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톡톡 [컬럼] 2017-05-31>
영화 <프란츠>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삶이
짙푸른 수풀과 분홍빛 꽃가지를 얹은 카메라가 멀리 희끄무레하게 잡은 곳은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크베들린부르크.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 성당과 성채를 비롯해 목조 주택이 늘어선 옛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중세 시대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마을 한 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옥들은 나무 기둥과 들보 사이사이를 돌과 흙으로 메우는 하프팀버(반목조)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붉은 지붕이며 삐죽삐죽 내민 목골과 파스텔 색조 벽면은 블록을 쌓아 올린 장난감처럼 귀엽다.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요정들과 마법사가 하프 선율을 따라 광장과 골목을 날아다닐 듯한 풍경이다. 그런데 환상은 멀고 환멸은 가깝기 때문일까. 동화 나라에서 증오의 마을로 출발하는 신호일까.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Frantz)>는 이야기 배경과 출발 시점을 알리기 무섭게 둔탁한 종소리와 함께 흑백 영상으로 스크린을 덮는다. 1919년 크베들린부르크.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mrb.or.kr%2Fupload%2Feditor%2F20170531033225102.jpg)
전쟁에서 외동아들 프란츠를 잃고 상심에 빠진 독일인 한스 부부. 노령의 그들을 딸이자 며느리처럼 돌보는 안나(폴라 비어)는 프란츠와 약혼한 사이였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꿈과 자존심을 짓이긴 1차 세계대전. 분노와 증오는 한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프랑스인은 누구든 아들의 살해범일 따름이다. 파리에서 온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도 모질게 내쫓았다가 프란츠의 친구라는 걸 안 뒤에야 마음을 연다. 아드리앵이 들려주는 비밀스런 시간들이 컬러 영상을 통해 꿈결처럼 몽롱하게 풀린다. 색조만큼 눈길을 끄는 것은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이끈 폴 베를렌 시인이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토탈 이클립스>가 순수와 혼탁, 방탕과 참회를 오간 베를렌의 반생애를 그려냈고, 여기서는 프랑스어의 내밀한 음악성을 가장 잘 살려낸 베를렌의 아름답고 서글픈 서정과 이미지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안나가 <가을의 노래>를 콧소리 섞인 프랑스어로 읊거나 앓아누운 자리에서도 베를렌 시집을 품는 장면, 랭보와 베를렌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두 남자의 모습 등 흥미로운 대목이 적잖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노인들이지만, 싸우고 죽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말을 떠올렸을까. 한스는 프랑스인들을 향해 적개심만 키우는 동료들을 나무란다. “우리는 저쪽 아들을 수천 명 죽인 뒤 맥주로 기념했고, 저들은 우리 아들을 수천 명 죽인 뒤 포도주로 기념했소." 동료들은 한스를 비웃으며 군가로 전의를 다진다. “패자가 원한을 버리는 일이 승자의 무장 해제보다 앞서야 한다.”는 윈스턴 처칠의 말 따위는 씨도 먹히지 않을 터이다. 한스의 등 뒤로 칼 빌헬름의 <라인강을 수호하라>가 울려퍼지면, 안나가 앉은 파리의 식당에서는 노랫말도 살벌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목청을 돋운다. “...저 포악한 병사들이/ 우리 자식들과 아내의 목을 치려 한다 /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을 적실 때까지.” 두 노래는 <카사블랑카>의 ‘카페 아메리캥’에서 국가 대항전처럼 뒤엉켜 흘렀다. 기이한 노래 전투에 당황하면서도 감격하는 잉그리드 버그먼과 험프리 보가트의 능청스런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에서 컬러는 단순히 회상이나 추억에 머무르지 않는다. 때로는 마음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쓰인다. 친구를 잃은 남자와 연인을 잃은 여자가 만났으니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를 수밖에. 머리에 꽃 그리고 흥겨운 춤판. 하지만 무서운 건 전쟁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독일인들이 퍼붓는 증오와 살의에 질려버린 아드리앵이 몸부림친다. “이런 연극은 그만!” 도대체 어느 무대에서 누가 어떤 역을 맡았다는 말인가. 컬러 화면으로 되돌아보는 1년 전의 격렬한 전투. 섬뜩하도록 충격과 탄식을 안겨준 카메라는 1차 세계대전이 '참호전', 다시 말해 보병들의 총검 돌격으로 이뤄진 전쟁이었음을 덤으로 알려준다. 1시간 54분이나 되는 영화가 50분을 넘기기도 전에 천기누설급 정보를 발설하니 후련하기는커녕 조바심이 난다. 정체와 실체를 드러낸 허전함을 요란한 반전으로 채우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바야흐로 연출 역량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다.
“감독은 언제나 자신이 만든 최신작에 역행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대로 프랑수아 오종은 항상 새로움에 도전했다. <스위밍 풀>, <인 더 하우스>, <영 앤 뷰티풀>, <나의 사적인 여자 친구>에서 욕망과 관능, 섹슈얼리티와 미스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 재능은 ‘예술적 악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약물에 취했던 봉두난발의 사내가 새해맞이 목욕재계를 하고 나선 꼴일까. 청소년관람불가 전문 감독이 12세도 감상할 수 있는 영화를 발표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데, 멜로드라마로 선회한 발길이 가볍지만 경박하지는 않다. 오종 감독의 후끈하고 질펀한 영상에 중독된 관객이라면 뼈마디를 쑤시고 녹이는 충동과 자극을 기대했을 터이다. 동치미를 헹군 듯 싱겁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한 술보다 맑은 물을 더 많이, 더 오래 먹는 법. 연애는 촌스럽고 변태와 외설이 대접받는 시대에서 참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열병을 앓아보는 일도 신선하지 않겠나.
아드리앵은 프랑스로 떠나고 더 깊은 시름에 젖는 안나. “삶을 계속 사랑하고 행복하겠다고 약속해줘." 프란츠의 마지막 편지를 떠올리지만 살아갈 희망도 기력도 없다. 베를렌은 “인생의 희망은 늘 괴로운 언덕길 너머에서 기다린다.”고 했지만, 안나에게는 언덕이 아니라 가파르게 깎인 절벽이다. 떠난 이는 함흥차사, 남은 자는 피골상접. 드라마를 축축이 적실 수 있는 조건이다. 시간은 상처를 덧내며 흘러가고, 늦가을 스산한 풍경과 함께 안나가 강물에 잠긴다. “전쟁이 남긴 죽음도 충분해.” 꾸짖는 소리와 무모한 결심은 에두아르 마네의 화폭에 연결된다. 한스 부부는 안나를 파리행 열차에 태운다. 신출내기 척후병처럼 불안한 여행객의 마음을 조명과 음향으로 표현하는 수법이 좋다. 프란츠가 묵었던 호텔의 난잡한 광경이며 오페라 극장과 병원을 거쳐 묘지에 이르는 안나의 행보에 은근슬쩍 트릭을 구사하기도 한다. 안나는 마침내 아드리앵을 만나지만 집안의 공기가 예사롭지 않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mrb.or.kr%2Fupload%2Feditor%2F20170531035325401.png)
승자의 야유가 창이라면 패자의 변명은 나무 방패. 손님들끼리 벌인 식탁 전투에 이어지는 음악회. 드뷔시 가곡 <별이 반짝이는 밤>의 가수와 반주자로 부딪친 두 사람 틈에서 어머니 눈치만 살피는 철부지 사내. 착오인지 착각인지 모를 안타깝고 울화통이 터지는 상황이 펼쳐진다. 덧붙이면 스포일러일 터이니 딱 대사 한 마디만 올리겠다. “너무 늦었어요.” 단락마다 <초원의 빛>과 <애수(Waterloo Bridge)>, <마음의 행로>와 <비수(Beloved Infidel)>, <무기여 잘 있거라> 등 할리우드 고전 멜로드라마에 버금가는 정취가 느껴진다. 우리가 잊거나 잃어버린 시간을 흔들어 깨우는 장면들은 신고전주의로 불러도 좋을 만큼 새롭고도 아련하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마네의 유화 <자살(The Suicide)>속 남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치고는 의상과 포즈가 독특하다. 보타이와 핏물이 얼룩진 새하얀 셔츠, 고개를 꺾은 모습은 처연하되 근사한 느낌이어서 ‘슬픈 탄환’이라는 부제를 붙이고 싶다. 그 남자를 보며 입을 앙다문 안나의 표정이 가장 화사한 색채로 확대된다.
안나 역을 맡은 독일 출신 폴라 비어는 21세 나이를 잊게 하는 성숙하고 우아한 연기로 작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신인에게 주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을 받았다. <이브 생 로랑>의 타이틀롤이었던 피에르 니네이의 떨리도록 섬세한 연기는 프랑스 영화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쇼팽의 <야상곡 20번>을 비롯해 차이코프스키의 현악사중주 1번의 <안단테 칸타빌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 등 귀에 익은 클래식 선율도 향수를 자극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 목록에는 돌연변이 영화로 기록되겠지만, 까닭 모를 도발과 전복, 시답잖은 자극을 흥행 요소로 여기는 상황에서 순정과 비련을 선택한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슬픔도 고통도 인생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는 시인의 위로를 기꺼이 받아들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