않거든 아울러 근정(斤正)하여 가르쳐 주길 바라네.
[주-D001] 남쪽 유배지에 도착 :
1675년 1월에 송시열이 제2차 예송(禮訟)으로 함경도(咸鏡道)의 덕원(德源)에 유배되었다가 6월에 다시 장기(長鬐)로 위리안치되었음.
[주-D002] 운어(韻語) :
이기홍(李箕洪)이 보낸 시(詩)를 말함. 《직재집(直齋集)》의 시편(詩篇)에 이기홍이 덕원으로 유배 가는 스승인 송시열을 평구역(平邱驛)에서 작별하며 지은 ‘평구역배별우재선생(平邱驛拜別尤齋先生)’이란 칠언절구(七言絶句) 두 수가 있는데 이 시를 지적한 말인 듯하나 분명하지 않음.
ⓒ 한국고전번역원 | 김재열 (역) |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