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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1월29일(금)맑음
요가. 연경보살이 새 친구를 모셔오다. 점심 공양하고 선학산 포행하다.
<선의 씨앗을 가꾸고 길러서 세상을 밝게 하리라>
자기안의 선의와 온정, 기쁨과 밝음-선의 씨앗을 발견한다.
그 밝음의 씨앗에 물을 주고 가꾸어 기른다.
자기안의 악의와 몰인정, 고통과 어둠-불선의 씨앗을 발견한다.
그 어둠의 씨앗에 물주기를 그만두고 말려서 태운다.
꽃 피어나는 나의 밝음을 이웃과 세상으로 비추어 펼친다.
이웃과 세상의 어둠을 내가 받아드려 끌어안는다.
내가 빛이 되어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리라.
내가 세상의 고통을 감당하고 품으리라.
<나와 남 바꾸기 自他相換>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해주라
남이 주는 나쁜 선물 받으면 좋게 바꾸어
내게 생겨난 좋은 선물 모두 남에게 주라
이웃과 세상에 깃든 악의 씨앗을 모두 들이쉬면서
내가 세상의 어둠과 고통을 감싸 안는다고 상상한다.
내 가슴은 악을 선으로, 어둠을 밝음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금빛 여의주
내쉬는 숨에 행복한 빛을 비추어 이웃과 세상을 가득 채운다고 상상한다.
세상의 나쁜 것 내가 모두 들이쉬고
숨 내쉬면서 세상의 좋은 것 모두 남에게 준다.
모든 생명이 영원히 고통이 없기를
모든 생명이 영원히 행복하기를
병 걸리는 것이 제게 좋은 일이라면 병을 주시어 저를 축복해주소서
살아남는 것이 제게 좋은 일이라면 삶을 주시어 저를 축복해 주소서
죽는 것이 제게 좋은 일이라면 죽음을 주시어 저를 축복해 주소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감사하게 받게 하소서
<타라보살에게 드리는 기도>
옴 타레 투타레 투레 소하
마음의 임이시여, 저를 설레게 하는 비전을 주시어
일할 때나 쉴 때나 항상 보리심을 생각하게 하소서
제 가슴에 계신 광명이여, 저를 안내하는 빛을 비추어
집안에 있든지 바깥에 있든지 항상 보살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제 가슴에 눈 뜬 임이여, 제가 가야할 방향을 가리키시어
생각할 때나 행동할 때나 항상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가려내게 하소서
제 가슴에 있는 금강 여신이여, 제게 힘이 솟아나는 용기를 주시어
벗들과 함께 있거나 적들과 함께 있거나 항상 정의를 행하게 하소서
제 가슴의 어머니여, 저를 감싸 안는 위안을 주시어
사정이 좋든 나쁘든 항상 자비심을 잃지 않게 살펴주소서
제 가슴의 어머니여, 저를 공허한 칭찬과 험담에 넘어가지 않고
항상 흔들리지 않는 평정에 머물게 하소서
제 가슴의 황금여의주여, 저를 세상적인 집착과 인색함에서 벗어나
항상 보시하는 부자가 되게 하소서
제 가슴의 수호신이여, 저를 속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항상 금강저의 우산아래 머물게 하소서
제 가슴의 공행모空行母시여, 제가 유물론과 허무론의 극단에서 벗어나
항상 공성과 연기가 둘이 아닌 경지에 노닐게 하소서
제 가슴의 대락신大樂身이여, 저를 조화롭지 못한 쾌락에서 건져내어
항상 당신의 경이로운 만달라에 머물며 자족하게 하소서
제 가슴의 스승이시여, 저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지
제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며, 제 말과 행동을 보게 하소서
제 존재의 핵심이신 금강불괴신이여, 제가 죽음과 환생을 지날 때
보리심의 서원 잃지 않아 연화장 해탈세계를 유희하게 하소서
옴 타레 투타레 투레 소하
완벽한 균형을 배경으로 순간순간 균형을 잃는 것, 이것이 생명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스즈키 순류(선심초심)
2019년12월3일(화)흐림, 간간히 비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만 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가?
나는 왜 남을 따라가면서 뒤지지 않으려고 애쓰는가?
그게 성공했다고 해도 내가 진정 행복해질까?
현실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왜 삶에 확신이 없고 미래가 두려워지는가?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목에 걸려 뱉지 못하는 말은 무엇인가?
뭔가 풀어지지 않아 가슴에 맺혀 있는 건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은 어떤 것인가? 내안에서 나를 긁어대며 괴롭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가족 모두가 나의 관심과 애정을 요구하는데 나는 누구에게서 관심과 사랑을 받을 것인가?
열심히 살수록 가슴을 텅 비어 어스름한 길 위에 홀로 선 것 같은데 나는 어디서 위안을 받을 것인가? 나의 기쁨과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따뜻한 눈길로 지속적으로 바라보면 맺혀있던 것들이 눈앞에 스르르 드러난다.
그것이 보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거기에서 풀려난다.
내가 나를 괴롭히는 ‘나’에게 갇힌 악순환에서 벗어난다. 나는 자유다.
나는 나인 것이 좋다! 고 선언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나! 라고 말하면서 당당하게 살자.
<하인즈 코허트Heinz Kohurt> 자아심리학자
‘관계적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랑과 관심이라는 심리적 산소(psychological oxygen)를 필요로 한다. 심리적 산소를 충분하게 공급받는 인간은 성숙하며 자신과 타인과 세계 안에서 자신을 표현할 줄 알고 타인을 긍정하며 공감할 줄 알고 세계 안에서 자신의 창의력과 유머를 계발하고 건강한 관계 속에 살아간다. 이러한 건강한 인간의 심리 구조를 코헛은 응집적 자기(cohesive Self)의 구조를 가진 사람이라 말하면서, 이러한 응집적 자기는 자기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충분한 공감과 사랑의 응답을 받으며 충분한 심리적 산소를 공급받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코헛이 말하는 인간은 관계의 인간이며 이 관계의 인간은 단지 출생 후 중요한 몇 년간의 기간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심리적 산소로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코헛의 자기와 자기대상의 관계적 이해는 서구의 개인중심주의적 인간이해의 패러다임에 혁명적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아이의 건강한 자기를 구축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기대상은 대부분 부모인데, 그 부모는 완벽한 대상으로서 작용해야만 그 아이에게 충분한 심리적 산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코헛의 답변은 다행하게도 ‘아니요’이다. 즉 완벽한 부모, 완벽한 자기대상은 이상적 개념일 뿐 실제의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충분히 좋은(good enough)’자기대상이면 족하다. 아이는 자기대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완벽하지 않은 부모의 모습을 발견할 때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충분히 좋은 자기대상의 반응의 실패는 오히려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 안에 그 실망과 좌절감을 극복하게 하려는 본능적 요구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 결과 오히려 아이의 자율성을 키워주게 되는 응집적 자기의 출현에 도움을 주게 된다. 아이에 대한 자기대상의 반응의 결함을 ‘최적의 좌절’(optimal frustration)이라 불렀고 이 적절한 좌절을 통해 아이의 내면에 형성되는 건강한 자율성, 응집적 자기의 출현 과정을 ‘변형적 내면화’의 과정(transmuting internalization)이라 부르며 이 변형적 내면화의 과정은 한 인간의 성숙을 위해서 필수적 발달의 과정임을 말하고 있다.
2019년12월4일(수)흐림
마음은 관심의 불꽃-
관심이 가는 대상을 향해 빛이 달려간다.
관심을 끄는 대상을 찾아 빛이 끌려간다.
관심 있는 대상이 변하고 움직이면 불꽃은 펄럭인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 된다.
관심이 없거나, 흥미가 없는 대상에게는 비추기를 멈춘다.
내 마음의 비추기는 거기서 막힌다. 거기 까지만 비출 거야. 더 이상 비추지 싶지 않아.
거기가 네 마음이 끝나는 곳이요, 너와 세상이 분열하는 경계선이다.
그 너머엔 어둠과 무관심과 냉담함뿐이다. 이것이 無明이다.
관심의 불빛이 가닿는 곳까지가 네 마음영역이요, 그 밖은 무관심 영역이다.
내 마음은 작고 좁으나 무관심 영역은 크고 넓고 깊다.
내 마음은 무명에 포위당하고, 무지에 갇힌 참새와 같다.
내 관심의 한계는 어디인가?
나의 용심, 나의 사랑과 연민은 여기까지만! 하고 멈추는 곳에서 나의 성장도 멈춘다.
나는 어디쯤에서 멈추고 왜 무엇 때문에 나아가길 망설이는가?
내가 나를 가두고 있다. 익숙한 나에 눌러앉아 내가 그어놓은 금 밖으로 나가길 두려워하며
바깥을 기웃거리는 그대여! 네가 눌러앉은 영토에서도 쫓겨나는 날이 곧 오고야말리라.
김장 준비하다. 보살님들이 시장에서 절인 배추 사 가져오고 양념을 마련한다.
용문스님이 소개하여 찾아온 자매 보살님이 강의에 참가하다. 조향란(정견보살)과 조미진
조향란은 AllFresh 과일 소믈리에라고 인터넷 상에 소개되어 있다.
2019년12월5일(목)맑음
오전부터 김장하다. 아미화, 연경, 문정, 현정 네 분이 절여놓았던 배추포기를 잘 섞은 양념에 버무린다. 푸른 바다 물빛 배 추이파리를 붉은 양념에 묻혀 한 입 가득 씹어본다. 다정한 대화가 피어나는 가운데 부지런한 손놀림 덕분에 늦지 않는 시간 내에 일을 끝내고 점심을 먹다. 설거지 하는 동안 커피를 내리다. 탁자에 둘러앉아 커피를 나누며 평범한 삶속에 피어나는 비범한 평화를 이야기 하다. 평범과 비범은 그게 그거다. 한 솥에 잡아넣고 끓이면 한 맛이 된다. 커피가 다하니 차가 있고, 차가 다하니 일이 없다. 일이 다하니 여백무한이 가득하여 돌아가 쉰다.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놓다.
2019년12월6일(금)흐림
혜안스님이 점안식과 개원법회에 법문을 요청하다. 15일(일)오전 11시 부산 청사포
2019년12월7일(토)맑음
화엄사 선원으로 대중공양 가다. 아미화, 송계, 하심, 연경부부, 향인부부, 문정, 현정 동참하다. 선원장 스님과 차를 나누다. 벌교 조정래 문학관을 찾다. 현 부자네 고택과 소화의 집을 둘러보고 순천만 갈대밭을 걷다. 진주로 돌아와 함께 저녁 먹다.
2019년12월8일(일)맑음
우리 마음은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여러 성향을 띠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노벨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지적한 대로 ‘우리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는 기계이다.’ 우리는 얼른 믿고 급하게 확정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편협한 이야기로 결론짓고 행동한다.
천재는 묻고 또 물어 더 이상 물을 기력이 없는 곳까지 밀어붙이는 담대한 끈기가 있는 사람이다. 천재는 끝을 볼 때까지 밀고 가는 순수한 몰입과 대책 없는 뱃심이 있는 사람이다.
-장휘옥, 불교신문 칼럼
<양파 까는 원숭이>
양파를 쥔 원숭이는 양파 껍질을 깝니다. 그런데 껍질을 벗기고 보니 그 안에 껍질이 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원숭이는 다시 껍질을 깝니다. 그러면 안에 껍질이 또 있죠. 이러다 보면 원숭이는 결국 아무 내용물도 건지지를 못하죠. 양파를 바나나처럼 생각한 것이니까요. 바나나는 그 안에 육질이 있어서 겉을 벗겨내면 그 안에 알맹이를 먹을 수 있죠. 그러나 양파는 아무 것도 없어요. 껍질 그 자체가 알맹이라는 것을 원숭이는 알 리가 없죠. 마찬가지예요. 자아라는 것은 양파와 같아요. 껍질을 벗기고 벗기면 그 안에 참 자아가 따로 숨겨져 있다는 생각은 그랬으면 좋을 것 같은 착각이요, 믿고 싶어 하는 믿음입니다. 추상적인 자아 혹은 추상적인 진리는 따로 저기 먼 별천지에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 껍질 자체가 바로 내 모습이고 내 진정한 자아인데, 그걸 자꾸 벗겨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환상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허상에 사로잡히는 것을 ‘실체인 척하는 형이상학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승려와 원숭이> 심재관·최종덕 저 가운데‘무아(無我)가 어떻게 윤회하는가?’에서
경진스님이 그림 화제를 보내와 번역을 부탁한다.
楷杖挑雲鶴步高, 곧은 주장자로 구름 헤치며 학의 높은 걸음으로
古林斜日踏平臯; 옛 숲에 저문 해 비칠 무렵 평탄한 언덕 걷노라니
煉成五字吟腸斷, 오행기운 단련하라는 도교의 가르침을 읊노라니 간장이 끊어질 듯
一任西風亂鬂毛. 허연 귀밑털만 서풍에 날리는구나!
大千居士 大風堂下 대천거사 대풍당 아래
張大千(장대천,1899~1983)은 석도나 팔대산인의 것을 모방하여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해진 화가이기에 이 그림이 진품인지, 모사인지 감정해봐야 합니다.
무엇을 기뻐하고 웃을 수 있으랴?
온갖 생각 언제나 들끓어
마음을 덮고 가리어 어둡게 하니
선정 닦음만 아예 못해라
얼굴 몸 잘났다 좋아하면서
마음 놓고 살아가다가
정신 번거롭고 몸이 병들고 보면
몸이 무상하단 걸 왜 진즉 알지 못했는고?
늙으면 저절로 근력 쇠하고
병들면 윤택도 사라져
가죽은 늘어지고 살은 오므라들어
죽음의 날은 바짝 다가오는데
몸이 죽어 넋도 따라 떠나고 나면
수레 탄 사람이 낡은 수레 버리듯
살 썩고 뼈 또한 흩어지리니
무상한 몸 어찌 믿을까보냐?
지금 바로 몸과 마음 놓아버리면
나는 무엇이며, 어디 있는가?
온갖 현상은 무상하나니, 생긴 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법
더 이상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으면
그 고요한 가라앉음이 최상의 행복이리.
2019년12월11일(수)흐림
<촛불의 미학> 가스똥 바슐라르(1884~1962)
“... 또한 파란빛과 연결되어 있는 촛불의 흰 빛은 부조리를 쇄신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으며 심지와 연결되어 있는 붉은 빛은 모든 불순물과 더러움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둘의 투쟁이 하나의 변증법을 이루면서 타는 촛불은 흰빛의 상승과 붉은빛의 하강, 즉 가치와 반가치가 싸우는 결투장이다.”
촛불은 혼자 탄다, 불꽃은 혼자이고, 태어나서부터 혼자이다.
또 그것은 혼자서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외로운 불꽃이여, 나는 홀로 있다.
불꽃은 소리를 내고, 불꽃은 투덜거린다. 불꽃은 괴로운 존재이다.
혼자서 타고 혼자서 춤추는 것-
타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혼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여자와
할 수 있는 건 고독 밖에 없는 말이 별로 없는 남자
지구 위에 직립해 있는 모든 것, 수직인 것은 모두 하나의 불꽃이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불꽃의 역동성을 가진다.
불꽃은 위를 향하여 흐르는 모래시계이다
불꽃은 시간을 태운다. 불빛이 퍼져나가며 시간이 공간화 된다.
날개 치며 흔들리는 불꽃이여,
오오 입김이여, 하늘의 붉은 반영이여,
너의 신비를 푸는 자는 알 수 있으리
이 세상에 있는 삶과 죽음이 무엇이지를 –마르탱 코비쉬
나의 고독은 벌써 준비되었다,
그것은 태우려고 하는 것을 태우는 것이다. -루이 에미에 <불의 이름>
나는 창을 열려고 한다,
바람이 이제 금방이라도 램프를 끌 것만 같다,
램프는 노래하기 시작하고, 신음하기 시작하며, 찔찔 울기 시작한다. -스트린드 베리(스웨덴)
높은 곳에서 빛은 옷을 벗는다. -옥타비오 빠즈 <독수리 혹은 태양>
나무는 꽃피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말하는 불꽃
동물은 떠돌아다니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노발리스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 -타고르 <반딧불>
촛불이야말로 자신의 내부에 빛과 어둠, 진제와 속제가 역동적 평형을 이루며,
자리이타를 드러내며 타오르는 상징이다. -원담
위대한 창조를 감상하듯 대상을 향해 시선을 정렬시켜라.
명상가는 관점이 유연한 눈을 가져야 한다.
“세계는 보아주기를 원한다. 보기 위한 눈들이 존재하기 전에는 물의 눈, 고요한 물결의 커다란 눈이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물의 눈에 반영된 그 모습 속에서 세계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자각했다.”
가스똥 바슐라르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하는가? 라고 묻는 대신 왜 이렇게 잘못 생각해왔는가? 라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가?
밤새도록 타오르는 램프, 온유하고 다정한 빛을 비쳐주는 램프!
램프가 건네주는 부드러운 빛은 계속되는 관심이고 따뜻한 보살핌이다.
램프가 비추는 책상 위에, 여백의 공간이 펼쳐지면, 고독은 증가한다.
여백! 가로질러야 하지만, 한 번도 가로지른 적 없는 이 거대한 영혼의 사막.
밤새워 하얗게 펼쳐지는 이 무한한 공간은 명상가의 초롱초롱한 시선에 흡수되어 고독은 유성처럼 떨어지며 불타버린다. 램프의 밝은 빛 아래 펼쳐진 무한 여백과 마주한 명상가는 모든 것을 끝맺는 자이면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자이니,
매일 밤하늘에 보리심의 별을 수놓는 성취자이다.
2019년12월15일(일)맑음
어린 왕자가 사는 행성에는, 다른 행성도 그렇겠지만, 착한 식물과 못된 식물이 있다. 따라서 착한 식물에서 나온 착한 씨앗이 있을 것이고, 못된 식물에서 나온 못된 씨앗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씨앗은 깊은 땅 속에 숨어 잠을 잔다. 그러나 깨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수줍게 기지개를 켜고 태양을 향해 해맑은 싹을 쏘옥 내밀 것이다. 그게 무우나 장미의 싹이라면 마음대로 자라게 내버려두면 된다. 하지만 못된 식물의 싹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 된 즉시 뽑아버려야 한다.
내안의 어떤 것이 착한 씨앗이고, 어떤 것이 못된 씨앗인가?
착한 씨앗을 깨워서 싹을 돋아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도 알에 씨앗이 들어있듯
내 마음에 슬픔 있네,
나는 울면서 그 슬픔의 씨앗을 꼭꼭 씹어 삼킨다,
나는 고독한 그림자를 딛고 일어서는 촛불
날개 치며 흔들리는 불꽃이여,
나는 눈물을 녹이고 몸을 태워서 빛을 밝힌다,
불빛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온유하고 따뜻한 영혼의 쉼터
나는 명상에 든 불꽃, 무한을 보는 눈이 열린다,
불꽃의 신비를 아는 자는 알 수 있으리
이 세상에서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아침 8:40 진주를 출발하여 청사포 보디야나 선원으로 가다. 혜안스님이 개원하여 200위의 호신불 점안식을 하는데 법문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간다. 점안식을 마치고, 법문을 하다. 참석대중이 약70명가량. 보디야나 선원은 희망차다. 점심 공양하고 갈맷길을 걸어 나와 송정 모래사장을 길게 걷다. 진주로 돌아오니 7:30. 오늘 하루 날아다니던 백학의 날개를 접고 난로 가에 앉아 꿈을 꾸리라. 촛불의 미학을.
<위니코트의 대상관계를 생각하면서>
절대의존기에 모성몰두에 실패한 엄마를 둔 아이는 ‘존재연속성이 끊어진 느낌’이 깊이 각인된다. 그러면 성인이 되어서도 문득 천지에 홀로 버려진 듯 깊은 고독과 블랙홀에 빨려드는 듯 불가항력적인 우울과 무기력으로 떨어진다. 종현, 최진실, 나아가 버지니아 울프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우울한 엄마, 아이와 정서적 소통을 못한 엄마, 불성실한 양육자를 만난 아이는 불안과 공포, 좌절과 고독, 버려진 느낌과 분노와 같은 느낌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각인될 텐데, 일생을 살아가면서 반복적으로 그런 기억이 상기될 때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울 텐데 어떻게 대응해서 치유해야할까?
생후 2~4세에 양육자가 바뀔 때는 ‘대상 항상성의 결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그 아이는 죽을 것 같은 불안과 심리적인 파산상태에 빠지게 된다. 존재연속성이 끊겼을 때 자아가 분열하여 방어기제에 아주 능한 ‘거짓 자아’를 쓰고 주변사람들의 에너지를 빨아먹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자가 된다든지, 욕구충동을 자제하지 못하는 변태성욕자 될 가능성이 있다. 혹은 양육자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는 마음에서 위해를 가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될 수 있다.
영유아기에 당연히 받아야할 애정과 정서적 교감을 받지 못한 아이는 가슴에 구멍이 난 것과 같은 공허감, 갈증 난 상태가 되는데, 그것은 물에 빠져 죽은 귀신처럼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시시때때로 틈만 나면 수면으로 튀어나와 갈증을 채우려 하는 것과 같다. 사랑한다고 만난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은 갈증 난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의 갈증을 채워달라고 떼를 쓰는 격이다. 어찌 나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으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서로에게 없는 것을 내놓으라면서 싸우는 짓이다. 자기 혼자 상대를 사랑한다고 정해놓고는, 자기는 당연히 상대에게서 사랑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먼저 주지는 않으면서 상대에게 자기 몫의 사랑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얼마나 불공평한 거래인가? 채울 수 없는 갈증에서 나오는 일방적이고 지속적인 요구는 상대를 지치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마침내 정서적 단절을 가져온다.
위니코트가 말하는 상대object란 절대의존기의 영유아에게 지각된 엄마 이미지인데, 이는 무한한 사랑, 측량할 수 없는 돌봄과 안정감, 모든 욕구가 채워진 충만함, 천지에 가득한 봄바람과 같은 온유한 평화이다. 그러니까 거의 신적인 존재이다. 이런 상대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즉, 모성몰두에 실패한 엄마를 둔 아이는, 거의 일생동안 그 결핍감에 시달릴 것이다. 이 깊은 상처는 성자나 카리스마가 있는 상담자, 혹은 귀인, 현자를 만나지 않는 한 치유되기 힘들 것이다.
아이의 생존자체가 존재의 불안이다. 엄마가 아이를 안아줄 때 아이는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난다. 엄마의 안아줌이 아이에게는 우주적 안정감과 자존감의 근거가 된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나는 살아도 된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다. 라는 원초적인 느낌이 자리 잡는다.
안아주는 엄마holding mother의 결핍,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의 결핍, 모성박탈-이것은 상담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대상관계가 결핍된 것은 보충이나 치유가 불가능하다.
아이의 성장을 촉진시켜주는 ‘촉진적 환경’으로서 ‘안아주는 어머니’ ‘칭찬하는 어머니’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주는 어머니’-그런 엄마를 둔 아이는 전적인 의존과 생생한 실존감-긴장을 풀고 될 대로 되라고 완전히 맡겨두어도 (대상 환경이)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각인된다.
여기 아기 때 부모가 비명횡사하여 이모 손에 컸던 아이가 아홉 살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그 어떻게 그 상실과 불안의 상처를 치유했을까?
쥘 쉬페르비엘은 남미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은행업을 하는 프랑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세상에 태어난 지 8개월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농가에 있는 오래된 수돗물을 마시다가 정체모를 독극물에 중독되어 사망하게 된다. 시인은 이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는데, 그를 키워준 분들이 그를 낳아준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홉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거실 문 뒤에서 듣게 되면서 어린 아이에게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쥘 쉬페르비엘은 10세부터 프랑스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고, 그 이후로 자신의 고향인 우루과이와 부모님의 고향인 프랑스를 오고가면서 생활하게 된다. 쥘 쉬페르비엘의 시 속에서 바다와 연관되는 이미지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아마도 두 나라를 지속적으로 오갔던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 아닐까 한다. 또 남미의 광활한 자연을 그의 시에서 느껴볼 수 있었다.
나는 그토록 당신이었고, 이제는 희미하게 당신입니다만,
눈 먼 고기들과
수직의 수평선이 시작되는
대서양의 심연에서 서로에게 발길질하며,
서로의 헤엄을 방해하다, 반쯤 익사한 두 명의 선원들처럼,
어쩌면 우리는 함께 죽었어도 좋았을 만큼 그렇게 묶인 둘이었습니다.
-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노래한 쥘 쉬페르비엘의 시, 「초상화」 중 일부
어느 시인
나는 항상 나 자신의 깊은 곳에 홀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함께 하나 이상의 생물을 끌고 간다.
나의 차가운 동굴에 들어갈 이들은
거기서 한 순간만이라도 벗어날 자신이 있으려나?
나는 밤에 침몰하는 배처럼
닥치는 대로 승객과 수부들을 싣는다.
그리고 선실 안에서, 눈의 불을 끄고
위대한 심연*을 벗 삼는다.
첫댓글 무엇이 두려운지, 목에 걸려 뱉지 못하는 말이 무엇인지. 근원을 알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스스로를 가두는 어리석은 자신을 마주합니다.. 회피하지 않고 지그시 바라봄으로서 굴레에서 벗어남을 느낍니다.
연기와 공성이 둘이 아님을 알수 있기를..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려 말과 행동을 볼수 있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