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 시조가 신라말 동래했다는 설이나 안씨동원보류가 조선말에 조작해낸 것이라는 증명은 지극히 간단하다.
우리나라 안씨들이 신라말 807년 당(唐)나라에서 온 이원(李瑗)의 아들 3형제 안방준(安邦俊), 방걸(邦傑), 방협(邦俠)에 기원한다는 설은 1700년대 말부터 나돌기 시작한 것으로, 믿을만한 이전의 근거문헌이 없기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다른 성씨들의 시조(始祖) 동래설(東來說)을 모방하여 누군가가 지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안씨 시조 동래설(始祖 東來說)을 기록한 1900년 이전 문헌
이 설이 조작된 것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증거는 아들 3형제가 경문왕 때인 864년에 공을 세워 봉군 받았다는 군호가 당시 사정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군호는 문헌에 따라 순흥군(順興君), 광주군(廣州君), 광릉군(廣陵君), 죽산군(竹山君), 죽성군(竹城君), 죽주군(竹州君) 등 제각각이다. 당시 봉군제도가 있었느냐와는 별개로 이들 군호에 나타나는 지명은 모두 신라말 당시에는 없던 것이므로 봉군 받아서 죽산, 광주로 본관이 정해졌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다.
광주(廣州)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 생겼고, 죽주(竹州)는 고려초(940년), 죽산(竹山)은 조선 태종 13년(1413)에 처음 생긴 지명이다. 순흥(順興)의 지명도 고려말 충목왕 무자(戊子, 1348)년에 처음 생겼다. 광릉(廣陵)은 조선시대에 광주(廣州)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고, 광주(廣州) 이씨 이극배(李克培, 1422∼1495)가 광릉 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진 사례도 있으나, 정확히는 고려 성종(成宗, 960~997)이 정한 한양(漢陽)의 별호이다.
죽성(竹城)은 지명으로 쓰인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죽성군(竹城君)은 죽주(竹州) 또는 죽산(竹山)의 지명에서 파생되어 나온 군호로. 고려말 조선초에 죽산 안씨, 죽산 박씨 등 본관이 죽산(죽주)인 사람들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진 사례가 안극인(安克仁, ?~1383), 박포(朴苞, ?~1400), 안맹담(安孟聃, 1415∼1462) 등 몇 건 있다. 박지번(朴之蕃, 1426-1498)이 1468년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이어서 1489년 죽산군(竹山君)으로 개봉(改封)된 것을 보아도 죽성(竹城)은 죽산을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죽주 또는 죽산 지명이 생기기도 전인 신라말에 죽성군(竹城君)에 봉군되었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광주(廣州)와 죽산(竹山) 및 순흥(順興) 지명 연혁
낭설을 기록하다 보니 이원의 아들 3형제가 봉군받았다는 군호도 중구난방이고 일정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군호를 한결같이 신라말 864년 당시에는 있지도 않던 후대에 생겨난 지명에서 따왔다는 것도 이 설이 조작된 것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안씨 시조동래설이 사실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많다.
본관은 신라시대 아닌 고려 시대에 정해진 것이며, 주로 고려 중기 이전의 선조들이 살던 지역에 따라 정해졌다. 807년 동래한 이원의 아들 3형제가 864년에 봉군받아 죽산, 광주의 본관이 신라시대에 정해졌다는 말 자체가 넌센스이다. 더구나 안방준의 묘가 개성 곡령에 있다면 안방준은 죽산에 살지도 않았으니 본관이 죽산인 안씨들의 시조가 될 수도 없다.
또 안방준의 두 아들 후손이라는 (구)죽산 두 파가 신라시대에 분파한 것이라면 본관 제도가 생기기 전에 분파한 것이니, 고려 시대에 들어와 같은 본관이 될 가능성도 사실상 없다. 신라 김씨는 모두 같은 조상이지만 고려 초중기의 거주 지역에 따라 여러 본관으로 나뉘어 진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봉군받아 본관이 정해졌다는 것도 조선 후기의 상투적인 주장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본관은 대개 1000~1200년 사이 조상들이 살던 거주 지역에 따라 정해진 것인데 비해, 고려사에 보면 봉군은 1300년 이후에나 이루어지므로 봉군에 의해 본관이 정해졌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고, 봉호(封號)가 본관을 따라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봉군받아 관향을 달리했다는 소위 봉군분관설이 족사 조작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신라시대에는 봉군제도도 본관 제도도 없었으므로 신라말 당시 있지도 않던 지명으로 봉군받아 본관이 정해졌다는 안씨 시조 동래설은 조선 말에 지어낸 것이다.
1031년 정도사(淨兜寺) 오층석탑조성 형지기(刑止記)에는 본관(本貫)이란 말이 오늘날과 달리 성이 없는 사람에게 단순히 출신지 정도의 의미로 쓰였다. 오늘날의 본관 개념은 이 때까지도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중국서 신라로 이민 온 사람들이 일부러 신라와 당의 해상 교통로로 부터 멀리 떨어지고, 수도 경주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인 송악(개성)으로 찾아가서 살았다는 것도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변방의 외진 곳에 사는 중국서 온 사람의 아들들이 엄격한 골품제가 시행되던 신라에서 장수가 되어 왜적을 물리쳤다는 주장도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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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안씨들을 하나의 계보로 묶은 안씨동원보는 조선말에 조작한 위보(僞譜)이다.
안씨시조 동래설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죽산안씨 후손들은 이들 시조라는 3형제와 연결되는 계보가 없다가 1848년에 처음 나타난다. 이후 1900년대 초에 몇 차례 더 나타나는데, 대부분 안윤채/안중력이라는 죽산보에도 나오지 않아 신원 미상인 인물들이 가져온 고려말 족보(?)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1848년 죽산안씨 복야공파 파보에 나오는 한눈에 봐도 엉터리인 계보를 좀더 실정에 맞고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가공한 것에 불과하다.
1848년 죽산안씨 복야공파 족보의 동국안씨사실(東國安氏事實) - 안씨동원보의 원형 안씨동원보(安氏同源譜) 출현 과정을 보여주는 문헌
안씨동원보 류의 출현으로 거의 모든 안씨들이 동래한 이원의 후손 계보로 묶어지지만, 신라말 고려초 선대들의 계보가 조선말에 느닷없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 고려말 족보라는 것들은 조선말에 조작해 낸 것일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반박 불가능한 증거들이 있다.
이런 계보들이 위보라는 것은 한눈에 봐도 드러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순흥안씨 안목(安牧, 1290∼1360)의 아들들 기록이다. 안목의 아들은 원래 안원숭(安元崇, 1309∼?) 한 사람 뿐이지만, 1800년 이후 신죽산 안씨 시조 안원형(安元衡)이 안목의 아들인데, 죽성군(竹城君)에 이봉되어 본관을 순흥에서 죽산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이어 1850년 경부터 탐진안씨 시조 안원린(安元璘)도 순흥 안목의 아들인데 탐진군(耽津君) 이봉으로 탐진안씨가 되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문제의 안씨동원보에는 이러한 조선말에 나온 설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기록마다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안원화(安元譁)라는 누군지 모르는 아들이 추가로 등장하기도 한다. [참고 : 풍기군(豊基君) 안원화(安元華) 기록] 이 사안이 각 기록에 나타나는 양상은 아래 표와 같다.
[동국안씨원파구보가 1776년(병신) 문헌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관련 인물 안윤채/안중력이 1900년대 초의 사람이므로 1896년(병신) 기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안명유(安命鰇) 친필과 비교하면 동국안씨원파구보는 후대에 추가된 것]
안씨동원보 류는 모두 고려말 족보에서 나온 것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위 표에 나온 안목의 아들들은 모두 고려말 당시 사람들로 후손도 벌어지기 전인데, 과연 죽성군, 탐진군으로 봉군 받았다고 해서 고려말에 본인 1명 또는 아들까지 3~4명이 따로 순흥에서 본관을 달리해서 분관(分貫)해 나오는 것이 가능했을까?
신죽산안씨와 탐진안씨가 순흥 분파인가 아닌가는 1800년 이후 계속 논란이 되어 왔지만, 1980년부터 이들 성씨들은 순흥안씨 족보에도 들어가고, 대종회에도 가입해 있다. 하지만 근래에 발견/발굴된 고려말과 조선초의 금석문에 의해 안목의 아들은 안원숭 한 사람 뿐인 것이 명백하게 확인되었으며, 안원형의 군호도 죽성군(竹城君) 아닌 광산군(光山君)으로 밝혀져, 죽성군에 이봉(移封)되어 순흥안씨에서 죽산안씨가 되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아래 두 자료를 참고하면 이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색(李穡) 찬, 김태현처 왕씨 묘지명(金台鉉妻 王氏 墓誌銘) : 사위 안목(安牧)의 아들은 안원숭(安元崇) 뿐이다. 순흥 안씨 병오보(1546년) 이래 전통적인 순흥 족보에 안목의 아들은 안원숭만 있었고, 이 묘지명으로 재차 확인됨. 1848년 죽산보의 "동국안씨사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글을 끌어와 고려말 족보 서문(麗末譜序)이라 조작하였다.
안복초(安復初, 1382-1457) 묘지명 : 증조부 안원형(安元衡)의 군호는 죽성군(竹城君) 아닌 광산군(光山君)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가 지은 것으로 삼탄집(三灘集)에 실려 있었으며, 실물 묘지명 출현으로 재차 확인됨.
유계(兪棨) 찬,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 행장(行狀) 유계(兪棨, 1607-1664)가 지은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 행장에 10대조 안원형(安元衡)의 선대가 순흥안씨가 아니라 (구)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파 시조 안영의(安令儀)의 증손 안전(安戩, ?∼1298)이라 함.
위와 같은 근래에 새로 발굴된 문헌들이 안씨 동원보는 고려말 족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죽산, 탐진안씨가 순흥분파라는 설이 처음 제기된 1800년 이후에 만들어진 조작된 족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고려말 족보에서 나왔다는 안씨동원보는 고려말 당시 계보조차 실제가 아닌 조선말에 나온 잘못된 주장을 따르고 있는 위보(僞譜)이므로, 거기에 나온 신라말 고려초 계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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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 시조 동래설 / 안씨동원보가 근거 없다는 것을 죽산안씨들이 증명하고 있다.
안씨 시조 동래설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출처를 모른다. 출처도 모르고, 원본 기록이 없다보니 각자 나돌아다니는 풍문을 듣고 제나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용도 가지각색, 중구난방이고 어느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죽산안씨 자신들도 1848년 족보에서는 1805년 족보 서문의 기록을 부정하고, 1976년 대동보에서는 이전 어느 문헌에서도 보이지 않는 당나라 원정 출병의 공로로 안씨 사성을 받았다는 생경한 주장을 내세우고, 1999년 대동보에서는 1976년 대동보 내용을 또 부정하고 새로운 설을 내세웠으며, 2011년에 와서는 당나라 종실설을 파기하여 1999년 대동보의 내용을 또 부정한다. 위에 예로 든 안씨동원보가 실린 7개 문헌도 고려말 족보에서 나왔다면서도 내용이 서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죽산안씨들은 족보를 낼 때마다 시조에 대한 기록이 달라져 왔다. 자신들도 무슨 기록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자신들도 뒤죽박죽인 기록더미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도 알 수 없어 오락가락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면서 광주안씨나 고성이씨 등 관계없는 다른 성씨들에게 무슨 족사를 가르쳐주겠다고 나서는가?
1200년 전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족보를 낼 때마다 새롭게 바뀌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어느 성씨나 시조는 오래 전의 분이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으니, 족보를 새로 간행하더라도 시조에 대해서는 첫 족보의 기록과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
뒤늦게 안씨동원보를 고증한다면서 찾아낸 수많은 서로 모순되는 기록들 중에 다음 죽산안씨 족보 간행에는 어느 것이 맞다고 택할지 판단이 서는가? 광주안씨 절첩보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죽산 을축보(1805) 서문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증정문헌비고(1809), 동국안씨 사실(1848), 순흥안씨 전의록(1957).....등등 서로 상충하는 기록들 중 어느 것이 맞으며,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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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죽산안씨 시조 안원형이 죽성군 봉군받아 순흥안씨에서 죽산안씨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것처럼, 죽산이나 광주안씨도 신라말 죽산군, 광주군으로 봉군받아 관향이 나뉘어 정해진 것이 아니다.
구죽산안씨 두 파도 동원이 맞다면 본관이 없던 신라말에 분파한 것이 아니라 본관이 정해지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1200년 이전에 분파한 것이다. 이 시기는 문헌의 부재로 지금에 와서 연결 계보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고려말에 분파한 신죽산 안씨는 구죽산안씨 복야공파와 연결 계보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유계(兪棨) 찬,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 행장(行狀) 유계(兪棨, 1607-1664)가 지은 위 안방준(安邦俊, 1573 ∼ 1654) 행장에 10대조 안원형(安元衡)의 선대가 순흥안씨가 아니라 (구)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파 시조 안영의(安令儀)의 증손 안전(安戩, ?∼1298)이라고 하였다.
위 행장이 사실이라면 신죽산안씨 시조 안원형은 연대로 보아 안전의 손자 쯤 될 수 있으며, 죽산안씨 복야공파 족보에 나와 있는 안전의 세 아들 중 한 사람이 부친일 가능성이 높고, 조부가 될 가능성도 조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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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새로운 근거 기록의 발견도 없이 신라시대 일이 조선말에 처음 알려질 수 있는 방법은 지어내는 것 밖에 없다. 안씨시조 동래설이나 안씨동원보도 그런 류이다. 이런 것은 에써 고증할 필요도 없이 조작이다. 안정복(安鼎福)의 변무(辨誣, 1790) : 안씨 시조가 동래했다는 설은 맹랑하고 근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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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동원보는 신라말, 고려초의 조상들 3대가 연속으로 고려 후기 관직인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고 주장한다. 신라말 고려 초에 양자를 주고받았다는 것도 시대를 수백년 앞서가는 일이다. 아들이 없는 사람이 친족 조카들 중에 양자를 들이는 풍습은 조선시대 1500년 전후부터 시작되었다. 1475년 간행 안동권씨 성화보에는 양자를 입양한 기록이 단 하나도 없다. 안씨동원보가 나오기 이전 죽산안씨 족보에도 고려~조선 초 기록에 양자을 입양한 경우는 한 건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성씨 족보들도 마찬가지이다. 신라말 조상이 중서령(中書令)과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는 것은 안씨동원보가 조작인 증거 신라말 고려초에 계자(系子) 입양과 항렬 맞춘 작명이 가능한가? 조선말에 신라시대 조상의 일을 새로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안씨동원보와 고려 왕실 세계(高麗世系) 비교 옆집 왕륭(王隆)이 송악군을 궁예에게 바칠 때 판도판서께서는 뭘 하셨나?
변무(辨誣)와 관계없이 안씨동원보는 조선말에 조작한 위보(僞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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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이나 안방준 및 안씨동원보 계보는 1900년 이전 그 어느 종합보에도 나오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