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월 22일(토) 욥기 34:1-9 찬송 441장
1.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2.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5.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6.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7.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개역 개정)
33장에 나오는 1차 변론에서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자신의 고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없음을 불평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측면에서
의를 이루시고자 항상 교훈하시고 징계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에 대해 설명했다.
즉 엘리후는 욥의 신앙적 무지함을 깨우치는 동시에
욥으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그가 지금 고난을 통해 연단받는 것임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와 축복을 얻으라고 권고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34장에서 엘리후는 한걸음 더 나아가
마치 자신이 고소자가 되어 재판을 진행하듯이
욥이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여겨 대적했다고 고소하며
욥이 마치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불신앙의 죄를 범한 것처럼 정죄한다.
특히 1-9절에서 엘리후는 변론의 대상을 욥이 아니라 세상의 총명한 자들로 바꾸어
이들에게 판결을 요구하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데(2-4절)
이는 그의 변론의 정당함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10-30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하신 섭리를 들어
판결의 근거를 밝히고 31-37절에서는 욥에 대한 엘리후의 비판적 입장을
더욱 엄중하게 강화하여 직접적으로 판결하는 자세로까지 나아간다.(36-37절)
그 중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듯이 보이는 욥의 발언을 제시하며
세상 지혜자들에게 욥을 고소하는 서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1-4절은 엘리후가 지혜자들에게 욥에 대해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부분이며
5-9절은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고 대적하는 듯한 욥의 발언을 들어
그이 죄목을 열거하며 마치 재판정에서 고소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엘리후는 욥의 변론 중 하나님의 지혜나 거룩함,
공의로우심에 대해 언급한 말은(9:1-10; 24:18-25) 모두 생략하고
욥이 불평하고 한탄한 부분만 부각시켜 욥을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즉 그는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그 의를 돌아보시지 않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상황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께 항의했다고 하며(9:17; 13:18; 27:2)
욥이 마치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대적했던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욥은 절대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소망을 저버린 적이 없으며
단지 자신을 무고하게 정죄하는 자들을 향해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했을 뿐이고
이해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든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에 대해 알 수 없는
스스로의 신앙적 한계와 무지로 인해 탄식하고 비통해 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의 엘리후 역시 앞의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인 편견에 휩싸여 욥을 무고히 정죄하는데 급급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로써 엘리후 또한 극심한 고난에 처해 있는 욥에게
진정한 이해와 위로를 주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에 대함에 있어 이렇듯 편견과 아집에 빠져
경솔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오직 사람을 온전히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므로
지극히 부족하고 어리석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남을 쉽게 판단하고 서슴없이 정죄함은
하나님께 대한 크나큰 월권(越權)행위요 교만함이며
이로 인해 이웃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고 실족케 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롬14:10-12; 약4:11-12)
3절)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이 말과 같이 사람들의 지체는 나름대로의 기능이 있다.
입은 식물을 섭취하며, 맛을 변별하고, 말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귀는 말을 분별하기 위해 존재한다.
또한 코는 숨을 쉬는 데 필요하며, 눈은 사물을 분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이 처음에 우리 몸에 여러 지체들을 두신 것은
단지 보기에 좋으라고 그리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눈과 귀가 각각 두 개,
코와 입을 각각 하나씩 가진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정상적인 사람이어야 보기에 좋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만일 사람들이 본래 눈이 하나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면
눈을 두 개 가진 존재로 태어난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이며,
눈이 하나인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몸의 지체들은 보기에 좋으라고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따라서 몸의 지체들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에만 존재의 의의가 있다.
몸의 기관중 맹장에 관해 이야기 해보면,
맹장은 필요 없는 것이라느니, 필요 있다느니 말이 참 많다.
그런데 초식 동물에게는 적어도 맹장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 사람도 처음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할 때는
맹장이 더 길었으며 꼭 필요한 장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육식을 위주로 하면서 맹장이 짧아지고
그 기능도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의학계의 견해이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개복하여 수술을 할 때는 맹장을 제거하기도 한다.
물론 개복 수술시에 맹장을 제거하는 것은
맹장의 존재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개복 수술로 인하여 창자의 위치가 변동되면서 맹장의 위치도 변경되므로
혹시라도 충수염에 걸린 경우 오른쪽 하복부에 통증이 오는데
맹장의 위치가 바뀌면 그 사실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여튼 확실하게 판명이 난 것은 아니지만 현대 의학적으로 볼 때
맹장은 제거해도 무방할 만큼 그 기능이 약화되거나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체도 그 기능을 상실하면
제거해도 무방할 만큼 존재의 의의가 전혀 없게 된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지체에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다.
이는 우리 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의 몸이 존재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
무슨 말씀인가?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존재 의의가 있고 가장 유익한 존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른 목적, 즉 자기의 영광이나 사단이 원하는 바 죄된 욕구를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우리 몸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요,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려다가
타락함으로써 그들 자신은 물론 온 인류로 하여금 존재의 가치를 상실케 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다시금 당신의 영광을 위하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존재 가치를 지니게 하여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몸으로 이 기능을 잘 수행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권면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에 따라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