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자락길/靑石 전성훈
낯선 곳이거나 처음 가보는 장소에 가면 궁금하거나 어떤 설렘이 가득할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전혀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때도 있다. 생각이나 사고의 차이 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덧없는 삶을 사는 사람의 무미건조한 마음의 단면처럼, 무심하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이 서늘한 기운이 스며든다.
서울에서 태어나 70년 넘게 살아왔음에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중에는 63빌딩과 독립문도 포함된다.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원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복원된 독립문을 직접 가까이서 바라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바라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발길이 닿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국민의 도리 어쩌고 하며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는 조선 시대 중국 명나라 사신 숙소인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워 은혜를 맞이한다는 ‘영은문(迎恩門)’ 자리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쇠잔해 가는 대한제국 시절 조선의 독립과 백성의 자립 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서재필 선생을 위시한 선각자들이 꿈과 이상을 좇아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몇 년 전 어느 대통령이 3.1절 기념행사로 반중(反中)상징인 독립문 앞에서 반일 만세를 부른 ‘확증편향적’인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독립문을 바라보며 독립관에서 잠시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드리고 조금 착잡하고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친구 덕분에 귀에 익숙한 ‘안산 자락길’을 찾는다.
안산(鞍山)의 유래를 찾아보니, “안산(鞍山)의 '안(鞍)'은 말안장이란 뜻으로, '鞍'은 '가죽 혁(革)' 또는 '고칠 혁'과 '편안할 안(安)'의 두 글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안산은 산의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실을 때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재, 추모련이라고도 불렀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인조 임금 시절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안산은 무악산(毋岳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악이라는 명칭은 한양 천도를 위해 지금의 청와대 뒤에 있는 북악산, 인왕산 등과 함께 도읍의 주산을 다투는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가 안산을 무악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 사상사]
서대문 구청에서 북한산 둘레길처럼 안산(해발 295.9m)에 시민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데크 길을 만들어 안산 자락길이라고 부른다. 지팡이 없어 걸을 수 있어서 주말에는 찾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한다.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사람이 걷는다. 얼핏 눈에 띄는 게 대부분 나이 든 사람이다. 젊은이는 한창 일하고 돈을 벌 시간이므로 눈에 들어오는 게 이상하다. 죽은 자의 시신을 운반하던 시구문(屍軀門) 안내문을 보며 함께한 친구가 안산 자락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탁 뜨인 공간에서는 멀리 보이는 곳의 지명이나 산봉우리의 이름을 알려준다. 내가 사는 창동 지역과는 전혀 다른 서울의 모습, 정말 처음 보는 곳이다. 늘 보았던 곳의 모양도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면 낯설게 보이는 것처럼, 같은 서울 하늘아래서 산다고 하여도 산과 지형의 위치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곳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다. 봉수대로 이르는 길도 여러 갈래이다. 숲길에는 아카시아 꽃들의 잔재가 널브려져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4월 하순이나 5월 초순에는 진동하는 아카시아 향내가 흘러넘쳐 하늘까지 닿았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황톳길 걷기는 이곳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인기 종목이다. 구청에서 약 500m 정도 구간에 황토를 가져다가 쏟아부어 놓았고, 중간중간에 발을 씻을 수 있는 수도시설과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 동네 초안산 황톳길은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생성된 길이고, 이곳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길이라 걸을 때 발바닥이 느끼는 감각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시민들 건강을 위한 환경 조성에 신경을 쓴 모습이 역력해 보인다.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황톳길을 걷는데 미끌미끌해서 넘어질 듯하다.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고 부지런히 왕복 1km를 걷고 발을 씻는다. 발톱에 묻은 황토를 깔끔하게 씻어내고 등산화를 신고 자락길을 한 바퀴 돈다. 산허리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길은 앞으로 몇십 년 세월이 흐르면 아주 멋지게 자랄 것 같다. 초라한 모습의 볼품없는 능안정에서 쉬면서 목을 축이고 내려가니 거의 2시간 정도 걸린다. 오후 들어 안개가 걷히면서 기온이 올라가 덥다. 독립관으로 내려가서 부근의 이름난 음식점에서 도가니탕으로 점심을 먹으며 안산 자락을 걷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2024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