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만
육회’ 모임의 장소를 제공한 순교자
?~1802, 세례명 안토니오, 서소문 밖에서 참수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은 남양 홍씨 명문가의 서자로. 본디 유학에 종사하던 선비였다. 그는 홍교만의 사촌 서(庶)동생이며, 홍교만의 아들 홍인의 5촌 서당숙이다. 홍익만의 아버지는 홍첨(洪瞻)이고, 권철신의 어머니가 그의 고모이다. 그 때문인지 홍익만은 권철신이 살던 양근에서 태어나 살다가 1791년경 서울 송현(松峴)으로 이사 와. 은언군의 부인 송 마리아와 며 느리 신 마리아가 사는 폐궁의 후문쪽에 살았다.
권철신의 어머니가 그의 고모인 점을 감안할 때, 아버지 첨이 누나 집에 왔다가 양근에서 첩을 얻어 홍익만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홍익만은 권철신, 권일신과 고종 사촌 간이었고. 아마도 이들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홍익만은 “1785년 김범우의 집에《천주실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 가서 빌려다 보았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孔)의 도와 크게 달라 깊이 빠져들지 않다가, 1794년 이승훈에게서《진도자증》(眞道自證)을 빌려 보고 진리가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뜻이 심오하여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고 진술하였다.
그가 이미 죽은 김범우에게서《천주실의》를 빌려 보았다고 진술한 것은 권철신 혹은 권일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비록 서자이기는 하나 양반가의 아들이었고, 문장과 학식이 뛰어난 선비였다. 그는 당시 정승 채제공(蔡濟恭)의 서손자의 글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는데, 이것이 채제공이 죽은 뒤 탄핵당할 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교의 구심점이 되다.
홍익만은 입교 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등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교리를 토론하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796년 그의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소개받았다, 그때 주문모 신부를 처음 만난 홍익만은. 그 후 밤낮으로 자주 만나 강론을 들으며 친밀하게 지냈고 보례(補禮)도 받았다.
그는 두 딸 중 하나는 강완숙의 아들 홍 필주에게 하나는 이현에게 시집 보냈는데, 이것은 신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상 제사 금지 문제에서는 약간 소극적이었다.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것이 천주교의 큰 뜻이었지만, 가족들의 만류와 반대로 실천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교회 활동은 누구 못지않게 활발하였다. 즉 이승훈, 황사영, 김범우, 정약종, 손인원, 최해두, 정광수 등 당시 대표적인 교회 지도층과 교류함은 물론. 자신도 명도회의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가운데 한 곳이 바로 홍익만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 김건순과도 남다른 사이였다. 김건순은 청음 김상헌의 봉사손으로 문장과 재주가 뛰어난 노론의 대가였는데,이 사람을 입교시킨다는 것은 당시 교회로서는 큰 수확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편지를 써서 정광수에게 주며 김건순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편지를 받고 정광수와 함께 서울로 올라온 김건순은, 1797년 가을 강완숙의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나 밤이 깊도록 교리를 강론하였다.
그 뒤 1799년 5월에 홍익만이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가지고 여주에 살던 김건순을 찾아갔고, 그 해 홍익만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와 김건순이 다시 만났다. 황사영〈백서〉의 서명인으로 유명한 황심도 홍익만의 집에서 황사영과 처음으로 만났는데, 이렇게 보면 당시 그의 집은 공소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그때 선교의 구심점은 그의 집과 강완숙, 정광수 황사영의 집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익만은 1월 초 황사영을 찾아가 박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황사영이 “나라에서 비록 천주교를 엄히 금하나, 그것은 임금님의 처분이 아니라 모두 아랫사람들이 명령을 내려 시행하는 것이므로 별로 염려할 것이 없다.
아니면 우리는 마땅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 겁이 난 홍익만은 안산에 사는 사촌 매부 윤진의 집으로 내려가 4〜5일 동안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그곳도 불안하여 다시 여주의 삼촌 집으로 피하였고, 이후 이천에 사는 친구 권달성의 집으로 가서 몇 달 동안 숨어 지내는 등 피신 생활을 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12월 26일(양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그가 순교한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내도 처형되었으나 그 날짜는 알 수 없다.
▲ 서소문밖 순교성지 후기(현재) 순교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