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189)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168) - 로마서 강론(3)
로마서 강론(3) - 2장 1~24절
성경의 인간론에 대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오해
사도 바울은 1장 29~31절에서 모든 인간의 22가지 죄성(특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부도덕한 사람에 대한 설명이 아니고 정상적인 인간의 특징이다. 예수님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하다고 말씀하셨다.(막7:21-23) 성경은 인간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는데(사64:6) 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모든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는데 그것을 부도덕한 인간에 대한 설명이라고 오해하고 있나? 그러면서 윤리적으로 살자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가 아닌, 호불호를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은 것이다.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이유도 자기들의 벗은 모습을 하나님께 보이기 싫다는 것이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은 것도 당신이 내 몸을 보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불호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한 몸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남이 되면서 각자도생의 처절한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초한 문제였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인데 형벌까지 받게 되어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공포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면서 유불리 계산까지 서로 달라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형벌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서로 이용하고, 배신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관심하면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인간은 이런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이지 않거나 선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자기 발등의 불이 뜨거워서 선과 도덕과 정의를 언급할 주제가 못 된다는 것이다. (도덕은 집단적인 유불리 계산의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집단마다 도덕이 다르고 집단 안에서도 개인마다 도덕이 다르다. 이것이 도덕의 실체이다. 도덕은 선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사는 것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고 선한 삶이라고 해석하면서 착각하는 것이며, 이방인은 자기들이 만든 도덕대로 사는 것이 선한 삶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이 빠져있는 함정이다.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안타까워하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2장에서도 계속해서 인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 판단으로 자기 자신을 정죄한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똑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로남불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진리에 따라 내려지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벌은 현세의 형벌이 종말 이후 최후 심판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을 살아가는 자를 비난하면서도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비가 그대를 돌아서도록 이끌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여 그 분의 풍성한 자비와 인내와 끝없는 열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까?” 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똑같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는 각자 호불호와 유불리가 다른 것이다. 호불호가 다른 것은 인간이 자초한 문제로서 하나님이 각자 타자가 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란 호불호가 달라져서 서로 남이 된 인간이 각자 자기 발등의 불을 끄는데 정신이 없는 삶에서 돌아서서 하나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구원의 약속은 남이 된 것을 되돌리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유불리가 달라져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밑 빠진 독을 차고 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형벌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호불호가 같아지면 발등의 불을 끄는 공포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께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인간의 문제는 왜 자기밖에 모르느냐는 것이다. 남남이 된 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약속은 하나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대의 무감각함과 돌아서지 않는 마음을 따라 그대는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결이 임하는 그 날 그대에게 닥칠 진노를 쌓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지하지 못하여 무감각한 것과 돌아서지 않는 마음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며 그것이 정상이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해결되는 것이다.) 최후 심판 때는 더 심한 판결이 내려질 텐데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그대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연민과 긍휼히 여김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나에게 답이 있다는 것이며 그러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최후 심판 때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에 따라 갚아주실 것이니 선한 행실을 즐거워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갚아주시고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진리(하나 됨)를 불신하고 불의를 확신하는 모든 인간에게는 진노와 분개로 갚아주실 것이니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라는 것이다.
이방인의 도덕적인 삶과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삶은 똑같이 악한 것이다
그러면서,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생명에 환난과 재난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도며, 선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화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악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끝없이 괴롭히기 때문에 발등에 불과 밑 빠진 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답이 없다. 따라서 혼자된 자는 절대로 행복이 불가능하고 지옥의 삶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로서, 형통한 이방인들이 너무 부러웠는데 클레로스에 들어와서 하나 된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고 보니까 그들이 어떤 처지의 인간인지, 즉 지옥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이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과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은 똑같이 악하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서 빠져 있는 함정의 속성이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삶을 살았으나 서로 미워하며 살았다고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더 이상 선민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 그룹은 해체된 것이다.
율법 없이 죄를 지은 자는 율법 없이 멸망하고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들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들만이 의롭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전제하에서 쓴 것이다.
그러면서 율법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선한 일)을 만약 행한다면 그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율법이 되기 때문에 그들의 신념과 서로 간의 비난과 변명들이 그들의 마음에서 율법이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도 이런 인간은 없다는 가정 하에 쓴 것이다. 율법이나 도덕이나 법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과 이방인들이 법과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똑같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도 너희들과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며 유대인들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고 뭐가 뭔지 모르고 산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똑같은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3장에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제부터 내 복음을 들으라는 것이다. 너희들은 율법도 잘못 알고 있고, 복음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유대인이 빠져 있는 함정
유대인이라 칭함을 받는 그대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자랑하며 율법을 배워서 그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보다 나은 것들을 구별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율법에 담긴 지식과 진리의 모습을 갖춘 자라고 착각하면서, 그대들은 소경들의 인도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들의 훈육자요 어린아이들의 교사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 그대 자신은 어찌하여 가르치지 않느냐고 하면서, 도적질하지 말라 선포하며 도적질을 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음하고, 우상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니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 민족들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는 말씀 그대로라고 하면서 모든 유대인이 빠져 있는 함정을 설명하고 있다.(1:32) 이것은 이상한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앞으로 이야기할 복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전지식을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논리는 유대인들의 내로남불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너희가 하는 것이 도둑질이라는 것은 왜 모르느냐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나가서 우리들의 원수를 죽이고 돌아오는 사람은 환영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살인이라고 하는 것을 인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인에 처한다고 했던 살인이 아니라고 인식을 하는 것이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면서도 지계표를 옮기는 것을(토지 매매) 지적하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인지를 못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살인을 하지 않았지만 미워하는 것도 살인과 같다는 경우도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간음을 하지 않았지만 음욕을 품었다는 것은 상대를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인데 그것을 율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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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본격적인 복음 설명에 앞서 다음의 네 그룹이 본질상 다른 점이 없다는 것부터 논증하고 있다.
1.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
2.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는 유대인들
3.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방인들
4. 예수고 메시아고 아무 관심 없는 이방인들
윤리도덕과 시민법, 즉 세상 원리(코스모스의 스토이케이온)에 묶여서 타자 된 실존 속에서 살아가는 혼자 된 삶인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으로서
22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복음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니 여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는 것~ 믿음직스러운 의인들의 탄생이다.
따라서 나사렛 청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으로는, 아직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새 사람들, 새 시대, 새 세계~
로마에 있는 아직 옛 사람들인 형제자매들에게 전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핵심이다.
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최윤주 자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