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02-25 03:00
[김도연 칼럼]거짓에 너그러운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우리나라 각급 학교들은 스스로의 교육 목표를 간명하게 나타내는 교훈(校訓) 혹은 교시(校是)를 지니고 있다. 초등학교 교훈은 ‘참되게’, ‘슬기롭게’ 그리고 ‘튼튼하게’ 등이 전형적인데 학교 간에 서로 큰 차이는 없는 듯싶다. 대학들도 모두 비슷하다. 부산대, 전남대를 비롯해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등 수많은 대학들이 택하고 있는 교시는 ‘진리’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도리를 의미하는 ‘진리’는 당연히 거짓이 없어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대학의 핵심 역할인 연구에서 남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속이는 논문 표절, 데이터 조작, 혹은 실제로 참여하지 않은 논문에 이름을 올리는 행위 등에 대한 중징계는 대학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다. 독일에서는 2013년 연방정부의 교육 및 연구부 장관이 출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소하는 바람에 직에서 물러났다. 8년째 장관으로 일하던 중이었는데, 1980년에 작성해 제출한 학위 논문에 표절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동년배 여성으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가장 가까웠다던 현직 장관에 대해서도 30년이 더 지난 과거의 거짓을 찾아 징계하는 독일 대학이다. 우리는 어떨까? 통상 2년에 걸쳐 작성하는 석사학위 논문도 학술지 발표에는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열흘 남짓 인턴으로 일했던 고등학생이 학술지 논문의 제1저자로 나타났다. 저자는 연구 계획을 세우고 실험 데이터를 수집한 후 이를 해석해 학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여가 큰 사람이 제1저자다. 연구 활동에서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동의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진리’를 지향하는 우리 대학들은 잠잠하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초등학교 때부터 거짓 없이 참되게 살아가는 참사람 육성이다. 그리고 대학에 이르러서는 진리에 충실한 진실된 인재 육성인데, 참을 지향하는 이런 교육은 동서고금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사람이란 거짓이 없는 진(眞)짜 사람이다. 거짓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계도하고 관용하면서 참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교육이지만, 때로는 일벌백계로 가짜를 솎아내는 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 전반적으로 거짓에 대한 관용의 폭이 너무 넓다. 그간 수많은 고위 공직 후보자들에 대해 논문 표절 혹은 사기, 폭행 의혹 등이 수차 제기되었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그냥 잊혀지고 말았다. 이렇게 모든 일이 유야무야로 처리되어 거짓도 버젓하게 행세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특히 정치인 등 사회의 거울이 되는 사람들이 행하는 거짓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관용은 답이 아니다. 확실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다음은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회고하며 당시 문재인 의원이 저술해 출판한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옮겨온 내용이다. “미국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바로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도청 공작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것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일,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거짓말한 책임을 추궁당한 것입니다. 그런 만큼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사실을 밝혀야 합니다.” 이렇게 정직을 강조한 대통령이 이끌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인데, 어째서 참사람의 표상이어야 할 사법부 수장마저 거짓 논란에 휩싸이는 세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유행가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듣는 노래다. 대중이 사랑하는 이유는 시대의 한(恨)과 정서를 그 노래를 부르며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요즈음 유행하는 노래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교회 오빠하고 클럽은 왜 왔는데, 너네 집 불교잖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래 가사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젊은이들 사이에 오간 거짓말은 씁쓸하고 또 부끄럽다. 최근 사랑받은 노래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는 참보다 거짓이 많은 세상을 한탄하는 것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노래다. 우리는 거짓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미래가 걸린 일이다.
* 오늘의 묵상 (221117)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치 사람처럼 여기시며 ‘의인화’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여기서 의인화된 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자체입니다. 그안에는 그곳의 주민들, 곧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는 이유가 다음 구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이는 기원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파괴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로마 제국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유다교 신앙의 구심점이던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킵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한탄하시는 장면을 서술합니다. 셋째,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를 언급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 구세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분을 배척합니다. 임금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17; 2코린 6,16)이며,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입니다(1코린 6,19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가 이기심, 믿음의 부족,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에 사로잡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가톨릭신학대성신교정)
*모두를 위한 공유 경제
프란치스코 교황은 포콜라레 운동의 ‘EoC’(Economy of communion: 모두를 위한 경제)모임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공유 경제는 세상의 공유 경제이며, 동시에 세상의 그것과는 차별화된 공유 경제입니다. 우리의 공유 경제는 세상의 가치와 평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유 경제는 이해와 득실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유 경제는 ‘모두를 위한 경제’이며, 우리의 공유 경제는 ‘나눔의 경제’입니다.”
EoC는 포콜라레 운동 창설자인 키아라 루빅 여사가 1991년 출범시킨, 복음적인 나눔과 공유의 정신에 따라 모든 경제 활동의 패러다임과 문화를 바꾸려는 새로운 경제 모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재화의 나눔과 인간적인 상호성,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무상성을 기본 개념으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신을 경제 분야에서 구현하자는 취지다. 공유 경제의 원리와 개념을 잘 이해하고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당장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일자리 창출 문제라든가 장애인, 경력 단절 여성, 저소득층, 다문화 가정, 고령화 등의 문제를 비롯해 여러 분야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간의 사랑과 모든 이의 일치’, ‘나와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나누는 것’, 공유 경제의 탄생 배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