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落照) 저녁 햇빛
落照吐紅掛碧山(낙조토홍괘벽산)-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빛을 토하고
寒鴉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찬 하늘에 까마귀는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지노라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나루터를 묻는 길손은 말채찍이 급하고
尋寺歸僧杖不閒(심사귀승장불한)-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도 바쁘구나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풀밭에 풀어놓은 소 그림자는 길기만 하고
望夫臺上妾低髮(망부대상첩저발)-누대에서 남편 기다리는 아내의 그림자는 나지막하다
蒼煙古木溪南路(창연고목계남로)-푸른 연기에 싸인 고목 계곡의 남쪽 길에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단발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박문수(朴文秀)
아래 사진은 27년 전에 어사 박문수 묘지 답사 사진이다.
지금은 묘역의 조경(造景)이 잘 조성되어 한결 어사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고 있다.
어사 박문수는 천안시 북면 은지리 44에서 태어났다.
조선 영조 때의 공신으로 호는 기은(耆隱)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1723년에 제20대 경종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729년 제21대 영조5년 영남절도사로 있을 때 함경도지방의 수재민을 구호하여 그로 인해 함흥(咸興) 만세교 옆에 북민비(北民碑)라는 송덕비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그의 묘는 천안에서 목천 독립기념관 입구를 거쳐 병천 쪽을 가다 보면 북면 상동2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박씨 종중재실이 있고 박문수어사의 묘소는 종중재실에서 뒷길을 따라 올라가 은석산의 높은 꼭대기에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박재삼 후손의 소유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위의 한시는 박문수가 장원 급제에 지은 시제(詩題)의 한시다.
마지막 절구인 〈단발초동농적환(短髮樵童弄笛還)-단발머리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가 바로 시관(試官)들을 감동케하여 장원을 하게 된 내용이다.
이시에 얽혀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상경하던 중 과천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막 잠이 들었을 때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다.
과거보러 간다고 하자 노인이 말하기를
〈이런 정신 나간 사람 봤나 과거는 이틀 전에 끝났어〉라고 말한다.
깜짝 놀란 박문수가 그럼 시험제목이 무엇이더냐고 물었다.
노인은 제목이 낙조(落照)라고 하였다면서 위의 시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자기가 잊어버렸다고 말 하고는 떠나 버렸다
과거장에서 박문수는 마지막 7자를 만들어 넣었다고 한다.
어사 박문수가 병천 지방에 머물고 있을 때 유명한 지관(地官)이 있었다.
박문수는 자기가 죽으면 묻힐 묘 자리 하나를 부탁하였다.
지관은 북면의 은석산 중턱에 〈장군이 진영에 자리 잡고 앉은 형〉인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을 지정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곳은 명당(明堂)이라고 하였지만 장군만 앉아 있을 뿐 병졸이 없는 형세였다.
박문수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묘 아래에 장터를 만들었다.
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기 때문에 시장사람들을 군사 역할로 대신한 것이다.
이곳이 3·1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명한 아우내 장터가 있다.
요즘엔 병천 순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시장을 만든 후로 후손이 복(福)을 받고 융성하였는데 일제 강점기에 시장이 비좁다는 핑계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고령 박씨들은 일본 주재소로 가 반대 농성을 벌였다.
시장이 박문수 무덤 시야(視野)에서 사라지면 후손들에게 복이 끊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재 흑성산 아래 독립기념관은 박문수 묘와 관련 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조 때 박문수가 66세로 죽자 묘소를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정했다.
이때 어느 유명한 지관이 〈이곳은 200∼300년 후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니 동쪽에 묘를 쓰라〉고 권했다는 것.
이에 따라 박문수 묘소는 지금의 북면 은석산에 자리 잡았다.
그가 죽은 지 227년 후인 1983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이 들어섰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는 흑성산(黑城山519m)이 있다.
이산의 원래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었는데 일제가 일본식으로 흑성산(黑城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흑성산은 풍수지리상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길지(吉地)라 하였다.
이 때문인지 산을 중심으로 김시민, 박문수, 이동영, 유관순, 이범석, 조병옥, 등 많은 구국열사가 배출됐다.
박문수는 조정 내직(內職)의 재상(宰相)이였는데 암행어사로 더 유명하다.
영조실록에서 박문수는 영조 앞에 바른 말로 국정을 논하는 유능한 재상이었다.
일예로 영조가 재위 20년째 되는 해에 〈당파를 짓는 무신(武臣)의 머리를 모조리 베어 궐문에 매달겠다〉며 강경책을 쓸 때, 박문수는 왕 앞에 나아가 면류관(冕旒冠)의 경계(警戒)를 상기 시켰다.
즉 왕이 쓰는 면류관 앞에 늘어뜨린 12줄에 유(旒)라는 구슬이 12개가 꿰어있다.
구슬을 꿰는 끈을 굉(紘)이라고 하는데 그줄 끝에도 작은 구슬을 단다.
이 구슬들은 그냥 장식품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면류관은 움직일 때 구슬이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임금은 가까운 측근들이 하는 말만 믿고 국사를 행하면, 나라 망칠 위험이 크다〉
이 면류관의 소리는 가까운 측근들과 간신들의 소리를 막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의 만백성의 민심을 잘 살핀 후에, 국사를 신중히 처리하라는 훈계를 주는 의미이다.
박문수는 영조 왕에게 작은 일에 너무 개입하여 큰일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건의한 것이다.
박문수의 간언(諫言)을 들은 영조는 안색을 고치면서
〈경의 말은 참으로 나의 약석(藥石)〉이라면서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고 한다.
이처럼 박문수는 영조의 측근에서 바른말 하는 재상이었지만
이야기로 전하는 구전설화집(口傳說話集)인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에 기록된 그의 모습은 서민의 고통을 귀담아듣고 백성의 억울함과 부조리한 사정을 극적으로 타개하는 구세주와 같은 조선 최고의 암행어사였다.
흥미로운 점은 “구비문학대계”에 어사 박문수 이야기가 200여 개 수록되어 있어 전국 어디든 “팔도어사”로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실제로 어사로 파견된 것은 딱 두 번인 영조 재위 3년째인 1727년 9월과 재위 7년째인 1731년 12월에 경상도와 충청도 암행어사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유명한 암행어사로 이름이 전하고 있을까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문집인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는
박문수를 두고 종적을 잘 감추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가난한 선비로 변장하고 마을 곳곳을 다니면서
수령들의 불법적인 수탈과 악행들 낱낱이 고발하고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대구판관윤숙 인품불칭 전불해사(大邱判官尹潚 人品不稱 全不解事)”
〈대구 판관 윤숙은 인품과 관직이 걸맞지 않고 전혀 일을 모르며〉
“울산부사이만유 혼불성사 이연위간(蔚山府使李萬維 昏不成事 吏緣爲奸)”
〈울산부사 이만유는 어리석어 일을 살피지 못하니 아전들이 그것을 빌미로 간사함을 부리고 있다.〉 고 하여 모두 파직 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실록 1728년 3월 11일
박문수는 권력큰 세력의 편에 서지 않고 영조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면서 약한 백성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요즘 끗빨좋은 권력자들이 자기의 처세(處世)를 돌아보고 본받을 일이다.
반대로 박문수를 참소(讒訴)하는 기록도 있다.
김양택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에
〈위로 임금의 신임으로 벼슬을 얻어서 못할 짓을 하는 자가 조정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원경하와 박문수입니다〉
(영조실록 권65 23년 3월초)
박문수가 죽자 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썼다
〈그가 오광운의 무리와 함께 조정에서 탕평책(蕩平策)을 주장하여 동료 관리와 벗들이 모두 수치로 여겨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영조실록 권 97 47년 5월조)
이것은 당파에 의한 편파적인 기록임을 두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청렴한 박문수는 같은 당파 내에서도 시기와 미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그를 헐뜯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헐뜯는 자들을 억눌렀다. 영조는 원경하와 박문수를 세손(世孫뒤에 정조)의 사부(師父)로 삼아 다음 왕을 이을 세손을 가르치게 했다. 신변이 위태로운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왕의나라 신하의 나라 이이화 저)
박문수가 66세로 생을 마감 하였을 때 영조실록을 편찬한 노론마저도 박문수를 인정하는 기록을 남긴다.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라고 영조는 술회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앞에 청렴하고 공평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국회의원은 “면책특권”을 핑계로 법을 우습게 여기고
사법부는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인상을 주는 현실이다.
역사속의 어사 박문수나 맹사성 황희 같은 인물을 떠올리는 것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허울 좋은 민주주의의 대의정치보다 백성을 근본으로 한 선인들의 민본사상(民本思想)인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에 대한 향수(鄕愁) 때문이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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