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몽고반점이 있고, 전 세계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과 몽골이 국기에 태극 문양을 사용한다.
우리 역사책에서만 존재하는 온달장군과 을지문덕의 성이
몽골에 '온다르'와 '을치'로 남아 있다.
그리고 유튜버 김정민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삼국사기의 고구려
개기일식 기록을 미우주항공연구소인 NASA 프로그램으로 재현해 보면,
그 위치가 울란바토르 부근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출처:blog.naver.com/neomgl/221442358258
몽골은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이다.
칭기즈칸의 선조는 발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다.
고구려=모쿠리=몽골=무굴제국(인도)=말갈
고구려 온달장군의 이름은 몽골계 부리야트족.부여의 후손.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대전에 을지 대학교도 있던뎅..을지 군사훈련도 있고..
서울에 을지로 도로 이름이 있당~~
올지에 거주하는 카자흐 인들의 수는 8만 7천 여 명이며, 이는 바얀 올지
인구의 88.7%,
몽골 전체 인구(약 11만 명)의 4%에 해당한다.
신문기사
장로회신학대 대학원생 을지 자르갈씨 "한국서 받은 사랑 몽골...
을지트므르칸 또는 울제이 테무르칸은 북원의
대칸(재위:1400년–1412년)이었다.
분야시리(本雅失里)는 엘베크칸의 아들이었다.
울제이 테무르칸은 그의 형 군트므르칸을 계승되었다.
삼국사기 문헌에 나타난 기록상으로는 고구려에는 이러한 성씨들이 있다.
고씨(高)
극씨(克)
소실씨(少室)
중실씨(仲室)
송씨(松)
락씨(絡)
대실씨(大室)
이상은 고구려 초기에 나타나는 성씨
목씨(穆)
명임씨(明任)
우씨(于)
좌씨(左)
연씨(椽)
을지씨(乙支)
천씨(泉)
연씨(淵)
예씨(禮)
고구려 후기에 나타나는 성씨
을지문덕乙支文德
고구려의 대신
을지문덕3
고구려 영양왕 23년, 중국의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살수대첩과 그
지휘관 을지문덕이 있었다.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에서 전부 몰살시켜 강대했던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대영웅.
살수는 투르크어로 사르수 노란 강 즉 황하강을 뜻한다.
몽골에 올지 라는 성이 많이 있다.
울지 올지 을지
올지는 을지와 같으며 당시 구개음화는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을디 가 당시음에 가깝다.
몽골어로 `을지'란 불로초를 상징하는 문양을 뜻하며,
장수·오래 사귐·영원함 등의 뜻도 담겨 있다고 한다.
몽골어
ҮҮРД 오래다 old
1. 영원히2. 영구히
발음 [ 우르드 ]
文문은 일본어에서
文
음독
ぶん분·もん몬 으로 발음된다.
文字문자일때는 모지 라고 읽는다.
문덕은 몽골어로
мундаг[문득] : 엄청난, 굉장한, 훌륭한
a를 으 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고향 - нутаг 노특
МУНДАГ
1. 우수한2. 아주 큰
발음 [ 몬닥 ] 文德문덕
1. 형용사 우수한, 탁월한, 뛰어난.
2. 형용사 아주 큰, 상당한.
[ 고구려성 1천년의 전설 현실로/한·몽조사단 다리강가 성터 발굴 ]
연 재 명: 한국일보
등 록 일: 940829 21면(문화)
◎ 축성공법 백제·고구려 혼합형/적벽돌·기와 등 선조손길 확인/적석총은 중국 집안 발견유적과 유사/우리문화 몽골전파 연구에도 큰 도움
몽골 수흐바타르도(아이막) 다리강가 지역에서 발굴된 고구려 성터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은 고구려의 영토가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베이얼호 근처의 광대한 초원지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이번 발굴은 다리강가 주민들 사이에서 1천년동안 떠돌던 고구려성터의 전설을 한국과 몽골의 고고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발굴함으로써 더욱 의미가 깊다.
발굴현장인 다리강가군(솜)은 몽골에서도 목초의 질이 좋아 고대부터 정착민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으며, 몽골 고고학자와 주민들이 모두 『고려성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곳이다.
몽골 고고학 및 역사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헨 페를레가 1961년에 출간한 「몽골인민공화국 고중세 성읍지약사」중의 『다리강가 지역에 건물벽돌이 많이 출토되고 엣 건축물 흔적이 있는데,고려성 자리로 보인다』고 적은 기록은 이 지역 사람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이같은 조사기록과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발굴된 유적·유물은 성의 지반을 다진 흔적과 주춧돌, 적색벽돌, 적색기와, 돌을 장방형으로 쌓아 만든 적석총 등 10여점이다.성터의 경우 건물과 성벽이 모두 무너져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군데 군데 작은 둔덕을 형성하고 있어 주변지역과는 확실히 구분되었다. 또 성터 안쪽으로는 주변에서는 찾기 힘든 돌들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있다.
조사단은 성터의 중심과 성벽으로 보이는 세 곳을 선정하여 가로 2와 세로 5정도의 넓이로 계단식으로 발굴한 결과 3∼4개의 지층으로 형성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손보기 한몽공동학술조사단 단장은 『이 지역은 몽골초원, 만주, 중국중원을 연결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인 만큼 고대부터 각 국간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성을 증축했고, 각 지층은 해당시기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록과 증언에 의하면 맨 위층이 원나라때 구축된 것이며, 그 아래는 시기적으로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맨 아래층은 성을 쌓는 공법이 백제계의 판축(판자를 측면에 대고 성을 쌓는 방법)과 고구려계의 석축(판축외면에 돌을 쌓고 자갈로 다지는 방법)이 혼합된 형태로 보여 고구려와의 관련이 깊다』고 밝혔다.
더욱이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배수를 고려한 형태로 만들어져 그 제작시기를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는 것이다. 또 성터 지반의 아래층에서 출토된 붉은 벽돌과 기와는 고구려 건축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고구려 유적의 증거로 보고 있다.
성터 안쪽에서 둥그런 봉분형태로 발견된 적석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3∼4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흔적이 뚜렷하여 중국 길림성 집안일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고구려 무덤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특히 적석총에 사용된 돌의 형태와 흙의 사용여부에 따라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다리강가의 경우 흙을 사용하지 않고 모난 돌로 무덤벽을 쌓은 형태이므로 BC2∼AD1세기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조사단의 학술대표로서 2년전부터 다리강가 지역의 전설과 설화를 수집한 주채혁교수(강원대)는 『동몽골 지역과 우리나라는 기원설화, 건국설화, 민속 등이 매우 흡사하여 고대부터 깊은 관련을 지닐 것으로 보았다. 이번 조사과정에서 고려인의 후예가 발굴하러 왔다는 말에 무척 놀라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이 지역이 고구려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유적과 유물의 발굴로 잃어버린 역사를 찾게 되었다』고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손단장은 『이번 발굴은 전체 유적 중 일부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활동내용의 전모를 밝힐 수는 없지만, 고구려인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벽이 무너질 우려가 있어 발굴을 중단한 적석총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이 곳이 고구려 성터임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보완해 나갈 계획』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학계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인 이 지역이 고구려와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을 매우 놀라운 일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미발굴지역의 집중적인 조사로 체계적인 정리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윤내현교수(단국대)는 『이번 유적 발굴지역은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었던 곳으로 밝혀진 흑룡강 상류로부터 약 2백 떨어진 곳이다. 지금까지 고구려땅으로 추측했던 이 지역에서 유적발굴로 고구려 영토확장 만이 아니라 우리문화가 몽골지역에 전파된 경로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다리강가(몽골)=최진환특파원】
출처:blog.daum.net/truekorean/8144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