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9일 목요일 하늘언어교회
본문: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설교: ‘예수님과 오목두기’ 조영찬 전도사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기독교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사고의 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믿음과 하늘사람들의 믿음은 무엇이 다를까요?
세상의 노래나 문학작품을 보면 하나님과 관련된 신학적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애국가에 보면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조율’이라는 노래에는 ‘하늘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세상 노래에 하나님이 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종의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들이 어떤 하나님인지에 대한 설명이나 근거가 없어서 모호하고 무속적인 신앙에서 부르는 하나님일 것으로 막연히 추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연하면서도 천지를 주관하는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유대인의 하나님은 모호함을 제거한 명확한 유신론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하나님 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사람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과 하늘사람의 하느님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질문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지 기존에 믿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 강화하라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발생하게 됩니다.
세상사람의 하느님과 유대인의 하나님은 너무 높고 위대하고 한없이 멀어서 사람과는 도저히 소통이나 상종을 할 수 없는 존재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한없이 거룩하셔서 모세와 같이 특별한 선지자 외에는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높이만 있을 뿐 낮음이 없습니다. 인간과 철저한 구별만 있을 뿐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철저히 강하기만 하실 뿐 약함을 생각할 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 이미지는 아주 충격적인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 오신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먹고 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 버림받아서 죽임을 당했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상은 세상의 하나님관이나 유대인의 하나님관에 비하면 심각한 신성모독으로 보일 정도로 위험천만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주장하는 예수님을 놓아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큰 죄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전해주신 하나님께 매료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그 누가 전해준 하나님보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늘사람들의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하나님은 도대체 뭐가 다른가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하나님은 세상의 하나님이나 구약의 하나님을 모두 포괄합니다. 동시에 그들이 부정하는 낮음, 죽음, 약함, 희생, 우리와 함께하심 등을 통해 하나님관의 신지평을 무한대로 확장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하늘 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땅 밑바닥까지 내려오셔서 온 세상을 품는 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분이 죽음의 영역까지 내려가셔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전에는 그분보다 높아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제는 그분보다 낮아질 사람도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적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해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고승을 만나거나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나 제사장이나 성직자를 만나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하나님은 낮은 데로 오셨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들을 만나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을 만나려면 죄인들을 만나야 하고 가난한 이들을 만나야 합니다. 세리들과도 가까이 지내야 하고 창녀들과도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병자들을 찾아가야 하고 장애인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약자를 구제해야 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은 곧 하나님께 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위로만 올라가려 하고 아래로 내려갈 줄을 모릅니다. 매주마다 성직자를 찾아가면서도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 있는 교회당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찾아가면서도 가까이 있는 소외된 이웃에게는 한번도 찾아가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멀리 있는 대형교회에는 반드시 출석하지만 가까이 있는 작은교회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멀리 있는 성직자를 찾아가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 우리는 우선 가까운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높은 산과 고승을 찾는 이들은 많으니 우리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회복해야 합니다.
문제는 소외된 이웃을 만나면 무조건 많은 시간과 희생을 치뤄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양극단의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이라고 해서 반드시 테레사처럼 발벗고 헌신해야 하는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복지시설과 그룹홈과 사회적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적당히 시간을 내서 잠깐 말벗을 해주고 식사를 함께 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봉사와 섬김이 가능합니다.
특히 저희 하늘언어공동체에 오시면 잠시 함께 재미난 놀이를 즐기고 맛난 것을 나누고 기분 좋게 돌아가시기만 해도 충분한 교제가 되는 곳입니다. 게임종류도 뻥이나 오목처럼 가장 쉽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어렸을때는 가족들이 즐기는 놀이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흔한 오목조차 가족들과 평생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은 비장애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문화가 조성되지 않으면 평생 한번도 함께 놀이를 해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이러한 놀이의 부재는 그대로 심리적, 정서적 빈곤으로 이어져 밝음과 명랑함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먹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주는 것이 예수님께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는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그 다음 욕구인 함께 즐기고 사랑과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 말씀을 현대식으로 고치면 지극히 작은 자와 오목을 두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오목을 두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거액을 희사하거나 온몸을 던져 헌신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런 곳에 와서 오목 한판을 두고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랑의 전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너무 무성의하게 형식적으로 하면 안되지만 전혀 아무것도 안해 버리는 것보다는 오목이라도 한판 함께 하는 것이 사랑에 한발 다가가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동체소식
1. 새람교회 청년들 방문
지난주 예배 때 새람교회 청년들이 1일 수련회의 일환으로 저희공동체를 방문해주셨습니다.
김목사님의 아들인 김연수형제는 제 옆에 앉아서 제가 평안히 설교할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는 손벗이 되어주었습니다.
저희공동체는 이렇게 한번 만나서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행복을 맛보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이렇게 작은이들이 모여서 한번의 손잡음만으로도 빛을 발하는 소확행의 천국입니다.
2. 하늘송집사님댁 심방 예배
하늘송집사님이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같은 아파트의 리모델링한 집으로 이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화요일(27일)에 저희와 중촌동 식구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뻥을 치고 저녁으로 외식을 했습니다.
새로운 집에서 더욱 깊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작은천국을 일구어 가시기를 기원드립니다.
3. 질적 셀 모임 안내
질적 셀모임을 위해서 주제를 정하고 그것에 관심 있는 분들이 동참하는 활동을 해보려고 합니다.
멤버를 정해놓고 매주 모이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정해놓고 원하는 분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날에 동참하는 형태로 셀 활동을 하고자합니다.
예를들면 성경공부에 관심 있는 분들이 계시면 성경공부단톡을 만들어서 성경구절과 성경자료와 그에 대한 각자의 감상을 카톡으로 나누고 오프라인 모임은 서로 합의해서 정하고 함께 산책을 하고 식사를 하는 식으로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또는 주제를 계속 바꿔가며 다양한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달은 독서, 다음달은 기도, 다음달은 영성 이런 식으로 다양한 방식의 은혜체험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질적 셀모임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분들은 개인톡이나 하늘손벗방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4. 질적 자조모임 안내
질적 자조모임도 정기적으로 모여서 하는 게 아니고 서로 주제와 체험할 것을 정해서 단톡이나 개인톡으로 의견을 조율해 가려고 합니다.
비장애인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우리 삼관인이 자조활동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사람: 청각장애는 소통의 애로때문에 사람과 멀어지고 관계형성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악수하기, 손잡기, 손바닥에 이름쓰기 등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사물: 시각장애는 사물을 인지하는 시각의 결여로 인해 사물과 멀어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감으로 접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다양한 사물을 체험하고 수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언어: 시청각장애는 언어생활에 가장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언어가 있어야 사람과 관계가 형성되고 언어가 있어야 사물을 제대로 인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질적 자조모임에서는 사람, 사물, 언어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활동 방향을 모색해나갈 것입니다.
5. 오목두기
오늘은 예배 후 친교때 오목을 둬보기를 권합니다.
둘씩 짝지어서 오델로판으로도 해보고 바둑판으로도 해봅니다.
오델로판은 오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것으로 오목하는 그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서 하는 사람과 손으로 만져서 하는 사람이 있을때 전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체험을 해보는 것은 셀모임의 일환인 동시에 자조모임의 일환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저희공동체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중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