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3;12-17. 사랑의 띠인 키즈나. 2024. 10. 5.
오늘 골로새서 3;12-17절의 말씀은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용납과 용서 그리고 사랑의 내용인데 이것을 사랑의 띠라고 합니다. 왜요? 신앙인이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지켜야 할 8가지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8가지 덕목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우리들의 삶 속에서 늘 부족했습니다. 말씀은 요구하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나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긍휼. 그리고 친절한 마음인 자비를 온전하게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십자가의 겸손과 능력과 힘은 있으나 사용하지 않는 예수님의 온유와 돌아 올 때까지 오래 참는 인내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마음인 용납이 부족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듯 용서하는 마음과 베푸셨던 사랑이 쉬울 것 같은데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먼저 나에게 친절해주길 바랐습니다. 겸손해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때로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 속에 살았으며, 부드러움을 가장한 무관심으로 살아왔고, 결코 오래참지 못했으며, 오해하고 미워하며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해서 사랑의 띠를 깨닫게 되고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가슴이 조여 올 때 주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가득차고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의 띠로 얻은 그 평강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인이 무엇입니까? 크리스천이라는 신앙인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내가 있다고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 아래에 내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사람! 그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생의 의미를 찾는 신앙인입니다. 자신의 선과 자신의 의와 자신의 뜻과 존재까지도 예수님의 심령 안에 있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요?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그 자체와 그 본질이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로부터 왔나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성격과 그 본질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고 만들어지고 되어져서 존재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진 망대에 필요한 것은 사랑의 띠, 키즈나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여러분,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용납, 용서와 사랑은 내 자신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키즈나도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을 통해서 신앙인은 무엇을 알고 얻게 무엇을 해야 됩니까?
1. 고난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람의 관심은 각자의 생각과 미래와 목적에 따라 다 다릅니다. 같은 국가와 같은 민족일지라도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불황의 관심은 성장이며 살아남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관심은 살아남는 것과 승리입니다. 그렇다면 이시대의 관심은 무엇인가요? 왜 관심이 중요한가요? 이 관심사가 무엇이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관심사는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면 고통과 아픔과 없음에서의 관심은 무엇인가요?
1-1. 무엇보다도 어떤 성과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현실을 보면서, 결과물들이 한 순간임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결단하고 결심하고 회개하고 각종 활동에 동참하고 지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흔들면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우리의 안전과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유지됩니다. 창세기 9장에 바벨탑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바벨탑은 원래 하늘의 못인데 나중에는 혼잡하다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창9;1절에 당시에 언어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2절에 동방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정착을 했습니다. 시날 평지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비옥한 바벨론 지역입니다.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났던 사람들의 눈에 딱 들어왔습니다. 3절에 그들은 벽돌을 만들어서 성과 대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바벨론 지역에는 돌이 많지 않았고, 대신 점토인 진흙이 많아서 벽돌을 구워서 건축에 이용했습니다. 4절에 성과 대라는 표현은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세우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원문은 도시가 초점이 아니라 탑이 초점이었습니다. 도시를 건설하고 특별히 탑을 세우자는 뜻입니다. 하늘에 닿을 때까지 중단하지 않고 끊임없이 쌓자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닿을 때까지 탑을 세우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둘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뜻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소명을 주시고 떠나게 하시면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을 요구했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남은 8명의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말씀이고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한 충만을 위하여 흩어지라고 하시는데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절대 못 흩어지겠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살겠다는 불순종의 합작품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싫어하셨을까요? 탑을 높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탑을 높게 쌓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입니다. 그런데요. 쌓아 올린 업적이 얼마나 힘이 없는지요. 얼마나 쉽게 가라앉는지요? 알고 깨닫고, 기억하며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러분, 깨어있지 않으면 물리적 세계의 배후에서 일어나는 영적 세계의 실상을 전혀 감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위기의식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유익이 되는 것은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이고,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의 바벨탑은 한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1-2. 고통과 비바람으로 부터 얻는 유익은 어떠한 경우에든지 안전입니다. 생명의 안전은 무엇보다도 우선합니다. 영혼의 귀중합니다. 생명과 안전 없는 바벨탑은 무너진 망대가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얻은 또 하나는 불안의 극대화된 통계와 예측입니다. 일본에서는 지진에 대한 공포가 높습니다. 서 일본 대지진을 비롯해 수도권 직하(直下)지진, 후지 산 폭발 위험 등 각종 대지진에 대한 잇단 경고가 있습니다. 지진 예측과 대책을 검토하고 있는 중앙방재회의와 내각 부 작업팀은 서일본인 관서 지역과 남부지역을 끼고 있는 남해 해구에서 거대 지진이 발생할 경우 리히터 규모, 최대9.1로 상정했습니다. 이 경우 리히터 규모 7 이상의 충격이 10개현에, 규모 6 이상의 충격이21개 부, 현(府縣)에 미칠 것으로 예측을 됐습니다. 높이 20m 이상의 쓰나미가 예상되는 지역은 8개 도, 현(都縣)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고 쓰나미는 고치현 구로시오초(町)에서 최대 34m로 전망을 했습니다. 최악의 경우 쓰나미로 23만명, 건물 붕괴로 8만2000명, 화재 등으로 1만 1000명, 모두 32만 3000명, 부상자는 62만 3000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경제적 손실은 직접 피해액이 40조∼50조 엔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까이 지진 판에 대하여 집중 설명하다가 사재기로 쌀이 부족했습니다. 이처럼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불안이 증폭이 되고 걱정거리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가운데 있는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하며, 무너진 망대를 바라만 보고, 무너질 망대 앞에서 주저앉아야 됩니까? 그런데 주님은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주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 안에서는 평안과 위로와 함께 안전이 있습니다.
1-3.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통하여 얻은 세 번째는 사명의식입니다. 후쿠시마원전을 지키는 사람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명감으로 일을 합니다. 매일 평균 3천여명의 근로자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조차 나지 않는 방사능과의 사투를 벌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J빌리지에 있는 가지마(鹿島) 건설 공사과장, 고바야시 히로시게(小林弘茂·45)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천μ㏜(마이크로시버트)가 측정되는 원자로(제3호기) 내 건물 잔해를 원격 조종을 통해 처리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는 두둑한 위험수당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사명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인 특유의 공동체 의식과 사회에 대한 책임과 충성입니다. 원전사고 직후부터 현장에서 근무한 고바야시는 사고 수습 초기 원자로 냉각에 필요한 물을 날랐던 기억을 떠올리며 운반하는 물의 양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 일이라고 했습니다. 히타치(日立) 플랜트테크놀로지에서 일하는 히라야마 준(平山淳·43)씨는 제4호기 원자로 건물 내부의 핵 연료봉을 건물 밖 저장 수조로 안전하게 빼내는 작업이었는데, 그는 스스로 이 일을 택했으며, 인센티브가 없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사명감과 사명의식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인생이 예수님을 판단하지만, 훗날에는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판단합니다. 고난과 고통과 아픔 앞에서 피하는 사람이 있고 사명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어떻습니까?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무너진 망대를 수축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성령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풍성한 찬양과 말씀과 은혜가 전달이 되고, 구원받는 기쁨의 삶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다시 회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의 사역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 시대와 이 고난에 대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관심입니다. 무엇에든지 말에나 일에나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 거기에 응답이 있습니다.
2. 그러면 고난과 고통과 아픔 앞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무엇인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세계의 통치가 하나님으로부터 임합니다. 그렇기 때문 일본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것은 우연은 없고 섭리만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더 큰 망대가 무너지는 사건과 더 놀라운 고난과 고통은 증가할 것입니다. 왜요? 이 때가 재난의 시작이고 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죽고 망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 살았으니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과 망함은 죄 값입니까? 여러분, 정죄나 비난보다 예수님은 인애를 원하십니다. 신앙적 비판이나 정죄를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납과 용서의 사랑의 띠를 매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슬픔에 동참하고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키즈나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번제보다 인애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보여 진 말씀을 나를 향한 멧세지로 들어야 합니다. 바벨탑의 이야기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경건이고 이 모습이 하나님을 의식한 모습이며 말씀을 온전하게 받은 모습입니다.
2-1. 하나님의 통치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시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잠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잠11:20.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의이며 생명입니다. 그러나 불신은 악이며 사망입니다. 경외와 불신앙으로 다스리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에 대해서 오래 참으십니다. 공의로만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오래 참으심입니다. 여호와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악을 기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이 그 사람과 그 민족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회개하는 자를 즉시 사유하십니다. 시130:3~4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 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던 것도 사유하심 까닭입니다. 죄를 사유뿐만 아니라 의롭다고 까지 하십니다.
2-2. 하나님의 통치가운데 또 하나는 재난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 매뉴얼은 나오는 것입니다. 마24:16-24.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말세의 재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구체적인 피난 매뉴얼입니다. 영적인 의미입니다만 일단은 떠나라! 이사야52;11.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여러분, 정결함이 생명인 진정한 영적 신앙인이라면 거룩함을 훼방하는 그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노아가족은 마을사람들을 떠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안고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롯도 진노의 소돔 땅을 떠났습니다.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남으로 아브라함을 통한 인류구원의 대장정은 시작되었습니다. 떠났습니다.
2-3. 일단은 도망하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유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종교적인 중심입니다. 그런데 머물지 말아야할 곳으로 특정이 되었습니다. 산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거룩함과 온전함의 목표인 상징이지만 위험으로부터의 피난이 가능한 처소로서의 상징성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생명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하여 도망가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삼상19;10사울이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였다. 다윗이 사울 앞에서 피하였으므로, 창만 벽에 박혔다. 다윗은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12절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 행9;25에 바울 사도도 복음 전하다가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리니라. 결정적인 때가 되기 전에 도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질과 사내다움? 굵고 짧게? 멋져 보이는 구호보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더 영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가 되면 오히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죽으러 들어가게 됩니다.
2-4. 일단은 숨으라! 이사야26;20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노아가족은 방주로 들어가서 숨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그늘 아래 숨겨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감추어진 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다락방기도처에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마24;22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하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권념하십니다. 숨는 날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비와 긍휼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나오게 되고 드러납니다.
3. 재난 가운데 새로운 부흥을 준비하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피하고 도망하고 숨어 있는 날이 지난 후에는 무슨 일이 났습니까? 하나님이 새로운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노아를 통해 다시 정결한 자손의 번성이, 다윗을 통해 새로운 메시야왕국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이, 바울을 통해 복음의 진리가 부흥을 만났습니다. 사사기 패턴을 못 벗어나는 인간들은 중간 중간 흔들어줘야 정신 차립니다. 9.11사태 이후에 미국은 옷깃을 여몄습니다. 교회들이 새로운 부흥의 분위기를 살짝 보이는 듯합니다. 많은 교회가 성령의 음성에 마음을 엽니다. 흔들림은 성령으로 준비된 자들에 의해 부흥의 시대로 들어갑니다. 징계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징계는 대청소와 같습니다. 쓸려가야 할 것들이 쓸려가고 난 후엔 진정으로 진리의 굳건한 토대를 유지하고 있는 안전한 처소로 사람들이 몰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과 함께 동행을 해야 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야기 하나 합니다. 골프에서 함께 공을 치는 네(4) 사람을 한 팀이나, 한 조라고 하지 않고 同伴者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5시간 이상을 함께 가야하고, 공감해야 하고 한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同伴者와 함께 할 때, 훨씬 더 편하고 즐겁습니다. 심판이 없는 골프는 예절과 공정이 몸에 배인 同伴者가 중요합니다.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퀴즈를 냈습니다.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응모에 나섰는데, 수많은 競爭者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답안은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희로애락이 많이 있습니다. 폭풍우 속에서 비바람을 헤치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진눈깨비 휘날리고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여정이 행복과 즐거움의 여정이 되려면 가족과 친구와 동료, 특히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과 같은 同伴者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랍어 RAFIK라는 단어는 먼 길을 함께 가야 할 同伴者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 길을 함께 가야할 동반자입니다. 상호 간에 공감이 가는 사람, 함께 느낄 수 있고,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樂聖 베토벤의 成功뒤에는 이런 共感의 同伴者가 있었는데, 어머니이었습니다. 천둥 치는 어느 날, 소년 베토벤이 마당에서 혼자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뭇잎에 스치는 비와 바람의 교향곡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아들에게 집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함께 비를 맞으며 그래,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어보자! 말했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새소리가 들려요. 어떤 새인가요? 왜 울고 있어요? 暴雨처럼 쏟아지는 아들의 質問에 어머니는 多情하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同伴者를 원합니다. 여러분, 홀로 휘몰아치는 비를 맞는 상대에게 다가가 함께 비를 맞아 주는 라피끄, Rafik, 이런 靈魂의 同伴者가 부쩍 그리운 世上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할 때가 있고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무너진 망대에 키즈나, 사랑의 띠가 있으면 새로운 부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행과 사랑으로 새로운 부흥을 준비하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