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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의정부를 지나면서 43번 국도를 타고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축석령을 넘으면 포천시 소흘읍(蘇屹邑)이다. 읍소재지인 송우리는 조선시대에 강원·함경의 양도에서 한양으로 드는 길목이었지만, 소나무가 무성해 ‘솔모루’로 불리던 마을답게 제법 운치 있는 동네였다. 허나 이건 오래 전의 일이고, 요즘은 아파트 공사 차량 등으로 매우 번잡하다. 택지개발이 한창인 것이다.
소흘과 이웃한 가산면 궁말은 ‘오성과 한음’의 개구쟁이로 유명한 오성대감, 곧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고향이다. 방축리엔 이항복을 배향한 화산서원이, 금현리 벌판 한쪽의 나지막한 언덕엔 그의 묘소가 있다.
장난기 많아 해학의 현신으로도 불리는 이항복은 관직에 있는 40년 동안 당파 속에서 살았으나 어느 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평생을 대처럼 꼿꼿이 살았던 선비였다. 그러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구하려 힘쓰는 등 집권당파의 부당함에 저항하다 관작을 박탈당하고 북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유배 가는 길에 불렀다는 이 시조는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엔 그의 충심이 구절마다 드러나 있는데, 유배지에서 지은 다른 한편의 한시 ‘雪後(설후)’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인지 참 쓸쓸하다.
눈 온 뒤 산 사립은 늦도록 닫혀 있고
시내 다리 한낮인데 오가는 사람 적다.
화로에 묻은 불은 열기가 모락모락
알 굵은 산밤을 혼자서 구워 먹네.
유배지 북청의 눈 덮인 산속, 사립문조차 굳게 닫힌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그는 홀로 밤을 구워 먹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그토록 호방하고 장난기로 가득 찬 백사 이항복에게도 이런 쓸쓸한 내면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새삼스럽다. 허나 앞길 불투명한 유배지에서 모든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여유도 엿보인다. 홀로 먹는 그 군밤은 어떤 맛이었을까. 이항복은 북청으로 유배 간 그해 5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항복은 곧 복관됐고 청백리에도 오르게 된다. 그런데 살아있을 땐 그토록 못 잡아먹어 안달하더니 죽은 뒤 이렇게 챙기는 건 또 무슨 까닭인지. 어쨌든 이항복의 유해는 북청에서 이곳 포천으로 옮겨와 금현리 선산에 묻히게 됐다.
풍수가들은 무덤 자리가 주산인 한북정맥 죽엽산(600.6m)에서 청룡이 평지로 쏜살같이 내려왔다가 몸을 틀어 일어서면서 들판으로 달리다 여의주를 물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로 오르려는 형국, 곧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명당이라 한다. 조선조에 8 정승과 3 대제학, 178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경주이씨들의 활약은 조선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이러한 명당자리에 이항복을 잘 모신 덕이라고 한다.
잘 단장된 묘소는 명당이라 그런지 차분한 맛이 있다. 작은 공장들이 붙어있는 주변의 어수선함과는 달리 철마다 피어나는 무덤가 들꽃들이 장난꾸러기 대감의 넋을 위로하는데, 이번에 들렀을 때엔 갑자기 묘소 앞 수풀에서 까투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의 날갯짓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성대감이 이 가난한 길손을 놀래주려고 꿩을 날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빙긋 웃음이 나왔다.
다시 43국도로 빠져나와 흘러가는 포천천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곧 아파트 많이 들어선 포천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엔 포천의 지리적인 중요성을 증명해주는 반월산성과 유림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릴 듯한 포천향교가 있다.
반월산이라고도 불리는 청성산(283.3m) 정상에 축조된 반월산성은 후삼국시대 궁예왕이 쌓은 것이라 전한다. 이후 전략적 가치에 따라 폐성과 개축을 반복하다가 거의 허물어진 상태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이란 게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반월산성도 조망이 좋다. 우선 가까운 포천 시내는 물론이고, 북쪽으로 멀리 포천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목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또 동쪽을 보면 국망봉에서 운악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하늘금이 멀리 바라보인다. 산이 그다지 높지 않고 험하지도 않으니 뛰어난 요새라 할 수는 없겠지만, 포천을 지키는 데는 제법 필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을 한 바퀴 도는 데 20분쯤 걸리는 반월산성은 포천 시민들의 산책 코스로 애용되고 있다. 현재 여기저기 복원공사가 한창인데, 마침 작전중인 군 헬리콥터의 요란한 날개소리에 제법 요새다운 분위기마저 풍긴다. 성안의 언덕에 마련된 헬기장은 1천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현대에도 이 성이 여전히 군용으로 필요가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산성을 내려와 다시 국도를 타고 포천천 물길을 따르다보면 이내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을 만난다.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인 대군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한 인물이다. 1640년 볼모로 선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고, 그 뒤에도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국난을 당했을 때 왕족으로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청년기엔 외교관의 어려운 중책을 맡았고, 청나라와의 전쟁 후 피폐해진 생활로 고통 받고 있던 백성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실리적인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던 대군은 안타깝게도 삼십대 중반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묘소엔 짧은 생애의 치적을 기리는 효종, 숙종, 영조, 정조 이렇게 네 왕들의 치제문비(致祭文碑)가 서 있어 대군이 받았던 각별한 애정과 그 업적을 짐작케 한다. 치제문비가 있는 아래서는 봉분이 잘 보이지 않지만 막상 올라가 보면 왕릉에 버금갈 정도로 장대하고 석물도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무덤가엔 약소국의 슬픔을 몸소 겪어야만 했던 인평대군의 넋인 양 연분홍빛 맥문동이 한가득 피어나 늦여름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묘소 앞에서 바라보면 포천 고을 산줄기들이 탁 트인 전망에 낮은 물결처럼 펼쳐진다. 대군의 묘소는 원래 광주 용문산 근처에 썼는데, 숙종 때 셋째 아들 복성군이 역모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자, 이를 아버지 묘자리 탓이라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전한다.
여기서 가까이 있는 용연서원(龍淵書院)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 조경(趙絅) 두 분을 배향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만년을 보냈고, 남인계 학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부근은 특히 경기도에서 유일의 남인세력 근거지였다. 이덕형은 바로 소년시절을 같이 보낸 백사 이항복과 함께 펼쳤던 무용담의 ‘오성과 한음’으로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음의 고향은 이곳이 아니지만, 어렸을 적 성장했던 외숙 유전(柳琠)의 집이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은퇴해서도 이곳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한음은 남인 출신으로 영의정이자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어 한때 남인과 북인의 중간노선을 지켰으나, 뒤에는 남인에 가담하게 된다.
용연서원은 대원군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이덕형이 세운 공로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백사 이항복의 화산서원이 철폐된 까닭은 무엇인가. 대원군이 1인1사(一人一祠) 원칙을 두고 전국의 서원철폐를 단행할 당시, 화가 백사를 모신 화산서원에도 미쳤다. 이때 백사가 유배됐던 북청의 유림들이 내려와 포천의 유림들에게 “포천은 백사 선생의 고향으로 도처에 유적과 묘소도 있으니, 북청의 노덕서원을 남기게 해달라”고 읍소했다. 북청의 경우엔 서원이 훼철되면 백사를 기릴 만한 아무런 연고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포천의 유림들은 이 청을 받아들여 결국은 고향 화산서원의 훼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런 사연을 안고 있는 용연서원을 지나 북으로 달리면 역시 물줄기 하나가 동행한다. 한북정맥의 축석령서부터 43번 국도와 나란히 달리던 포천천이다. 그런데 맑은 물색을 보여줘야 할 포천천은 점점 혼탁해지고 냄새도 고약해져간다. 이 포천천은 맑기로 소문난 백운계곡에서 흘러온 영평천 본류에 합류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동 일동의 온천지역과 양문공단에서 흘러나온 폐수 때문에 점입가경이다.
백로주, 낙귀정…. 포천에서 대표적인 경치인 영평팔경이라 자랑하는 역사 깊은 유적지들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이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서거정의 ‘영평팔경가’를 오히려 욕되게 하고 있다. 조선의 명필이요 풍류가인 봉래 양사언이 시를 지으며 노닐었다는 금수정(金水亭)에 이르렀을 때엔 실망이 극에 달해 그만 울고 싶어졌다. 멀리서 보면 정자는 벼랑 위 적당한 자리에 그럴 듯하게 복원되어 있었지만, 현장에 들어섰을 땐 안내문 한 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악취가 풍겼기 때문이다.
정자 난간에 기대 주변 경관을 즐겁게 감상하려는 기대감은 악취 속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조선의 명필 양사언이 바위에 썼다는 글씨들을 찾아보는 호사를 할 수 있을까. 오수와 악취만 빼면 더 없이 아름다웠을 금수정이건만….
포천 토박이인 한 선배에 의하면, 포천천과 영평천의 수계가 이렇게 오염된 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겨우 20여 년 전만 해도 포천천엔 피래미, 불거지, 탱가리 같은 물고기가 살 정도로 깨끗했다고 한다. “1급수엔 못 미처도 2급수보다는 깨끗한 1.5급수였다”는 것이 그이의 설명이다.
그러나 상황은 1980년대 초반, 서울시 동부지역에 자리하던 염색·도금·피혁·석재가공공장 등이 포천천 수계로 이전해 오기 시작하면서 나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신평 염색공단이 가동되자 수질이 심각한 수준에 이를 정도로 오염됐다. 포천의 환경단체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포천천 수질은 하수처리장의 방류기준인 BOD 20ppm보다도 더 높은 수준으로 전국 최하인 5등급 이하의 하수다. 이만하면 가히 환란 수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포천서 군생활 했던 사람들은 힘들었던 당시 일을 되새기며 장난 삼아 이 고을을 ‘하늘(天)도 포기(抛棄)한 땅’이라며 포천(抛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비록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자기가 군생활했던 고을을 지칭할 때 흔히 쓰는 관용화법이라 해도, 이 오수를 보고 똑같이 힐난해도 뭐라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지명에서 드러나듯 포천은 물과는 뗄 수 없는 ‘물의 고을’이다. 고려 때 포주(抱州), 조선시대의 포천(抱川)이라는 지명은 ‘한내’라 불리는 한탄강을 안고 있어 붙여진 것이다. 포천의 ‘안을 포(抱)’자도 다른 고을의 물을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언어학자들은 어원으로 볼 때 고구려 때 이곳의 지명인 마홀(馬忽)도 물과 관련된 것이라 지적한다. ‘마(馬)’는 고구려시대에 물(水)을 나타내는 매(買)로 해석할 수 있으며, ‘홀(忽)’은 고구려 지명에 붙는 접미사로서 나중에 성(城) 또는 골(谷)이 된다. 마흘은 곧 ‘물골’인 것이다. 이런 물의 고을이 전국에서 최악의 수질오염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니 지나는 길손은 안타까울 뿐이다.
포천 북쪽을 적시고 흐르는 한탄강을 한 바퀴 휘돌면서 궁예의 한이 서린 철원 땅을 슬쩍 바라본 뒤 영북면으로 내려오면 산정호수(山井湖水)다. 일제 때 농수 확보를 위해 세운 저수지인데, 이름 한번 참 잘 지었다. ‘호수’라는 서정적인 단어에 ‘산정’이란 운치 있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상승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호수의 풍치도 제법 빼어난 편이라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봄의 신록과 벚꽃, 여름의 울창한 숲과 맑은 호수, 가을이면 들꽃과 명성산 억새가 있고, 겨울엔 꽝꽝 얼어붙은 빙판에서 스케이팅 등을 즐길 수 있다. 여기에 명성산에 서린 궁예왕의 전설은 이런 아름다운 경관을 한층 신비롭게 끌어올린 효과가 있었다.
민간에 전승되는 지명이 역사적 사실을 설명할 때도 적지 않다. 물론 후대에 조작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그렇다 해도 숨은 뜻을 제대로 읽어내기만 한다면 민초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고을의 지명에 얽힌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일은 보물급 문화재의 발굴작업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일찍이 포천의 향토사학자들과 대학에서 포천의 지명에서 궁예의 흔적을 찾아내려 한 작업은 그래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궁예전’엔 궁예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이 이에 어찌할 바를 몰라 사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중으로 들어갔다가 부양(斧壤·현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해를 입었다.” 이렇듯 <삼국사기>엔 왕건의 쿠데타가 아무런 무력 충돌 없이 성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포천 지역엔 당시 궁예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접전을 벌였던 전설이 수도 없이 전한다. 철원과 이웃한 까닭에 내용은 왕건을 경계하고, 궁예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향토사학자들은 이런 전설에서 정통 사서와는 다른 결론을 도출해냈다. 곧 ‘왕건의 정변으로 궁예는 부하 군졸들과 밤중에 궁성을 빠져나와 포천의 명성산에 은거하며 성을 쌓고 재기를 노렸다. 왕건군이 공격하자 궁예군은 대부분 명성산 앞 절벽에 떨어져 죽고, 궁예는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하여 지금의 평강에 이르렀으나 얼마 후 그곳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명 전설을 하나하나 그림 퍼즐처럼 맞춰나간 결과 얻어낸 성과물이다.
명성산의 원래 이름은 울음산인데, 도망가지 못한 궁예의 군사들이 온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여 불리는 지명이다. 여기엔 궁예가 패주하여 갈 때에 왕건 군사로부터 급습을 받아 싸우게 되었다는 ‘야전(野戰)골’, 궁예가 지금의 산정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望遠臺)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望峰)’,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은신하던 자연동굴인 ‘궁예왕굴’, 그리고 마을 이름으로서 파주골(坡州洞)은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했다고 하여 패주동(敗走洞·가는골)이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하여 파주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동면 장암리의 여우고개는 왕건의 군사들이 명성산에 숨은 궁예의 군사들을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었다.
역시 한북정맥의 굵직한 봉우리들에도 궁예와 관련된 전설이 따라다닌다. 백운산 남쪽의 도마치(道馬峙) 고개는 궁예가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갈 때 산길이 너무 험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며갔던 곳이고, 국망봉(國望峰·1,168m)은 궁예가 불타는 철원 도읍지를 바라보던 봉우리고, 궁예의 부인 강씨가 도피했다는 강씨봉 등이다. 이외에도 운악산 기슭에도 궁예가 왕건의 군사들이 쳐들어 올까봐 아주 강한 군사를 배치해 놓았다는 ‘강사골’, 궁예의 군사들이 나라가 망해 통곡하면서 울었다는 ‘설움골’, 궁예의 군사들이 전투 중 죽으면서 나무들마다 온통 피가 다 묻었다는 ‘피나무골’ 등 셀 수 없이 많다. 포천에서 궁예의 흔적을 밟는 일은 이렇게 지명으로 시작해 지명으로 끝난다.
산정호수에서 이동으로 길을 잡는다. 왕건의 군사가 명성산의 궁예의 병사가 망을 보았다는 여우고개를 넘으면 이동면.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47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가면 지난 1975년 유신체제를 반대하던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약사봉(489m)을 끼고 돌아 자등현을 넘어 김화로 이어지고, 316번 지방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달리면 백운동계곡을 거쳐 광덕고개로 이어진다.
포천의 이동에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을 넘나드는 광덕고개(廣德峴)는 ‘캬라멜고개’라는 특이한 이름도 갖고 있다. 여기엔 6·25전쟁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사단장이 금경사로 굽이도는 광덕고개를 오를 때면 당시 차량 운전병들에게 졸지 말라고 캬라멜을 주었다고 해서 유래한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또 굽이굽이 돌아가는 광덕고개의 생김새가 낙타의 등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미군들이 낙타의 캐멀(Camel)이라 불렀는데, 음이 비슷한 캬라멜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미군들에 의해 유래했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한없이 고즈넉할 것만 같은 이 고개 정상에 매일 장이 선다. 이른 아침 경기도에서 강원도에서 올라온 아주머니들은 이곳에서 판을 벌이고 저녁 늦게까지 더덕, 옥수수, 감자 등을 파는 것이다. 봄엔 인근 산자락의 싱싱한 나물이 다 올라온다. 인적 없을 것 같던 높은 고갯마루에서 시골의 5일장처럼 사람 냄새나는 흥정과 순박한 웃음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들르는 사람들도 많아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다는 게 장터 아낙의 설명이다. 광덕고개에서 다시 이동으로 내려선다
참 이상한 일이다. 구례, 산청 출신 사람들을 만나면 첩첩 산물결 이룬 지리산 능선이 떠오르고, 춘천에 산다면 물안개 자욱한 호수가 연상되는데, 포천에 사는 사람을 만나면 요상하게도 텁텁한 이동막걸리와 맛좋은 갈비가 오버랩된다. 사실 그렇다. 아무리 먹는 일에 무감각한 사람이라 해도 이 포천, 특히 이동에서라면 이동막걸리와 이동갈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맑은 물이 필요한 막걸리는 대중적인 민속주. 시골 농부들이 농사일 중에 마신다 하여 농주(農酒)라는 애칭이 있다. 허나 갈비, 특히 소갈비는 아직까지도 부유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이렇듯 어울리지 않는 두 품목이 나란히 이곳 이동에서 유명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먼저 서민적인 막걸리부터 살펴보자. 현재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에 가입된 막걸리 회사는 전국에서 996개에 이른다. 그중 포천지역엔 이동면 도평리, 일동면 기산리, 내촌면 내리 등지의 10여개 주조 회사에서 쌀 막걸리, 밀가루 막걸리, 좁쌀 막걸리, 찹쌀 막걸리, 콩 막걸리, 더덕 막걸리 이렇게 6가지 종류의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막걸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동막걸리의 원조는 하유천옹이라 한다. 그는 20대에 소주 양조업으로 성공했으나 주정(酒精) 공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가 실패한 뒤 이곳에서 전통 민속주인 막걸리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동막걸리의 맛은 제조공법에서 기인한다. 일반 막걸리가 금속제 탱크에서 숙성되는 것에 비해 이동막걸리는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질그릇인 항아리를 사용함으로써 미생물 발효에 필요한 맑은 공기와 풍부한 산소에 의해서 독에서 발효가 이루어지는 전통기법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빚어진 이동막걸리는 단맛과 톡 쏘는 맛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 여기에 막걸리 특유의 텁텁한 맛이 곁들여져 술잔을 여러 번 비우게 되는 것이다. 이동막걸리가 이렇듯 깊고 깨끗한 맛을 낼 수 있는 이유는 화강암 지하 암반 200m에서 끌어올린 깨끗한 물로 술을 빚기 때문이다. 포도주 등 과즙이 발효하여 얻는 술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술이 물맛에 좌우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특히 제조 방법에 비밀이 별로 없고 비슷비슷한 막걸리의 경우 물맛에 크게 좌우된다고 하는데, 특수 미네랄이 일반 물에 두 배에 이른다는 백운동계곡 지하에서 뽑아올린 물은 당연히 수훈갑인 것이다.
그런데, 포천 이동막걸리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데는 우선 ‘군인의 힘’이 아주 컸다. 포천 토박이 선배는 “포천은 전국 팔도에서 군인이 제일 많은 곳이다. 한 지역에 2개 군단이 있는 곳은 포천밖에 없다”고 설명하면서 “전국 8도에서 모여든 군인들이 없었다면 포천 막걸리가 이렇게까지 유명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때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포천의 군부대엔 일동막걸리와 이동막걸리가 납품되기 시작했다. 양조장에서 익은 막걸리를 탱크차에 싣고 영내 PX에 마련된 항아리에 담아주면, 그곳에서 주막처럼 군인들에게 막걸리를 팔았다. 힘든 훈련을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온 뒤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얼마나 달콤했을까. 그것도 영내에서 마시는 막걸리라니! 이후 제대하고 전국으로 흩어진 사내들이 군대 특유의 과장된 이야기로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민간인 신분으로서 또다시 포천을 밟았을 때 다시 막걸리를 찾게 되었는데, 다행히 ‘도루묵이 된 은어’가 아니라 맛이 제법 좋았다. 그래서 이동막걸리가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또 서울에서 인삼 등을 구하러 포천으로 장을 보러온 소매상들도 막걸리 맛에 반해 지게에 지고 서울 마장동과 수유리 등지에 내다판 것이 명성을 더하게 된 계기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산정호수와 백운계곡을 찾는 관광객, 국망봉·청계산·운악산·명성산 등 한북정맥의 명산들을 오르려는 등산객들이 찾아들면서 명성이 자자해진 것이다.
이동갈비의 명성 역시 군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 이동엔 갈빗집이 두어 집이 있었는데, 면회 온 가족이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갈빗집이었던 것이다. 막걸리가 훈련 후에 마시는 ‘일반식’라면 갈비는 휴가 때만 맛볼 수 있는 ‘특식’이었던 것이다. 군대에서 ‘짬밥’만 먹다가 외출을 나와 맛보는 갈비맛은 또 어땠을까. 이렇게 갈비맛을 본 군인들이 제대 후 입소문을 내기 시작하면서 이동 백운동계곡가엔 갈비 굽는 연기가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한두 집에 불과하던 갈빗집이 늘어나기 시작해 현재는 무려 삼백여 집이나 된다.
농주(農酒)라 불리는 막걸리 안주로, 큰맘 먹어야 맛볼 수 있는 소갈비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막걸리는 역시 뜨뜻한 두부에 곁들여지는 신 김치가 제격일 터. 이 길손이 포천에서 막걸리와 갈비를 다른 자리에서 따로 맛본 건 이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10년만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텁텁하면서도 단맛도 적당히 혀끝을 적시는 막걸리 두 사발을 단숨에 들이키자 금새 얼큰해졌다.
막걸리 특유의 트림을 한 뒤 이런 생각을 해본다. 포천 사람들은 막걸리를 내세우면서 맑은 물을 엄청 자랑한다. 영평천 최상류인 백운계곡엔 산천어까지 산다하니 이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백운계곡에서 불과 20km쯤 하류는 3급수에서 사는 물고기도 떼죽음을 할 정도로 오염되어 있다. 포천이 서울 주변 고을로서 아무리 산업화 시대를 힘겹게 거쳐 왔다 해도, 이 야누스 같은 얼굴이 21세기 초반에 그려진 포천의 현주소라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일까. 포천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늘 국립수목원이다. 더불어 갈비로 배를 불리고, 막걸리에 얼큰해졌어도 빼놓지 않고 꼭 들러야할 곳이다. 특히 포천천의 오염된 물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면 치료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국립수목원이 들어앉은 광릉숲은 1468년 세조의 능림으로 지정되었으니 530여 년간 엄격히 보호되고 관리되어온 국내 최고의 산림이다. 한 고을에 20년만에 전국에서 최악의 수질로 떨어진 냇물이 있는가 하면, 500년 동안 변함없이 보호되어온 전국 최고의 숲이 있다는 사실이 참 역설적이다.
포천의 국립수목원은 한때 광릉수목원이라 불렸을 정도로 광릉과는 뗄 수 없는 사이다. 모든 게 메말라 가기만 하는 21세기에 서울 근교에서 크낙새 울고, 광릉요강꽃 피어나는 숲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숲속 대부분의 생명체가 절정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8월의 숲은 아름다웠다. 영상 35℃를 웃도는 뙤약볕도 이 짙디짙은 나무숲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배추흰나비를 입에 물고 버거워하는 고추잠자리의 날갯짓도, 숨은 띠 만들어놓고 먹잇감 기다리는 호랑거미의 음흉한 눈빛도, 푸른 나뭇잎을 갉아먹는 나비애벌레의 꿈틀거리는 몸짓도 모두 아름다웠다. 또 그 숲속 깊은 곳에서 이젠 멸종했거나 위기에 처한 한국 토종 동물들도 만났다. 재롱떠는 반달가슴곰, 냄새 지독한 늑대, 그리고 그늘에 앉아 더위를 피하는 백두산호랑이….
붉은 물봉선 드문드문 피어있는 숲길을 지나니 보랏빛 벌개미취 만개한 숲이 반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모퉁이에서 그 길을 밝혀주는 들꽃들을 만나니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다정스런 눈빛을 주고받는 연인들도, 아이들 손잡고 웃음꽃 활짝 피우는 가족들도, 인솔교사를 따라온 아이들도 이 숲에서만큼은 모두 해맑은 미소를 흘리면서 즐거워한다.
‘간밤에 바람이 많이 불었나?’
땅바닥을 뒤덮은 상수리나무 이파리를 보며 중얼거리자, 숲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이 들려온다.
“이건 거위벌레 짓이지요. 거위벌레가 상수리에 알을 낳은 다음, 그 알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가지를 잘라 땅으로 떨어뜨리는 거지요.”
그래서 숲속의 귀염둥이 다람쥐의 먹을거리가 별로 없단다. 아까 길손의 콧노래를 다람쥐가 들었을까? 괜히 미안해진다. 문득, 숲속 어디선가 달짝지근한 내음이 풍겨온다. 뒤에도 앞에도 나무와 풀밖에 없는데…. 숲 해설사와 또 눈이 마주쳤다.
“아, 이건 계수나무에서 나는 냄새랍니다. 참 달콤하죠?”
흙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를 하나 주워든다. 이파리는 가지를 떠난 지 제법 되었는지 조금 말라있다. 잎맥을 유심히 바라보다 코끝에 갖다대고 숨을 들이마신다. 달콤한 내음이 무척 진하다. 마치 추억의 솜사탕 같은. 숲속에선 가을을 부르는 매미소리 요란하다.
/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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