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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突厥)십성(十姓)부락(部落)과 와랄(瓦剌)
2015년 11월 13일 자 ‘동아일보(東亞日報)’기사(記事)를 보면
○ 우리나라의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은, 지금(只今)도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역사서(歷史書)로 착각(錯覺)하시고, 조선사(朝鮮史)를 일본서기(日本書紀) 내용(內容)에 맞춰 고증(考證)하는, 증거(證據)하려는 코-메-디를 연출(演出)하고 계시다.
한심(閒心)하다 못해, 분노(憤怒)를 자아내게 한다. 어떻게 역사(歷史)과목(科目)을 전문적(專門的)으로 전공(專攻)하신 분들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지, 이해(理解)불가(不可)하다. 우리 사회(社會)가 비정상(非正常)적인 일들을 많이 벌이다보니, 이 분들도 따라가는 것인가!
박(朴) 대통령께서는,《바르게 역사(歷史)를 배우지 못하면 혼(魂)이 비정상(非正常)이 된다.》고 하는 정상적(正常的)이지 못한 발언(發言)까지 공식(公式)석상(席上)에서 하는 마당이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역사(歷史)교육(敎育)을 받은 젊은 세대(世代)들 모두는, 혼(魂)이 비정상(非正常)이 되었다는 이야긴가? 이런 판국에 역사학자(歷史學者)들 보고 비정상적(非正常的)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좀 심한 이야긴가?
○ 2015년 11월 13일 / 동아(東亞)일보(日報)기사에 : 「4-5세기 전남(全南)일대는 백제(百濟)가 아닌 마한(馬韓)의 지배가능성 커」라는 제목(題目)아래…「근초고왕(近肖古王) 마한(馬韓)점령 통설(通說) 흔들려」…문헌(文獻)사학(史學)계 다수(多數)는, 「서기(西紀) 369년 백제(百濟)장군(將軍) ‘목라근자’가 심미다례등 영산강일대 국가(國家)들을 정복(征服)했다」는 내용(內容)의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 49년 조에 근거(根據)해, 4세기 중엽(中葉)부터, 백제(百濟)가 나주(羅州)일대의 마한(馬韓)소국들을 지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략(中略). 그러나 96석실에서 나온 옹관과 구조가 백제(百濟)가 아닌, 이 지역 고유(固有)의 양식(樣式)이라는 조사결과(調査結果)가 밝혀졌다. 중략(中略)…하였는데,
㉮ 21세기(世紀) 지금도 우리나라 역사학계(歷史學系)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고증(考證)본으로 내세우고 있다니, 할 말을 잊게 한다. 그렇다면 ‘신공황후’가 만삭(滿朔)의 몸으로 직접(直接) 군대(軍隊)를 이끌고, 대한해협(大韓海峽)을 건너, 반도(半島) 남쪽지방을 점령(占領), 일본(日本)부(府)를 설치(設置), 경략(經略)했다는 기록(記錄)이, 유효(有效)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 이런 실정(實情)이니, 열도(列島)아이들이, 반도(半島)인들을 이등(二等)국민(國民)으로, 자신들을 천손(天孫)의 민족(民族)으로, 반도(半島)는 열도(列島)가 점령(占領)한 땅이란 이야기를 해대며, 역사왜곡(歷史歪曲)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학자(學者)들은 열도(列島)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이렇게 열심히 해대는 것일까? 벨도 없고, 자존심(自尊心)도 없나? 이해(理解)불가(不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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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突厥)십성(十姓)부락(部落)
○ 돌궐(突厥)은 ‘투르크’라고도 하는데, 본시(本是) 돌궐(突厥)은, 십성(十姓)부락(部落) 또는 구성(九姓)부락(部落)의 집합체(集合體)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보면 : 고구려(高句驪)가 당(唐)에 의해 와해(瓦解)된 뒤, 고구려(高句驪) 왕자(王子) ‘고문간(高文簡)’은, 돌궐(突厥)의 십성(十姓)부락(部落)으로, 도피(逃避)하여, 가한(可汗)의 사위(婿)가 되는데, 「돌궐(突厥)이 당(唐)에 내부(來附)할 때, 고문간(高文簡) 역시 함께했다.」고 전(傳)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27 현종(玄宗) 개원(開元)3년 조 : 突厥十姓降者前後萬餘帳.高麗莫離支文簡,十姓之婿也.二月,與()跌都督思泰等亦自突厥帥眾來降;制皆以河南地處之. :돌궐(突厥)십성(十姓)의 항복(降伏)한 자가 전후(前後)만여(萬餘)장(帳)이다. 고려(高麗)의 막리지(莫離支) 고문간(高文簡)은, 십성(十姓)의 사위(婿)이다. 2월에 ( )질도독 사태등과 함께 또한 돌궐(突厥) 백성들이 와 항복하였다. : 모두 하남(河南)의 땅에 머물게 하였다.》하였다.
여기서 「돌궐(突厥) 십성(十姓) 사위(婿)」라는 말은, 십성(十姓)부락 가한(可汗)의 사위(婿)였다는 말이며, 「고구려(高句驪)가 망하고 난 뒤, 돌궐(突厥) 땅에서, 고구려(高句驪) 유민(遺民)들과 함께 ‘망명(亡命)왕조(王朝)’를 수립(樹立), 막리지(莫離支)직을 수행(遂行)하며, 고구려(高句驪) 부흥(復興)활동(活動)을 했으나, 여의치 않아, 돌궐(突厥) 십성(十姓)부락의 일부(一部)가 당(唐)에 항복(降伏)할 때, 함께 한 것이다.」라고 이해(理解)하면 무리(無理)없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➊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는 “십성(十姓)부락(部落)”은, 어디에 있었을까? 21세기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설명(說明)하는 대로, 이들이 하북성(河北省) 북방(北方)지대(地帶)에 있었을까? 어림 반 푼 어찌도 없는 얘기다.
➋ 십성(十姓)부락(部落)은 ‘서(西)돌궐(突厥)’이라고 하는데, 이게 웃기는 것이, 돌궐(突厥)이면 돌궐(突厥)이지, 무슨 놈의 동(東)돌궐(突厥)은 뭐고, 서(西)돌궐(突厥)은 무엇이냐? 하는 거다.
➌ 이것은 본시(本是) 「동(東)돌궐(突厥)이 있던 곳은, 조선(朝鮮)의 땅이었으니, 조선(朝鮮)을 동쪽 반도(半島)로 밀어 넣고, 그 빈 공간에 동(東)돌궐(突厥)이란 이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라고 이해(理解)하면, 조선사(朝鮮史)의 왜곡(歪曲)실태(實態)를 알 수 있을 것이다.
➍ 돌궐(突厥) 십성(十姓)부락이 어디에 있었느냐? 「바로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 지방(地方)에 살던 자(者)들이다.」 또 소위(所謂) 「서(西)돌궐(突厥)이라고 하던 자(者)들은,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 서(西)쪽과 서북(西北)에 살던 자(者)들을, 통칭(統稱)하는 말이다.」 ‘폼’으로 하는 소리가 아닌,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요동(遼東)으로부터 반도(半島)북방(北方)에 있었다는 고구려(高句驪)가 당군(唐軍)의 공격(攻擊)을 받고 무너질 때, 그 왕족(王族)들과 유민(遺民)들이 당(唐)나라 땅을 지나, 일만(一萬)리 서(西)쪽의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지방으로 이주(移住)했다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말자. 아래의 원문(原文)기록(記錄)을 보면서 고구려(高句驪)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➎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편 : 《碎葉城在焉耆西北,近西突厥之境.唐貞觀十二年,西突厥中分其國為十部,五部居碎葉以東,五部居碎葉以西,通謂之十姓. : 쇄엽성(碎葉城)은 언기(焉耆) 서북(西北)의, 서돌궐 지경에 가깝다. 당(唐) 정관(貞觀)12년, 서(西)돌궐(突厥)가운데에서 그 나라가 나누어져 10부가 되었는데, 5부는 쇄엽(碎葉)의 동쪽에서 살았고, 5부는 쇄엽(碎葉)의 서(西)쪽에서 살았는데, 통틀어 십성(十姓)이라고 부른다. 十八年,唐滅焉耆,尋置焉耆都督府,治碎葉城.自北庭都護府渡伊麗河至碎葉界,又西行千里至碎葉城,水皆北流入磧. : 18년에, 당(唐)이 언기(焉耆)를 멸하고, 언기(焉耆)도독부(都督府)를 두고는, 쇄엽성(碎葉城)에서 다스렸다. 북정도호부에서 이려하(伊麗河)를 건너면 쇄엽(碎葉)지경에 닿고, 또 서(西)쪽으로 천리(千里)를 가면 쇄엽성(碎葉城)에 이르는데, 물은 모두 북(北)쪽으로 흘러 사막(磧)으로 들어간다. 開元二年,十姓酋長都擔叛,磧西節度使阿史那獻克碎葉等鎮,擒斬之.中略. : 개원 2년에, 십성(十姓)추장(酋長) 도담(都擔)이 배반하자, 적서(磧西)절도사(節度使) 아사나(阿史那)헌(獻)이 쇄엽(碎葉)의 여러 진(鎭)에서 이기고,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중략.》
《언기(焉耆)에서 이려하(伊麗河)를 건너, 서(西)쪽으로 일천(一千)리를 가면 쇄엽성(碎葉城)에 닿는다고 하였다. 이곳은 현(現)의 「키르기스스탄의 수도(首都)인 비슈케크」일 것이다.》
위의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것은 : 《쇄엽성(碎葉城)을 기준(基準)하여, 돌궐(突厥)의 5성(姓)은 서(西)쪽에, 다른 5성(姓)은 동(東)쪽에서 살았는데, 모두를 「돌궐(突厥) 십성(十姓)」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곳에 있던 돌궐(突厥) 십성(十姓)부락으로, 고구려(高句驪) 왕자(王子)인 “고문간(高文簡)”이 유민(遺民)들과 이주(移住)하여, 막리지(莫離支)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반도(半島) 북방(北方)에서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까지 도대체 몇 리(里)나 되겠는가? 를 생각하면 고구려(高句驪)가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와 근접(近接)해 있지 않고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누가 고구려(高句驪)를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고 만들어 놓았는가?
● 위에서 설명하는 돌궐(突厥)의 십성(十姓)부락(部落)에 대한 설명(說明)을 또 확인(確認)해 보자.
동서(同書) 돌기시국(突騎施國)편을 보면 : 《突騎施國在廢庭州西北三千餘里,西突厥別部也.中略. : 돌기시국(突騎施國)은 없어진 정주(庭州) 서북 3천 여리에 있는데, 서(西)돌궐(突厥)의 별도부락이다. 중략.【옛 정주(庭州)는 오노목제(烏魯木齊)이니, 이곳에서 서북(西北) 3 천여리라면 우랄산맥 정도가 될 것 같다.】 長安二年,突騎施烏質勒悉並西突厥地,屯碎葉西北,復攻陷碎葉,徙居之,尋復內附. : 장안2년에, 돌기시국(突騎施國)의 ‘오질륵’이 서돌궐 땅을 모조리 병합하고, 쇄엽(碎葉) 서북(西北)에 진을 치고, 다시 쇄엽(碎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주하여 사니, 다시 내부하였다. 開元二年,為突厥嘿啜所敗滅.三年,突騎施部將蘇祿鳩集餘眾復據其地,十姓部落稍歸之. : 개원 2년에, 돌궐(突厥)의 묵철(嘿啜)이 패멸(敗滅)되었다. 3년에, 돌기시(突騎施)부장(部將) 소록짐(蘇祿鴆)이 여중(餘衆)을 모아 다시 그 땅에 거하니, 십성(十姓)부락(部落)도 점점 돌아왔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역사(歷史)기록(記錄)으로 보면 :『돌궐(突厥)십성(十姓)부락(部落)은, 죽으나 사나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지방(地方)에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어떤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러한 옛 기록(記錄)을 뒤집을 근거(根據)나 증거(證據)를 갖고 있으면 가능(可能)하다.
현(現) 역사(歷史)통설(通說)은, 돌궐(突厥)이 황하(黃河)이북(以北)의 하북(河北)지방에서 활동(活動)했다는 식(式)이지만, 중요(重要)한 것은 지나가는 여정(旅程)이 아닌, 그들의 근거지(根據地)인 것이다.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 논자(論者)들은 : 이러한 주장(主張)을 뒤엎을 만한 근거(根據)나 고증(考證)이 있다면, 반전(反轉)을 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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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西域)땅에 있었던 와랄(瓦剌)과 야선(也先)
○ 와랄(瓦剌)과 야선(也先)! 여러 번에 걸쳐 우리 카페에 게재(揭載)한 내용(內容)이다. “와랄(瓦剌)”이란 자(者)들이 어디에 있었기에,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어디에 있었기에, 협박(脅迫)할 수 있었을까? 다시 한 번 복습(復習)해 보자.
➊ 명사(明史) 와랄(瓦剌)편을 보면 : 《또 사주(沙州)와 혼인으로 결속되니, 적근(赤斤)몽고(蒙古)의 여러 위(衛)와 올량합(兀良哈)을 깨뜨리고, 조선(朝鮮)을 협박(脅迫)했다.【又結婚沙州,赤斤蒙古諸衛,破兀良哈,脅朝鮮.】》고 했고,
➋ 명사(明史) 조선(朝鮮)편을 보면 : 《처음 와랄(瓦剌)의 밀령(密令)을 받은 여직(女直)의 여러 부(部)가 조선(朝鮮)을 꾀어, 중국(中國)을 배신하자고 하였으나, 도(祹)는 이를 거부하고, 이러한 사실을 조정(朝廷)에 알리자, 제(帝)가 그 충심을 기뻐하며, 칙령을 내려 칭찬하고, 채색 비단을 내렸다.【初,瓦剌密令女直諸部誘朝鮮,使背中國.祹拒之,白其事於朝.帝嘉其忠,敕獎之,並賜彩幣.】》고 하였다.
➌ 위의 기록으로 보면 : 당시(當時) 와랄(瓦剌)과 여진(女眞)=여직(女直)과 조선(朝鮮)의 땅이 서로 잇닿아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협박(脅迫)한다거나, 겁을 준다거나, 으를 수 있으려면, 서로가 가깝게 붙어있지 않고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➍ 그렇다면 “와랄(瓦剌)”이 있던 곳을 찾아보자.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역력파력(亦力把力) 편을 보면 :
《亦力把力在哈密西一千六百七十里.至肅州二千五百三十里,至京師九千三百里. : 역력파력(亦力把力)은 합밀(哈密) 1,670 리, 숙주(肅州)로부터 2,530리, 경사(京師)로부터 9,300 리 떨어져 있다. 其地東抵火州,西至撒馬兒罕,南接于闐,北連瓦剌古焉耆,龜茲二國地,居沙漠間,東西凡三千餘里,南北二千餘里. : 그 땅은 동쪽으로 화주(火州), 서(西)쪽으로는 살마아한(撒馬兒罕)에 이르고, 남(南)쪽으로 우전(于闐)과 접하고, 북(北)쪽으로는 와랄(瓦剌)과 옛 언기(焉耆)와 접(接)하는데, 구차(龜玆)의 두 나라 땅이다. 사막(沙漠)사이에서 사는데, 동서(東西)3천리, 남북(南北) 2천리이다.》라고 했는데,
이곳은 신강성(新疆省) 서쪽과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지방이며, 그곳의 북쪽에 “와랄(瓦剌)”과 접(接)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現在)의 지도(地圖)를 보면 와랄(瓦剌)은 : 「발하슈 호(湖) 북방과 준갈이(準噶爾) 서북(西北)쪽의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지방(地方)이다.」 이곳에 와랄(瓦剌)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설명하는 와랄(瓦剌)이 있었던 곳이다. 이러한 위치(位置)를 말하는 것은, 자의적(恣意的)이거나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또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해설(解說)이 아니다. 옛 기록(記錄)을 그대로 지도(地圖)를 보면서,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설명(說明)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것은 근대사(近代史)에 속할 수 없는 청사고(淸史考) 지리지(地理志) 신강(新疆)편을 봐도 알 수 있다.
○ 현재(現在)의 역사(歷史)통설(通說) : 「에센 : 인명 ; 몽골 오이라트 부족의 장(?~1454). 중앙아시아로부터 동 만주를 지배하고, 중국 명나라에 침입하여 영종을 포로로 하였으며, 후에 칸으로 즉위하였다.」는 이야기들은 재(再)고찰(考察)이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하며, 명(明)이란 나라의 정체(正體) 역시, 반드시 재(再) 연구(硏究)가 필요(必要)한 부분(部分)이다. 조선(朝鮮)황제(皇帝)의 땅에서, 누구 맘대로,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조선사(朝鮮史)를 비굴(卑屈)하게 만드는가? 역사(歷史)통설(通說)에서,「동(東)만주(滿洲)가 준갈이(準噶爾) 땅이라면 가능(可能)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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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日本書紀)로 고증(考證)하는 조선사(朝鮮史)는, 「조선인(朝鮮人)의 조선사(朝鮮史)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역사서(歷史書)로써의 가치(價値)가 없기 때문이며, 그 편찬(編纂)시기(時期), 편찬자(編纂者)등 모든 것이 의심을 지울 수 없는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왜(倭)가 기마병(騎馬兵)으로 숙신(肅愼)을 정벌(征伐)했다? 그렇다면 왜(倭)는 대륙(大陸)의 서북(西北) 땅에 있어야 한다. 열도(列島)의 왜(倭)는 21세기 현재(現在)에도 육군(陸軍)이나 기갑병(機甲兵)으로 대륙(大陸)의 서북(西北) 땅을 토벌(討伐) 할 수 없다. 하물며…수백(數百), 수천(數千)년 전(前)에의 이야기는, 만물(萬物)을 창조(創造)했다는 우리들의 영웅(英雄), 조물주(造物主) 신(神)들의 이야기로 밖에 들릴 수 없다.
○ 훌륭하신 대한민국(大韓民國) 학자(學者)님들은, 바로 신(神)들의 이야기를 창조(創造)하시는 조물주(造物主)와도 같은 동급(同級)의 재주를 지닌 분들이다. 이들을 존경(尊敬)해야 할까?
2015년 11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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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당 현종 3년에 항복한 돌궐의 백성을 하남의 땅에 머물게 하였다........... 여기서 하남은 어디죠...?
문무님과 환국고려님께 질문 드립니다.
돌궐(서돌궐?)은 중앙아시아의 서쪽과 서북쪽에 살던 자 들이다.
쇄엽성은 언기 서북쪽에 있는데 10부중 5부는 동쪽에, 나머지 5부는 서쪽에 살았다(당 정관 12년)
돌기시국이 현 우랄산맥 부근에서 동으로 서돌궐을 병합하고 쇄엽성을 함락 하였다.....
와랄은 발하슈호 북방 준갈이 서북방의 카자흐와 러시아지방에 있다......
당(唐)이 있어야할 위치는 어디인가요...?
맑은 영혼님! 안녕하세요.
게재된 글은 내용중에 설명한대로 독사방여기요 서역편과 산서편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입니다. 다만 그 위치를 현대의 지형도에 대입한 것일 뿐입니다. 돌기시국은 옛 정주에서 서북으로 3천리 떨어졌다고 했으니, 우랄산맥 정도로 설명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역사서를 보면서 느낀 점은 당니라는 중앙아세아 지방일부를 포함한 남북쪽에 있었던 나라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추정은 해국도지나 독사방여기요속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산해경이나 회남자전에서 말하는 숙신은 서북쪽에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후대의 역사서 역시 그대로라고 보여집니다. 이런 관계로 조선사를 공부할 때 아주 헷깔리게 됩니다.
지금의 천산, 총령의 카스지구 바로 동쪽에 있는 투무수커시.[중어] 도목서극시. [图木舒克市]에는, 당왕성유지석각[唐王城遗址石刻]과, 당왕성유지[唐王城遗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왕성유지석각[唐王城遗址石刻]이라고 하는 돌에는, 명문이 새겨진 것은 없고, 형상만이 남아 있습니다.
당나라 왕성이 왜 이곳에 있겠습니까 ?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당나라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마차로 실을 만큼 많지요,
이러한 기록들을 상고하여 그 지리적 위치를 고찰해 보면, 당나라는, 지금의 천산 북쪽과 발하슈호 일대, 그리고 그 서쪽과, 오늘날 카스피해의 동서남북으로 영역을 확장했던 나라였습니다.
도목서극시에 있다는 '당왕성유지석각' 이 실제 당나라의 왕성은 아니란 말씀이신지요...? 아님 당의 왕성이 있던 곳이란 말씀인지요....?
그리고 천산북쪽, 발하슈호, 카스피해일대가 당(唐)이라면 위의 문무님의 글 내용(돌궐, 돌기시국, 와랄의 강역)과 겹치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요...?
@맑은영혼 도목서극시에 대하여, 현지의 일부 사람들은 당나라의 동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당나라의 도성이 아니지요. 잘아시다시피 당의 선조는 선비와 한의 혼합 종족 입니다. 대륙사, 즉 중국사에서는 종족들의 분리를 통해서, 역사를 많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조선사를 왜곡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됩니다.
돌궐과 선비족은 역사의 기록대로 서로 인접해 있던 종족이며, 구당서나 신당서를 보더라도, 당나라가 위치하고 있던 지역의 윤곽이 들어 납니다.
강역이 겹치는 것은, 당시에 그들의 활동 영역이 겹치는 것일 뿐 입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남긴 기록들이 당시의 원본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기록들 속에는, 당나라의 위치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들 기록들속에, 유주, 성도, 촉, 교지, 남만 등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오는데, 모두 천산 북로와, 지금의 총령 서쪽 지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에 대한 역사서의 고증과, 유물 유적에 대한 고증과 증명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천산북로와 총령서쪽이 유주~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온다 하셨는데 몇가지라도 소개해 주실 수 있는지요....님의 글들속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맑은영혼 유주는, 오늘날 천산 북로와 알타이산맥의 서남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촉이라 불리우는 성도, 교지. 남만 등은, 총령의 서쪽과 카스피해의 남쪽과 이란의 동쪽 지역을 말하고 있는데, 사서와 문집, 그리고 시를 포함한 역사에 관계돤 사료를 통하여, 이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댓글로 말씀 드릴 수는 없으나, 고운집과 계원필경 속에, 남만의 종족들은 토굴을 파서 그 속에 살고 있다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토굴들은, 지금도 카스피해의 동남쪽 광활한 지역에 대부분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역사를 고증하고 즘명하는 수 많은 사료중의 하나 일 뿐 입니다.
@환국고려 지금 베트남 일대의 지역들이 남만이며, 교지라고 하는 현재의 역사 해설은, 사서에 기록된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지역이며, 조선의 전라도와 제주, 그리고 조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유구등의 역사를 지우기 위한, 역사의 거짓일 뿐 입니다.
조선의 탐라인 제주는, 대해지중이라고 하지만, 바다 가운데 있던 섬이 아닙니다.
유주는 왕조실록을 통해서도, 그 지역을 고증할 수 있으며, 남만과 교지는, 역사의 기록을 따라, 현재 남아 전해지고 있는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이를 분명하게 고증하고 증명 할 수 있습니다.
@환국고려 이들 지역에 대한 자세한 역사의 기록들은, 역사의 기록들속에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한편의 역사기록으로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중국의 중원이라고 하는 곳은, 지금의 중국 대륙의 중원이 절대 아닙니다. 조선왕조의 세종대왕도, 육진만 개척한 것이 아니고, 함길도 일대에 야인을 방비하기 위한 장성을 곳곳에 쌓는데, 이 장성들이 있는 지역은, 몽고의 아르항가이로부터, 벨루하산 동쪽의 광활한 지역에 펼쳐져 있습니다.
지금도 당시에 쌓은 장성의 대부분이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성곽 유지들이 모두 남아 있습니다. 참고가 되시리라 사료 됩니다.
환국고려님! 맑은영혼님!
날씨가 갑자기 충워지는 바람에 오늘 덜덜 떨었습니다.
별 추위아닐 것이라는 판단으로 야외에 나갔다가, 고생 엄청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이 온 것 같습니다. 조선사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두루두루 댁내 평안하시고,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