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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제2주일)
복음의 시작-“힌네 엘로헤켐”
사40:1~11; 벧후3:8~15상; 막1:1~8
우리는 오늘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대림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의식하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 의식하고 있나요? 묵상집을 읽으면서? 아님, 예전의 성탄 분위기를 회상하면서? 아님, 정신 없이 바빠서 아직 대림절까지 마음엘 두지 못하나요?
예, 좋습니다. 우리가 대림시기를 늘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주일에 대림절 예배를 드리면서라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의식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의식 있는 행동엔 어떤 낭비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생각 없이 쓴다면 분명히 낭비한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삶은 어쩌면 낭비하는 삶일지 모릅니다. 다 살아내지 못한 삶일테니까요. 우리가 우리 삶의 질을 분명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의식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질은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속에서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 경험엔 심지어 고통이나 슬픔도 들어있습니다. 늘 드리는 말이지만, 우리가 얼마나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지금 여기를 사는가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너무 예민하게 강박적으로 느끼라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하는 삶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는 삶이지만 예민하고 강박적이지는 않습니다. 의식하는 삶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예민하게 느끼는 자의식이가기 보다는 내 삶을 허용해주는 너그러움이 더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허용해 주는 너그러움”은 내 삶의 진정한 주인 되시는, 바탕이 되시고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자비(긍휼, 연민)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룬 것, 자신의 손 안에 잡고 있는 것으로 삶의 근거를 삼으려고 하면, “자신의 삶을 허용해주는 너그러움”은 좀처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로 자신의 삶이 받아들여졌음을 알아차릴 때만 경험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없이 내가 이룬 것으로 내 삶의 근거를 삼으려고 한다면, 늘 비교와 경쟁에 시달릴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행동의 동기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강박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이 대림시기이긴 하지만, 한 해가 끝나는 세밑이기도 합니다. 올 해도 20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세밑의 기분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내가 뭘 성취했는가도 중요하겠지만, 올 한 해 내가 무엇을 겪어냈는가는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루하루, 아니 순간순간 힘들게 겪어낸 삶을, 힘들게 살아낸 삶을 도매금으로 값싸게 넘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겪어낸 삶은 수나 양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질로만 결정됩니다. 여러분이 하루하루 순간순간 겪어낸 삶은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이루어진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후서에서 보면,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혹은, 모든 것은 타버릴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날에”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는 때가 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루었다고, 우리가 성취했다고, 각자가 손에 자랑스럽게 들고 있는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는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는 날에 다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베드로후서는, 그래서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는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이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저는 이것을 “도덕적인 삶이나 청교도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날에도 불타버리지 않는 삶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하며 살아낸 바로 그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삶”입니다. 거기엔 “내 삶이 자비를 입은 삶이구나”, “내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이 동반됩니다. 비록 내가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내가 경험하고 살아낸 삶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과, 지금 내가 그 자비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타 없어져도, 세상의 원소들이 불로 다 타 없어져도, 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3장에서 말했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거기서 바울이 뭐하고 하냐면, 자신을 집을 짓는 건축가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각각의 사람들도 건축가로서 집을 짓습니다. 각자가 어떤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어떻게 지어진 집인지는 불에 타고 남는 것이 뭐가 있는지를 보면 안다는 것이지요.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줄 것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고전3:13)
여러분, 불에 타고 나서도 남는 것만이 남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은 화려하고 번지르르 할지 모르지만, 모두 불에 타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겉에서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불에서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삶에서 타지 않고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좀더 가깝게 느끼려고 한다면, 지금 내가 내 삶을 끝내는 시간이 되었다고 칩시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것 때문에 내 삶이 괜찮았구나. 이것 경험하러 왔었구나.” 하는 바로 “이것”이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그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받아들여진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나머지를 모두 분토처럼 여길 수 있게 된 삶”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런 삶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순간순간이, 마치 마지막 날을 사는 삶처럼, 거침없고 자유로왔으면 좋겠습니다. 가볍고 담백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대림시기에 우리 기다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의 의미는 우리에게 3중으로 다가옵니다.
첫째는 2천년 전 팔레스틴 한 식민지, 일종의 포로생활에 시달리던 백성들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의 오심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가지시고, 이 세상 역사에 들어오셨습니다.(우리는 이것이 성육신 혹은 육화, 강생,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현실의 삶 속에서 포로생활 못지않게 늘 두려움과 불안,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갑니다. 요즘 직장인들이 바로 포로나 아니면 현대식으로 말하면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아침이면 일어나서 눈 부비고 일터로 가서 눈치 보며 일하다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일하는 로봇입니다. 주인은 누구일까요? 일터의 사장일까요? 현대사회의 이런 구조일까요? 아님,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포로로 잡아놓고 착취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천년 전 유다의 현실은 이보다 더 비참했는지 모릅니다. 구원자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노래하며 외치던 백성들이 기다렸던 메시야가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대림시기에 우리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백성들의 현실처럼 비참하고 고통스런 현실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오심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 기다림은, 세상 마지막 날, 종말의 때에 심판의 주로 오시는 주님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파루시아, 즉 재림이라고 합니다.) 대림절 교회력 말씀에는 재림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등불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와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르니까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라는 말씀이 강조됩니다. 초대교회는 이 재림을 머지않아 있을 임박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았던 베드로후서3장도 이것을 말하고 있지요. “그날에는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날이 꼭 세상이 끝나는 그날만을 의미하겠습니까? 물론 그 종말의 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날은 오겠지요. 이 지구가 영원하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러나 그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 수 없고, 사실, 그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우리의 마지막 날이고, 그보다 더 가까이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이 자리가 아닐까요? 사실은 우리는 우리가 죽음을 통해 심판의 불을 통과하게 될 것이고, 지금 매 순간을 통해 우리의 삶의 든든함을 시험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세 번째 의미는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는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성육신된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림의 영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겠지요. 좀 어렵게 들릴 수 있겠지만, 진정한 성탄은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는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14세기의 독일의 유명한 신비가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말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탄생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참된 본성”이며 “참 자기”인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희가 다시(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했을 때, 바로 그 태어남(탄생)입니다. 그래서 대림은 2천 년 전 예수님의 탄생만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올 재림만이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는 그리스도의 탄생, 우리 안에서 성육신된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의미는 서로 모순되거나 배치되지 않습니다. 대림의 이 세 가지 의미는 우리 안에서 다같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 동일한 결과를 빚어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하나님의 한 없는 은총 가운데 있는 “복 받은 삶”이라는 깊은 인식입니다. 우리의 업적과 성취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삶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내밀하게 자라는 “하나님 나라”, “복음”, “비밀”을 우리가 간직하고 있다는 깊은 깨달음 때문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바탕으로, 우리의 원천으로, 영원히 서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깊은 곳에서 “이제 포로생활이 끝이 났다, 이제 복역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을 모두 받았다”라는 위로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오늘 마가가 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아르케 투 유앙겔리우 예수 크리스투 휘우 데우)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아직 잘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미 여러분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에 관한 책 전체를 “복음”(기쁜소식)이라고 부른 첫 번째 사람입니다.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본디 황제가 죄수를 사면을 해서 복역이 끝났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서 복음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복음은 “이제 포로생활이 끝이 났다, 이제 복역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을 모두 받았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곧 축복입니다. 우리는 변형되어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 그 시작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시간들을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은 자신의 고통스런 현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자신을 억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비록 고통스런 현실이지만, 그 고통스런 현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쩌지 못한 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고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이미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리치의 줄리안이 본 것처럼, 우리의 영과 육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래서 “비록 우리에게 죄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라”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래 전에 이사야가 받았던 소명이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라. 여기에 너희 하나님이 계신다.(힌네 엘로헤켐)(개역: 너희 하나님을 보라)”
그 소명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소명을 받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목소리를 힘껏 높여 세상에 외칠, 무엇보다도 자신 스스로에게 외칠 소명이 있습니다. “힌네 엘로헤켐” 여기에 너희 하나님이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