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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을 가르치신 예수님
2023년 5월 28일 / 막 9:30-37
막 9:30-37(새번역) /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동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마 11:25-27, 요 16:12-13, 요 17:17).
그래서 앞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그들이 알고 있거나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들을 세우시면서 가르치셨다. 마치 예수님께서 진행해 나가신 일들이 그렇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태복음 14:22-36 앞뒤를 보면 그렇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이 전도 여행 중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고 전도여행의 피로를 풀고자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도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서 휴식을 취하지 못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고치시고 먹이시는 이적을 행하셨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고 그동안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막 6:30).
그후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드리려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밤이 되자 바람이 일고 물결이 사납게 밀어닥쳐 제자들은 바다 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새벽 네 시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 유령이 걸어오는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들에게 말을 건네 안심을 시키셨다. `나다. 무서워하지 말라.'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정말 주님이시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걸어오너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예수님을 향해 물 위를 걸어갔다. 그러나 물결이 높이 이는 것을 보고 무서움을 느끼는 순간 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베드로는 ‘살려 주십시오, 주님!’ 하고 소리쳤다(마 14:22-30).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의 일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해 보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과 귀신을 쫓아내며 자신들의 능력을 시험하고 또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예수님께 보고를 마친 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부러움과 자신들의 특별함에 교만이 가득해졌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고 무리를 보내실 때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나 칭찬을 받음으로 교만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내신 것 같다. 교만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시려고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게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연약함과 믿음이 부족함을 알게 하시려고 바다에 바람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이시며 그들의 나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그래서 베드로가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요청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자신도 물 위를 걷을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오라’고 명하시자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런데 주변에 부는 바람과 파도를 보고 다시 두려움이 휩싸여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베드로가 소리질러 구원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느끼게 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전도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게 된 것이 자신들이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낸 능력이 마치 자신들의 능력인 것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이 또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 더욱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게 하시고 제자들이 자신들의 가장 잘 아는 바다에서조차 그 능력이 초라하고 연약하며 두려움에 떠는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아니었나 생각을 하게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마태복음 17:14-21(막 9:14-29, 눅 9:37-43)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자기들의 힘으로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으로 간구했다. 그래서 비록 아버지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 했지만 태산과 같은 문제를 해결 받았다. 이렇듯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할 것을 가르치셨다.
곧이어 예수님은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 이제부터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겸손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약 4:6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악한 욕망에 대항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힘을 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물리치십니다(잠 3:34).
■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 / 신학자 풀리쳐에게 한 신학생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풀리쳐 박사는 조용히 대답했다. "자네가 유능한 전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한 가지를 잊지 말게나! 그것은 ‘영국에서 내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자세를 갖춘다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네를 통해 일하실 것이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쁘게 사용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하나님께서 유능한 사람이나 실력 있는 사람의 능력 때문에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 앞에 순종하고 겸손함을 겸비할 때였음을 잊지 말자!
1. 겸손의 본이신 예수님(30-3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말씀으로 겸손을 가르치셨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겸손을 실천해 보이셨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 자체가 바로 겸손의 실례였다는 사실이다.
마 12:15-21 / [하나님이 택하신 종] 예수께서는 그들의 계획을 알고 회당을 떠나셨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쳐 주시고 자신이 16) 이적을 베풀었다는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17) 이것은 그분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18) `보라, 나의 종, 내가 택한 자, 그는 내가 사랑하는 자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부어 주리니 그가 나라들을 심판하리라. (사 42:1-3)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잘난 체하지도 않으며 길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가 없으리라. 20) 그는 약한 자를 짓누르지 않으며 가장 작은 자의 희망도 억누르지 않으리라. 그는 모든 싸움을 마지막 승리로 끌어가리니 21) 그의 이름이 온 세계의 희망이 되리라.'
막 9:30 /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일행이 그 지역을 떠나 갈릴리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을 가르칠 시간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였다.)
짧은 여정 속에 많은 일들을 하신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다.
막 9:310-31 / 일행이 그 지역을 떠나 갈릴리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을 가르칠 시간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였다. 31) 예수께서는 `인자는 배신당하여 죽었다가 사흘 만에야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전하시고자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신 이유는 먼저 제자들을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9,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들이 여러 가지로 나온다. 믿음에 대하여 가르치고,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 곧이어 관용 또한 화목을 가르치셨고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가르치셨다. 또 어린아이들을 들어서 구원에 대해, 부자 청년 관리를 들어서 영생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리고 은혜를 가르치시고, 자신이 당하실 일과 영광의 길을 가르치시고, 섬김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그런 후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번 더 믿음을 가르치셨다. 이렇듯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치심을 베푸셨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살아갈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신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의 행선지는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셔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시는 곳이 예루살렘이며, 부활하실 곳도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바로 예수님의 목적지였다. 갈릴리는 그저 잠시 거쳐서 지나가는 곳에 불과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몰려드는 갈릴리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을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셔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제자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막 9:32 /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뿐더러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셔서, 죽임을 당하시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마태복음 17:23 말씀처럼 제자들은 매우 근심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대략 예수님의 말뜻은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깨닫지를 못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지만, 그들은 이제 곧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며, 세세토록 영광 가운데서 이스라엘 나라를 통치하시리라 여겼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일까? 또한, 어찌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일까? 그 당시로써 제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한 것을 예수님에게 묻기도 두려워했다. 베드로처럼 야단맞기가 싫었을 것 같다. 또한,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일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더 이상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그들로 깨닫지 못하도록 숨긴 바 되게 하셨다(눅 9:45). 예수님은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들에 대하여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물론 후일에는 깨닫게 되겠지만 …. 그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런데도 막상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그러니 만일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제자들은 더욱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대속의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후일에는 예수님의 삶 자체가 바로 겸손의 극치였음도 깨달았다. 아마도 이를 가장 잘 설명한 곳이 빌립보서 2장일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빌 2:3).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빌 2:5).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높은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빌 2:8).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다 받으셨다. 그러니 누가 예수님보다 더 낮아질 수가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까지 자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겸손의 극치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제자들은 겸손의 본이신 예수님과는 너무나도 딴판이었다. 교만 덩어리라 볼 정도이지만 사실은 그들은 우리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럴지라도 누구든지 누룩과 같이 작은 교만이라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깜짝할 사이에 전체를 악으로 물들일 수가 있으면 마음 전체에 퍼져 화(禍) 덩어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교만에 사로잡힌 제자들(33-34절)
막 9:33 / [마 18:1-5, 눅 9:46-48] 일행은 가버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집안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길에서 무엇을 가지고 논쟁하였느냐?'
예수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물으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토론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아시고, 그들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질문하신 것이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가버나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따라서 분명 그들은 오랫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이 토론했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막 9:34 / 제자들은 그때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것으로 말다툼하였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우선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잠잠했다.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 모두는 부끄러운 듯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당하실 고난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안중에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얻을 영광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에서 서로 자기가 더 크다고 다투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받는 것을 좋아했다(마 23:6-7). 제자들마저 교만이 문제였다면 우리 자신들은 어떠할는지 … ?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이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을까? 이미 살펴본 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만 생각하여 자기들도 덩달아 영광을 누릴 줄로 착각했다. 그때 과연 누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더 큰 영광을 얻을 것인가?
먼저 수제자인 베드로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하여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지만 큰 책망을 받기까지 했다. 따라서 베드로를 제외한다면,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유력한 후보가 야고보와 요한이었을 것이다. 그들 세 사람만이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0:20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와 함께 와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구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은 그 두 형제를 분히 여겼다. 그들도 어머니가 가까이 있었으면, 함께 예수님께 와서 호소했을는지 모른다. 예수님이 갈릴리 각 촌으로 그들을 짝지어 파송하셨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더 큰 권능을 행했다고 자랑도 했다. 겉으로 표출(表出)을 못했다면 마음으로는 큰 자부심에 휩싸였을 것이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은 헛된 교만에 사로잡혀, 서로 자기가 크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교만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까지도 계속되었다. 남들이 알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아무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몸소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셨다. 그런 후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라고 말씀하셨다. 겸손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다. 겸손해야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가 될 수가 있다. 반대로 교만하면 사랑할 수 없다. 누구든지 교만하면 서로 다툰다. 교만하면 불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교만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가 없다.
3. 제자들을 가르치신 예수님(35-37절)
막 9:35 /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셨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이 교만에 사로잡혀서, 서로 자기가 크다고 다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끝부분을 ‘되어야 하리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주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다. 제자들은 첫째가 되겠다고 서로 다투었다. 그들의 교만 때문에, 그들은 불화하며 하나 되지 못했다. 그러니 이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들의 원대로 첫째 되는 비결을 가르치신다는 것은 문맥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원문은 ‘되어야 하리라’가 아니라 ‘되리라’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밝히신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오히려 그 사람은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만다는 말씀이다.
누가복음 14:11에서 예수님은 같은 내용으로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높이면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를 높였던 바리새인은 낮아지고, 자기를 내려놓은 세리는 높아졌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4).
그렇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잠 16:18). 교만이 있으면, 반드시 패망이 따라온다. 거만한 마음이 있으면, 넘어짐이 뒤를 따른다. 욕심이 넘치면 가난이 뒤따라 온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만의 결과를 밝히신 것이다.
막 9:36-37 / 그리고 그들 앞에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팔에 안으시며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또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교만을 책망하신 후, 그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친히 안아주시며 그들 가운데 세우셨다. 어린아이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 당시 어린아이는 사람의 수에도 들지 못할 만큼 무시당하던 존재였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말씀으로 표현하면 어린아이는 말 그대로 뭇 사람의 끝이다. 그래서인지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마 25:40).
사랑하는 여러분! 빌립보서 2:8-9 말씀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이제부터라도 겸손하게 살아가자. 베드로전서 5:6 말씀처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결 론
■ 영국의 간호사이었던 나이팅게일은 1853년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가 부상병을 간호하고 1만 3천명의 호열자 환자를 치료함으로 군인들로부터는 싸움터의 천사로, 또는 광명 부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도 참혹했던 크리미아 전쟁이 영국과 터키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오고, 러시아의 패전으로 끝이 나게 되자 나이팅게일이 영국으로 귀국하려 했을 때에 영국 국민들은 그녀를 전쟁의 영웅보다도 더 존귀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환영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영국으로 귀국하려던 예정을 바꾸고 1856년 8월 15일 아무도 모르게 프랑스로 갔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영국 국민들은 한때 크게 실망하였으나 나이팅게일의 겸손한 태도를 알고 더욱 그녀를 존중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권력이나 교만으로써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과 생활 태도로만 얻을 수 있다. 유대교의 경전인 탈무드를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계시하실 때에 높은 산이나 큰 나무들 중에 거하지 않으시고 볼품없는 가시덤불 속에서 말씀하신 것은 교만한 자보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 중에 거하시기를 즐겨하시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
복음성가로 결론을 맺는다.
● 1.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후렴>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2. 당신의 그 순종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사랑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찬송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3.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1. 슬픔속에서도 울지 않는 것 억울해서 울지 않는 것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도 걱정하지 않는 것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사랑하며 품어주는 것 용서 할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용서하여 주는 것
어떠한 자기 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2. 참을 수 없어도 화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조건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것
칭찬이나 비난 가운데서도 침묵하며 살아가는 것 말씀 순종하기 어려울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
어떠한 자기 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 줌이 진정한 겸손
겸손은 겉사람이 드러나지 않고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
어떠한 자기 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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