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전주 옥터성지
전주옥은 신유박해(1801)때 동정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그해 10월 9일 옥중 교살된 곳이다. 정해박해(1827)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했다. 기해박해(1839) 때는 김조이,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박해시기에 옥은 고통스런 곳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기도처였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는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는 정해박해(1827) 때 잡혀와 만 12년간을 옥중에서 긴긴 세월을 보낸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옥중에서도 밤마다 등불을 켜 놓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소리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한때 이 옥에는 240여 명의 교우들이 갇혀 있었다고 한다.
복자, 유중철 요한(5.29) 기본정보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柳重哲) 요한(Joannes)은, 1779년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 루갈다가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 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부친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유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에게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유중철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겼으므로 젊은 나이인데도 무게가 있고 점잖은 어른 대접을 받았다.”
유중철 요한은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야고보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 야고보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에게서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주 야고보 신부는 전주에 사는 유 요한을 염두에 두고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마침내 1797년 가을에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98년 10월 유 요한은 아내 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유 요한이 갇히게 되자, 동생 유문석 요한이 줄곧 전주를 오가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의복만은 전해줄 수 없었으므로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은 그에게 진정한 형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요한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였다.
9월 중순에는 유 요한의 아내 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에 포졸들은 유문석 요한을 가족에게서 떼어 내, 형 유중철 요한에게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요한의 나이는 22세였다.
유중철 요한이 순교한 뒤, 옥중에 있던 아내 이 루갈다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곧 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중철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유문석 요한(5.29) 기본정보
‘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문석(柳文碩) 요한(Joannes)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 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 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유 아우구스티노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유문석 요한은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유문석 요한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그의 형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가 되기로 서약하고 혼인을 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남이 마을에서는 유문석 요한의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 요한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유문석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중순 무렵에는 유 요한도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때 가족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는데, 그 내용은 그의 형수 이순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쓴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어 전주 관장은 유문석 요한과 그의 가족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장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유 요한은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 나와 형 유중철 요한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이때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었다.
유문석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경언 바오로(5.29) 기본정보
‘종회’ 혹은 ‘경병’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경언(李景彦) 바오로(Paulus)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2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누나이다.
이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비록 몸은 허약하였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하였고, 정신적으로도 훌륭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신유박해 이듬해인 1802년에 형과 누나가 순교한 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바오로는 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살면서 가난을 신앙으로 이겨 냈다. 또 22세 되던 해에 한 중인 집안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아내의 성질이 고약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모범적인 인내로 이를 극복하였다.
평소에 이 바오로는 속병이 있어 자주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불평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화평한 얼굴로 생활하였으며, 자주 성경을 읽거나 깊은 묵상에 빠지곤 하였다. 그는 언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1819년에 순교한 조숙 베드로가 이러한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 바오로는 이후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학식과 재주를 이용하여 교회 서적을 베끼거나 상본을 모사하였고, 이를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북경을 오가는 밀사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 주느라 힘썼으며,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북경을 오가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바로 그였다.
이 바오로는 언제나 마음속에 순교의 뜻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자주 묵상하였고, 다른 교우들에게도 천주를 위해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하도록 권고하곤 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이 바오로는 자신이 나누어 준 서적과 상본 때문에 전주 관아에 고발되었다. 이내 전주에서는 그를 체포하려고 한양에 포졸들을 파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체포된 그는 먼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신앙을 고백한 다음,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주로 이송되었는데, 이후의 사실은 그 자신이 전주 옥중에서 기록한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바오로는 여러 차례의 혹독한 형벌 때문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채찍질해 가면서 순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에게는 오직 형과 누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전주 옥중에서 어머니와 가족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그리고 명도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세 통의 서한을 작성해 보냈는데, 여기에도 이러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너무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찌 한시인들 이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 천주께서 지금까지 내게 무수한 은혜를 내려 주신 것으로 볼 때, 분명히 나를 저버리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큰 집에 올라오실 때에 내가 마중 나가 우리의 보편된 아버지께로 함께 가서 그분을 찬미할 것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느라 노력하였지만, 선천적으로 약했던 이경언 바오로의 육체는 더 이상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였다. 상처는 계속 깊어졌으며, 그는 신음 속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27년 6월 27일(음력 윤 5월 4일) 전주 옥중에서 하느님께 영혼을 바쳤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이경언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5.29) 기본정보
김조이(金召史)*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본디 김 아나스타시아는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로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더욱더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다.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마을 부인들의 교육에까지 유의하였으니, 그녀의 권면은 그들에게 아주 유익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 때에, 김 아나스타시아 부부는 다행히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들 부부는 피신한 곳에서 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를 낳고, 선교사를 집에 모시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때 그들 부부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딸 이 아나스타시아는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녀의 가정에 다시 박해의 위협이 닥쳐온 것은, 1839년 기해박해 때였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 아나스타시아의 남편은 집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밀고된 상황이었으므로 피신을 하기는 해야만 하였다. 이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딸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같이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에 도착한 뒤 김 아나스타시아는 여러 차례 신문을 당하였으나, 어떠한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주를 배반하고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라.’는 강요를 줄곧 거절하였으며, 이 때문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다시 형벌을 받은 뒤에 옥에 갇혔고, 그녀의 어린 딸도 굳게 신앙을 증언하고 옥으로 끌려왔다.
어느 날 김 아나스타시아는, 딸 이 아나스타시아가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오자, 짐짓 딸의 신앙을 의심하는 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거다.” 그러자 딸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마침내 김 아나스타시아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곤장을 맞고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하였으니,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의 상처로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1839년 10월경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조이는 그 남편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익혔고,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을 고칠 줄을 모르니, 참수를 하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입니다.”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 ‘조이’는 과부 또는 나이 많은 여성을 젊잖게 가리키는 이두로, 한자로는 ‘召史’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조이’라고 읽는다.
복녀, 심조이 바르바라(5.29) 기본정보
심조이(沈召史)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 토마스와 혼인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 루카는 그녀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1840년에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녀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홍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심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하려는 마음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심 바르바라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다. 시아버지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자기 집으로 피신해 오자, 심 바르바라는 그들을 헌신적으로 거두어 주었다. 그녀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짐이 된다는 눈치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심 바르바라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체포될 때나 문초를 받는 가운데서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건강이 나쁘고 체질이 약하였음에도, 앞에 늘어놓은 형구를 볼 때나 관장들의 고함 소리를 들을 때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심 바르바라는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한 뒤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통을 참아 내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천주를 위해 당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한 살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마침내 전라 감사는 심 바르바라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심 바르바라에게 처형 때까지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형벌의 고통과 더불어 이질까지 걸렸으며, 스스로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자 타당하게 준비한 뒤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처럼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중에서 순교한 날은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앞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그녀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심조이는 시아버지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배웠는데, 부부 사이의 정을 끊으면서까지 천주교를 올바른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육신이 죽기를 원하면서 이를 ‘영혼이 승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7년 동안이나 천주교의 가르침을 배워 왔으니, 십자가 앞에서 서약한 것을 결코 바꿀 수 없으며, 죽어도 (천주교를 믿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심조이 바르바라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5.29) 기본정보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무렵, 이성삼 바오로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모들은 정해박해를 피해 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은 이 아나스타시아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귀여운 신심을 지닌 한 작은 천사였다. 그녀는 열 살 무렵에 교리 문답과 아침 · 저녁 기도를 배운 다음, 선교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선교사는 그녀의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그 마음에 감동하여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아나스타시아의 덕행과 신심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가운데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그곳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 아나스타시아는 이내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서양 선교사가 간 곳을 묻자, 그녀는 나이가 어려 선교사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관장이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 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포졸과 옥리들은 이 아나스타시아의 나이가 어린 데다가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녀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또한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위협을 당하였지만,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하였다. 그녀는 이제 의지할 데조차 없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천주 안에서 힘을 얻어, 끝까지 자신의 영웅적인 결심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자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5일(음력 10월 30일)에서 6일 밤(음력 11월 1일)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