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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묵상글 들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기어코 뵈오리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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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기어코 뵈오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어제 모든 성인의 날 성인이란 미래의 행복 그 중에서도
하늘나라의 행복을 앞당겨 산 분들이라고 말씀 드렸고,
이 세상의 온갖 고통, 현재의 많은 고통 가운데서도
하늘나라의 상과 행복을 내다보며 앞당겨 행복한 분들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의 날에 이어 위령의 날을 지내는 이유는
돌아가신 분 중에 성인 곧 천국의 행복에 들어간 분들도 있지만
아직 들어가지 못한 분들이 있기 때문인데 아직 천국의 행복에
들어가지 못한 분들은 왜 아직 천국의 행복에 들지 못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직입니다.
제 생각에 오늘 욥에 비춰 보면
관상 능력과 관상 의지의 부족 때문에 아직입니다.
우선 관상 능력의 부족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경우 욥처럼 큰 고통을 겪게 되면 고통에 함몰되어
고통밖에 보이지 않아 하느님 관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욥처럼 신앙이 있고 관상 능력을 지니게 되면
원망을 하건 질문을 하건 하느님께로 눈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눈을 향하고 원망을 하고 질문을 해도
하느님께서 금새 당신을 나타내보이시고 응답하는 것은 아니지요.
보통의 우리 경우, 하느님 부재 체험을 오랫동안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 것인지,
계시더라도 나와 함게 계시고 나의 고통을 굽어보시는지 의심을 하고,
의심을 넘어 하느님을 부정하거나 자기 인생에 대해 절망케도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도 욥처럼 기어코 하느님을 뵙고야 말겠다는,
이 세상에서 못 보면 죽어서라도 뵙고야 말겠다는 관상 의지가 있어야지요.
제 생각에 성인과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고통과 죽음 안에서도 하느님을 관상하고,
고통과 죽음 넘어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성인과
아직 그런 능력이 없고 의지도 없는 사람의 차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위령의 날을 지내고 위령을 달을 보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직 이런 사람이 아닌지 성찰하면서 아울러
죽어서도 아직 하느님을 뵙지 못한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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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간은 유난히도 단풍의 아름다움에 대해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같습니다. 단풍은 꽃의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향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더 매료당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꽃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 어떤 매료당함입니다.
사실, 잎은 새싹일 때부터 단풍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이미 잎 속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사실, 그 아름다움은 퇴색의 아름다움이요, 사라짐의 아름다움입니다. 곧 죽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이미 새싹일 때부터 품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도 자신의 몸 안에 본래부터 살아있는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는 사건이 됩니다. 이처럼, 죽음 한가운데 생명이 있고, 죽음 한가운데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 없는 생명도, 죽음 없는 사랑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질병과 죽음을 마치 원수처럼 여기며, 그것을 피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 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에 미치면, 사실 죽음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병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죽지 않으려는 것은 단지 자신에 대한 애착일 뿐! 그러니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위해 죽는 법을 배워야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남을 위한 죽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죽음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탄생처럼 신비롭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아니, 죽음이 있기에 인생은 신비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죽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살아있으면서도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존재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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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 대에 재물의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냐’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우리는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면서도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어느 인디언의 기도를 옮겨 봅니다.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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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되,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느님 나라에 올라가시도록 기도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영혼을 위로하여, 그들의 지녔던 의로움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의 빛을 받아 거룩하게 변화되기를 기도하는 날인 것입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께 인정받았지만 사탄이 이를 시험하는 바람에 뜻밖의 불행을 겪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탄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욥은 당신께 대한 신앙과 희망을 꺾거나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욥의 의로움뿐만 아니라 거룩함까지 믿으셨던 것입니다. 과연 사탄은 몸의 질병에다 재산 탕진, 자녀들의 불행까지 보내어 욥을 괴롭히고 궁지에 몰아 넣었지만, 욥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욥들이 그분 주변에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움을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불의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해 주셨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온유한 이들에게 같은 마음을 지닌 이들이 함께 살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땅’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공동체였습니다. 늘 의로운 일을 하려고 준비되어 있었던, 그래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살던 이들에게는 누구라도 그가 그분과 함께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가 필요한 이들에게 자비를 아낌없이 베푸셨으며 당신과 제자들도 마음이 자비로운 여인들로부터 자비를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보여 주셨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평화야말로 하느님의 큰 뜻임을 밝히시고 그들이 하느님을 닮은 자녀임을 칭찬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들 모두는 그들이 지닌 의로움 덕택에 현세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온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미 차지했다는 선언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 합격 선언은 오직 두 부류, 즉 마음이 가난한 이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심지어 의로움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당하며, 거짓말로 중상을 당하고 사악한 말로 비방을 받는 이들에게는 이 합격 선언에 더하여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까지 칭찬하셨습니다. 이들은 그 모든 박해의 고통, 즉 모욕과 중상 비방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박해를 가하는 악인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대항하는 대신에 박해의 원인이 되었던 의로움을 포기하지 않고 자그마한 흠결이라도 기억해 내어 더욱 정화시키려는 의지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세에서 인정받으려는 욕심 아닌 욕심조차 다 버리고 하느님으로만 자신들의 마음을 채운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선언받는 이 여덟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두 번째부터와 일곱 번째까지의 부류는 첫 번째와 여덟 번째 부류처럼 더 정화되고 더 성화되어야 할 연옥 영혼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연옥도 천당이나 지옥 같은 독자적인 범주가 아니라 천당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단지 그들이 천당에 들어가 완전한 거룩함을 누릴 때까지는 우리 남은 이들의 기도와 선행과 보속으로 성화를 완성함으로써 모든 성인들과의 통공을 이룩하는 신비를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 위령의 날이 전례에 배치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로웠지만 충분히 거룩하지 못하여 연옥에 계신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선행과 보속을 바쳐 드리면, 그분들이 천당에 들어가 온전한 거룩함으로 온전한 성인이 될 때에 다시 우리를 위해서 전구해 주실 것이고 우리를 도와주는 천사가 되실 것을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고백하며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남은 이들의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이 우리 인생의 목표입니다. 이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한 의로운 거룩함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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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아마 기억되는 ‘죽은 이’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특히 기억되는 분이 계시지요. 부모님이십니다. 작년에 어머니, 올해 아버지께서 하느님 나라에 가셨기에 더 많이 기억이 납니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위령의 날에 기억해야 할 분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연세가 많으셨으니 당연히 이런 날이 올 것이 분명한데도, 아직도 멀었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겪어야 할 ‘죽음’이라는 순간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휴가 때, 멋진 풍경이 펼쳐진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명 관광지라서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친구와 함께 온 어떤 청년의 말이 들리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다. 여기 정말 좋다.”
이 말에 친구도 “맞아. 여기 정말 좋다. 나도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둘의 말을 듣고서 눈물이 났습니다. 저에게는 모시고 올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생전에 함께 여행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좋은 하늘 나라에 계신다고 생각은 되지만, 그래도 허전한 마음입니다.
위령의 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면서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열심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도 반성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죽음’ 앞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가 죽음 앞에 후회합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도 그렇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후회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드는 후회이겠지만, 이 후회를 줄여나가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비결을 오늘 복음에서 진복팔단에 담아서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후회를 줄여나가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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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한, 움직이는 한, 누구나 다 현역이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장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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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동창 신부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인대 접합 수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위가 참 재미있습니다. 글쎄 손가락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인대가 끊어졌냐고 물으니, 손을 털다가 인대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너무 어이없었다면서, 이제는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니 무조건 조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동창 신부의 말을 듣다가 저 역시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맨 위의 계단에서부터 맨 아래 계단까지 엉덩이로만 내려왔던 며칠 전의 기억이 났습니다. 미끄럼 타듯이 위의 계단에서 맨 아래까지 엉덩방아를 찧은 것입니다. 그런데 엉덩이 살이 많아서인지 처음에만 아팠지,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미끄러지면서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동창 신부의 말을 들으니 엄청나게 운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넘어지고서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요. 정말로 감사할 일이 아닌가요?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감사할 일을 찾으면서 오늘도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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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당에 큰 행사가 있으면 신문사의 주차장이 바빠집니다. 성당에 바자회가 있었고, 그날에도 많은 분들이 신문사의 주차장을 이용하였습니다. 차를 빼는 과정에서 추돌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주차하고 있던 차 2대가 피해를 입었고, 벽도 손상이 생겼습니다. 사고를 내신분도, 사고를 당한 분도 모두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원만하게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차도 수리할 수 있었고, 벽도 고쳐 놓았습니다. 저도 예전에 운전을 하면서 실수로 버스의 범퍼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버스는 거의 피해가 없었지만 제 차는 앞부분이 밀려들어왔습니다. 보험사에 전화를 드렸고, 직원이 와서 해결 해 주었습니다. 제가 운전하고 가는데 트럭이 저의 범퍼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고의 위험이 있어도 안심하고 운전할 수 있는 것은 보험이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뉴욕에 살고 있지만 같은 교구의 신부님들이 사목하는 성당을 방문하곤 합니다. 서부의 타코마, 동부의 필라델피아와 워싱턴 DC, 중부의 달라스가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제게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잠자리도 마련해 줍니다. 서부에는 같은 교구의 사제는 없지만 명예기자와 서부지국장님이 있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타코마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산행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과 함께 운동을 해서 좋습니다. 워싱턴 DC의 신부님은 이야기를 좋아해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니 그것도 좋습니다. 달라스의 신부님은 함께 영신수련을 했기 때문에 영신수련의 경험을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자동차의 운전이 보험이 있기에 안심할 수 있다면, 미국에서의 생활은 같은 교구의 사제들이 있어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의 운전에는 보험료가 필요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신학교에서 살았던 추억과 인연이 있기에 즐거울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는 보험료가 있고, 미국 생활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신학교에서의 추억과 인연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한 보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위한 우리의 삶과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보험료는 내지 않으면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추억과 우정은 신뢰가 깨지면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보험은 연체를 했어도, 신뢰가 깨졌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정성껏 기도를 하면 전대사가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연옥의 영혼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죽음은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죽음은 현재의 순간에 충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죽음은 고통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픔도 끝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 하루 감사할 일들이 있다면 무엇인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다면 무엇이 있었는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나 자신에게 미안했던 일들이 있었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바쁜 일상 중에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뒤를 돌아보면 감사할 일, 고마운 일, 행복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받는 것들이 많았는데 주는데 인색한 적도 많았습니다.
위령의 달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므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현재 우리들이 바라는 것들이 과연 영원한 삶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영원한 삶에 장애가 되는가! 묵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합당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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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단 하나의 소원所願
- “잘 살다가 잘 죽는 것뿐입니다!” -
어제가 ‘모든 성인들(All Saints)’의 대축일이었다면 오늘은 ‘죽은 모든 이들(All Souls)’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도 주님 안에서 살아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천상 성인들은 우리를 위해, 또 우리는 천상 성인들과 함께 부활의 희망중에 정화중인 죽은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미사신청하는 분들을 보면 생미사와 연미사가 반반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많은 분들이 죽은 친지들은 물론 불쌍하게 죽은 이들, 자살한 영혼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가련한 영혼들, 불쌍하게 버림 받은 영혼들, 불쌍한 낙태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연미사를 봉헌한다는 사실은 그처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을 진지하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32년전 사제서품식때 가족 사진을 책상앞에 놓고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사진을 보면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세 형들이 지금도 주님 안에서 살아있는 듯 느껴집니다. 요셉 수도원 정주하기 만 33년 동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주변에서도 지인들이 하나 둘 계속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아무도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누구도 생자필멸生者必滅,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자주 소원이나 좌우명, 유언이나 임종어, 묘비명을 생각하며 삶을 추스르게 됩니다. 임종을 담당하는 호스피스 관계자들의 말을 들으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지 않다 합니다. 거의 대부분 죽는 순간까지 살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합니다. 참으로 온전히 주님께 자기를 맡기고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드물다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또 제 소원은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죽는 그날까지 새벽마다 매일 강론을 쓰고, 산책하며 기도하고, 그리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제 단 하나의 소원입니다.
매일 강론은 매일 미사준비입니다. 날마다의 매일 강론은 저에게 하루의 양식이자 하루 삶의 의미, 삶의 중심, 삶의 방향이 됩니다. 내 주님 사랑의 고백이고 운명이자 유언이요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 됩니다. 미사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원이 담겼는지요!
무엇보다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는 첩경의 지름길은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갖고 갈 것은 주님과의 관계, 믿음의 관계, 희망의 관계, 사랑의 관계, 즉 신망애의 관계 하나뿐입니다. 관계의 준비 없이 지내다가 갑자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겠는지요! 그러니 날마다의 삶은 날마다의 죽음 준비인 것입니다.
참 좋고 깊은 관계의 손님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듯이 참 좋고 깊은 관계의 신자는 빈손으로 와도 하느님께는 반갑고 기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하루, 몇 일, 몇 달, 몇 년 만으로 깊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평생 관계입니다. 과연 하루하루 날마다 깊어가는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인지요?
하루하루 날마다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깨달을 것입니다. 어제 읽은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록중 일부를 나눕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의 묵상에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하나, “여행이 즐거우려면 세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1.짐이 가벼워야 한다/2.동행자가 좋아야 한다/3.돌아갈 집이 있어야 한다.”
둘, “세상에는 없는 게 세가지 있는 데, 1.정답이 없다/2.비밀이 없다/3.공짜가 없다.”
셋, “죽음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것 세가지, 1.사람은 분명히 죽는다/2.나 혼자서 죽는다/3.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넷,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 세 가지 1.언제 죽을지 모른다/2.어디서 죽을지 모른다/3.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이래서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그대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날로 주님과 신망애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지혜서의 의인의 이의 모범입니다. 주님과 신망애의 관계가 날로 깊어가는 의인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며,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불사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입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당신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그러니 지혜서의 의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와 일치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찬미와 감사의 기도(마태11,25-26)’를 통해, 또 절절한 ‘아버지와 하나됨의 고백(마태11,27)’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해 하루하루 날마다 영원한 안식처 주님 안에 머물러 예수성심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불편한 멍에는 주님 온유의 편한 멍에로, 내 무거운 짐은 주님 겸손의 가벼운 짐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잘 살다가 잘 죽는 길은 이길뿐이 없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인생 광야 여정 중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며 당신 안식을 선물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9-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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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어디 있는지 들려 주십니다.
"행복하여라."(마태 5,3)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부르시는 이들이 누구인지 들어 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한 이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로운 이들,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커녕 뒤쳐지고 무시당하고 없는 듯 살아갑니다. 더 가지기 위해 큰 소리를 내거나 남을 짓밟지도 못하고 권모술수로 제 배를 불리지도 못하는 이들이지요. 남이야 죽건 말건 자기만 성공하면 그만인 세상에서 이들은 점점 더 약해지고 가난해집니다. 필요할 때는 그들을 찾아 조언을 구하지만 그들의 지혜와 중재로 상황이 나아지면 그들은 이내 잊혀지고 말지요. 그런 이들에게 행복하다 하시는 예수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속이 규정하는 행복과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돈이 많으면, 건강하면, 권력이 있으면, 외모가 출중하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욕망이 충족되면, 타인의 주목을 받으면 행복할 거라며 유혹하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언젠가 우리가 본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성삼위 하느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찐 행복을 위해서 세상이 제안하는 경쟁과 독식, 향락과 이기심을 견제하며 영육의 균형을 잡아나가지요. 더 취할 수 있어도, 더 이기적일 수 있어도, 더 큰소리칠 수 있어도 스스로 내려놓고 뒤로 물러서고 침묵하며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말씀보다,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말씀을 듣고 싶어, 내 것 아닌 것은 미련 없이 내려놓지요. 그 말씀을 들을 때 영혼에 충만히 번지는 행복을 이미 체험한 까닭입니다.
제1독서에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바로 그 영광스런 하느님 나라를 마주합니다.
"저들은 어링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구원의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의 앞에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이들이 늘어섰습니다. 희고 긴 겉옷은 그들의 순결과 일편단심, 열렬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흰 빛이 어린양의 피로 빨아서 나온 색이라고 합니다. 눈물과 가난과 고통과 박해와 죽음으로 얼룩진 옷이 어린양의 피를 통해 희어졌다는 사실이 참 신비롭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를 더 정화되고 성화된 존재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지요.
제2독서는 우리에게 지복의 희망을 선사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지상의 순례 여정을 마치고 주님을 뵙게 되는 날, 우리에게 새겨진 무수한 눈물 자국과 상처들과 고통의 얼룩들이 우리를 증거할 것입니다. 그분은 단박에 우리를 알아보시고 우리가 당신처럼 되기를 허락하실 것이지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고 그분처럼 되는 건 우리와 그분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때가 바로 하느님의 모상인 피조물로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한 귀향의 절정이 되리라 믿습니다
"행복하여라."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면, 아니, 행복하지 않다면 세상의 기준으로 그런 건지, 믿음의 기준으로 그런 건지 곰곰이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모든 성인들의 행복을 관상하며, 성인들과 한 목소리로 행복을 노래하고 주님을 찬미하면 좋겠습니다. 이 탐욕스롭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말씀을 꼭 붙잡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성인이 되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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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평화를 빕니다♡
어제는 이 '지상교회'가 '천상교회'와 소통하는 날이었고, 오늘은 '연옥교회'와 소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은 모든 이들,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연옥에서 해방되어 천국에 오르기를 기도합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오를 수 없고, 산 이들의 기도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가장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우리의 '기도' 때라고 합니다. 특히 천상교회와 연옥교회와 지상교회가 함께 만나는 '미사' 때이고, 우리의 '식사' 때라고 합니다. '식사 후 기도' 때문에.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라는 식사 후 기도가 불쌍한 연옥 영혼을 구할 수 있는 큰 기도입니다.
그러니 '식사 후 기도'를 잘 바치도록 합시다!
우리는 죽은 다음 연옥에서 단련 받지 않고, 곧바로 모든 성인들이 기뻐 즐거워하고 있는 천상교회로 들어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오늘 제1독서가 전하고 있는 '욥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또 그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하느님의 벌이라는 친구들의 말에도, 끝까지 견디어 내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제2독서가 확인시켜주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 굳은 믿음과 기억 안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천상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 가난한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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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첫째미사-----------------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에서 ‘과거의 오늘’이라고 하여 몇 년 전에 찍었던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웃는 얼굴들 사이에서 갑자기 하느님의 곁으로 가신 분이 보였습니다. 함께 만날 수도,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도 없는 지금이 왠지 미안해졌습니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내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외면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했습니다. 그런 저를 사제로, 동료로, 동행자로, 그리고 친구로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감사함에 그분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가난했던 마음을, 그의 슬픔과 아픔을, 그의 부드럽고 따뜻했던 마음을, 그의 간절했던 호소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를 위하여 많은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였지만, 그래서 나보다 더 눈물 흘리고 아파하였지만, 그럼에도 행복해하였음을 깨닫고 감사해하며 미안해하는 것이 그리움입니다. 저는 지금 그 사람이 너무 그립습니다. 그런 그리움을 더욱 많이 떠올리고 싶습니다. 나의 삶에서, 나의 지난 시간 속에서 그 그리운 모습들을 추억합니다.
또한 오늘 누군가의 그리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그들보다 더 아파하고 힘들더라도, 그들이 나를 외면하고 멀리하여도 그들에게 그리움이 되어 주고자 더욱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들의 그리움이 될 수 있어 지금 행복합니다.
---둘째미사------------------
대형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포장할 종이 상자를 고릅니다.
산 물건이 적지 않은데 한 번에 옮기기로
마음 먹고 무리하게 큰 상자를 골라봅니다.
물건을 담고 상자를 드니 굉장히 무거웠지만,
그래도 옮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왜 이렇게 많이 샀을까?’
‘이 물건이 다 필요할까?’ ‘나누어 담을 걸!’ 하는 후회와 짜증이 밀려옵니다.
함께 간 친구가 같이 들자고 합니다.
그런데 상자에 손잡이가 없어 불편하고,
둘이서 보조를 맞추자니 무거움은 줄었으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씩씩거리며 상자를 주차장까지 옮기고는
마주 보고 웃으며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그래도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모두 자신의 짐이 버겁고 힘겹고 고통스럽습니다.
또한 그 무게는 절대 가벼워지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어쩌면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함께’ 있기에 견디고 버텨 냅니다.
짐을 같이 옮겨 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누군가 내 짐을 같이 짊어 주고 있기에, 때로는 불평하고 짜증도
부리지만 함께 웃을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세상에 함께 있지 않은, 돌아가신 분들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같이 짐을 짊어 드려야 할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 그것은 바로
그들의 힘겨움에 함께하는 우리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 ‘함께 있어 줌’, ‘같이 들어 줌’은 그들이
좀 더 견뎌 낼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이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셋째미사-----------------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독서나 복음 말씀을 읽다 보면 죽음이라는 말이 제법 자주 등장하지요. 저 또한 강론이나 강의 때 “예수님와 함께 죽고 함께 살라.”고 이야기하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저는 누구보다도 오래,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살면서 또한 죽을 수 있을까요? 교회에서 말하는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동안 이런 고민을 안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언뜻 모순되게도 보이는 교회의 가르침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어떤 삶의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지 고민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상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였습니다. 단순히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뛰지 않아 의식이 없는 그런 죽음의 상태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적 죽음, 용서할 수 없는 미움으로 가득 차 마음과 머리 속에서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가하는 심리적 죽음,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것만을 요구하고 채우려는 신앙적인 죽음 말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를 죽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처받고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고 누군가를 이용하고 미워하고 차별하면서 죽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비우기보다는 타인의 것을 빼앗고 상처 내며 외면하지요. 또한 우리는, 때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스스로를 죽이려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의 처녀들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조금씩 비우고 희생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는 결정적인 순간을 준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 특별히 내가 삶 속에서 준비하고 있는 죽음과 희생, 그리고 나눔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자기 자신마저 내어놓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을 준비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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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직 연옥에 남아있는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연옥이 어떤 곳인가를 한번 보겠다.
연옥은 끝이 있는 일시적인 정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누구나 결점은 있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죄스런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더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결점이 있는 부당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점도 용납이 안 된다. 이같이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인간적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부족한 것과 결점을 기워 갚는 그것을 연옥이라고 한다. 이 연옥은 마지막 정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죄스러운 결점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통해서 정화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와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리용 및 피렌제 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었다.
연옥에서의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정화 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보속을 선행이나 기도로써 대신에 할 수 있으나 연옥의 영혼은 더는 무엇을 할 수 없고, 수동적인 형태로 하느님의 정의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 정화와 속죄되는 상태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有限的)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같지는 않다. 각자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다음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으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교회의 기도와 선업(善業), 즉 신자들의 기도로 단축 또는 경감시켜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 내지 단축해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의 삶 속에서도 그 예를 들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그 자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그 빚을 대신 갚으려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대도(代禱)를 한다고 할 때, 즉 대신 고행(苦行)을 한다든지 대신 속죄(贖罪)의 선행을 하느님께 보여 드린다고 할 때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 영혼을 위해서, 그 영혼의 명예회복,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이 행위는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미사를 통해서 지상교회는 연옥의 영혼들과 통공을 나누고, 만일에 그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기도의 은혜는 다른 영혼에게 베풀어지며, 천상에 있는 그 영혼은 아직도 이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있는 지상교회를 위해 기도해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연옥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다 보속한 후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나아갈 것이며,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고, 그분의 신비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모든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영혼들을 위한 특별 기간(위령성월)도 마련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루 빨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일치하도록 선행으로써, 기도로써,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모든 성인의 통공”을 기억하면서이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선행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본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미사 동안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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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첫째 미사."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시 만나는
기억의 신비이다.
잡으려고
애쓰지만
그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그러기에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들 인격이다.
인격은 사랑을
지향한다.
하느님 사랑이
생명의
창조이며
인격의
죽음이며
부활이다.
우리에게는
인격을
살리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죽음을
위로하시고
따뜻이
안아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예외없는
죽음은
우리존재의
적나라한
본모습이다.
하느님 아니시면
어찌할 수 없는
가난한 실존이다.
삶을 부정하는
것은 죽음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 가야 할
생명의 질서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고유한
영역이다.
사랑을 느끼는
사랑의 시간이
생명이다.
생명은
십자가를 통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죽음으로
십자가를
얻는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처럼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끝까지 믿으셨다.
죽음이 있기에
구원이 있다.
기억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은
우리모두가
하느님을 향해
오늘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서와 시간의
차이일 뿐이다.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며
다시금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를
깨닫게되는
위령의 날이다.
맑고 행복한
죽음이란
끝없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다.
지나가야 할
죽음의 여정이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
다시 함께 할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억과
기도 사이에
삶과 죽음
우리의
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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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송영진 모세 신부님.
< 희 망 >
‘위령의 날’의 정식 명칭이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분들이어서
기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영혼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 영혼들이 우리의 기도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을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그들 대신에 보속을 하기도 합니다.
(회개는 죄를 지은 사람이 해야 하지만, 보속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믿고, 천국, 연옥, 지옥의 존재를 믿는 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태 22,32).”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죽음이라는 것’에게 빼앗기는
무능한 분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런데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을 아무에게나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공정한 분’이십니다.
그 자격을 심사하는 일이 곧 ‘심판’입니다.
심판결과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직행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직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으로 직행할 정도로 완벽하지도 않고,
지옥으로 직행할 정도로 악한 것도 아닌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연옥이 존재해야 합니다.
(없는 연옥을 우리가 마음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믿기 때문에 당연히 연옥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직행할 정도로 악하지는 않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으로 직행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10).”
이 말에는 연옥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주님이신 분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도 돌보시는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연옥 영혼들은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연옥 영혼들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기도문이 개정되기 전에 사도신경에 ‘고성소(古聖所)’ 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승’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성소’와 ‘연옥’은 뜻에서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주님께서 고성소에(저승에) 가셨다고 우리가 믿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들도 구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천국, 연옥, 지옥을 ‘특정 장소’로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람들의 상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곳이고,
동시에 그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평화와 행복을 얻어 누리기를 희망하면서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도 하고, 그 평화와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 평화와 행복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연옥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참고 견디면서 ‘구원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고,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우리 인생은 연옥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구원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지옥은 완전한 절망만 있는 곳이고, 그런 상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금 희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완전한 절망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5장에 나오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경우에,
그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더 나빠지기만 하는”(마르 5,26) 상태였는데,
누군가가 예수님의 소문을 전해 주었고, 그 소문을 들은 뒤에는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마르 5,27-28).
(연옥은 바로 그런 곳이고, 그런 상태입니다.
고통 속에 있지만 희망이 있어서 참고 견딜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서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면서(마르 5,29.34)
천국을(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사는 동안에 천국을 체험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나 자신’이 천국을 체험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어야 연옥 영혼을 위해서 제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절망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라면
남을 위해서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어떤 힘든 일을 만나도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사랑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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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기 19,27)
떨어진 잎새들, 말라비틀어진 채 달려 있는 나뭇잎들을 보면 쓸쓸함이 밀려들기도 합니다. 생명의 끝자락을 보는 것 같아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생명의 다른 얼굴일 뿐 결코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위령성월을 모든 성인대축일로 시작하고 바로 다음 날인 위령의 날에 죽은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생각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죽은 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의 확인일 뿐 아니라 죽음과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자신의 실존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죽음은 새로운 출발점입니다(2티모 4,6-8. 18).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죽음을 넘어선 상호 소통과 연대성 안에서 죄와 영혼의 어두움과 온갖 고통을 안고 죽어간 이들의 속죄를 대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가 나약함과 한계를 안고 죄 중에 죽어간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간 이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전쟁과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 고문과 억압, 사회적 차별 등으로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제 죽음을 건너 영원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고통에 대해 하소연합니다(욥기 19,23). 그러나 그는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며’(19,25), 살갗이 벗겨진 뒤에라도(19,26) 자신의 눈으로‘기어이 그분을 뵙고야 말리라’(19,27)라고 고백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끝까지 죽음을 넘어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희망이시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온 인간은 희망의 존재이며,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고 그 사랑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명확히 드러났기에(로마 5,6-8)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로마 5,5)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고통을 견뎌내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곧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고통이 제아무리 크다 해도 모든 것이 종말을 맞는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려면 잘 죽고, 잘 살아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의 일치를 통해 그분을 차지하고 그분 안에 머물 때 현세에 살 때나 육신의 죽음을 맞은 이후에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영으로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랑과 용서로써 평화를 이루며, 정의이신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이들이야말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도 사랑의 마음으로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나아가 희망이신 하느님 안에서 연대와 투신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일상의 고통을 사랑으로 견디어내는 ‘죽음 연습’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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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불꽃놀이 불꽃처럼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다 알차게, 보다 계획적으로, 보다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입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또한 삶이란 것도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 ‘작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하루 삼시 세끼 섭취하고 연명하는 데 만족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의미있고 충만한 삶으로 엮어가는 것, 축복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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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나도 정화된다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리는 오늘은 우리도 그들과 같은 운명임을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부터
연옥벌을 면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배가시킵니다.
연옥의 아주 짧은 고통도 이 세상에서 받아야 할 고통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내 자신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줄 모른다면 사랑에서 오는 참다운 위로를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매여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버리라고 강요하실 수 없으십니다.
‘나’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부터 나를 버리기로 한 사람은 불완전할지라도 천국에 들어올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입학했을 때 다른 초등학교에서 온 한 여자아이가 너무 예뻐서 청소하면서도 그 아이만 쳐다보았습니다.
용기 있는 친구가 그 여자아이와 사귀며 영화도 보고 왔다고 말할 때 그저 부럽기만 했습니다.
삼 년 동안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가면 더는 보지 못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편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만 써서 소문이 나면 안 될 것 같아서 여러 명의 여자아이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창피해 죽을 지경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도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자기들끼리는 정보교환을 한 모양입니다.
‘나’는 세상 것에 집착하면서 그것을 얻어내게 하지 못하는 ‘자존심’입니다.
그냥 사람을 지옥으로 향하게 만드는 뱀입니다.
대학에서는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화이트데이라고 해서 선물도 하고 나름대로 답장도 기다리는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남을 이어갔지만, 행복이 ‘1’이라면 나머지 ‘9’는 그 사람에 대한 서운함과 잃을 것과 같은
걱정으로 지냈습니다.
한 사람을 사귀는 행복을 느끼기는 했지만 ‘1’을 위해 ‘9’의 희생을 해야 하는 이상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래도 여러 명에게 편지를 해서 한 통도 답장을 못 받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런 고통스러운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그 집착이 사라졌을까요? 왠지 방학이 기다려졌습니다.
신학교에 머무는 삶이 전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가을을 탔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받는 고통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통은 남아 있었습니다.
집착이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연옥의 고통과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집착을 완전히 끊고 죽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우리 자유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끊음을 시작한 사람에게 정화의 시간을 줄 뿐입니다.
저도 신학교의 연옥 생활을 거치며 조금씩 사제가 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런 집착이 생기지 않아 참으로 자유롭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와 이 연옥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의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도와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해주셨고 아버지는 믿어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힘든 일을 나가셔야 함에도 밤새 한숨 못 주무시고 새벽에 들어와 “네가 선택한 대로 해라.”라고 하시며 저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부모님께서 바깥세상에서 믿어주시고 기도해주시는 것이 신학교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어떤 신학생들은 부모님이 걱정되어 중도에 포기하고 신학교를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을 주시는 분들 덕분으로 어떤 신학생들은 정화의 과정이 빠르게 끝납니다.
이것이 연옥 영혼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주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영화 ‘브루클린’(2015)도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브루클린은 미국 이민이 유럽의 하나의 흐름이 될 당시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에일리스는 못된 상점 주인 밑에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미래도 없이 힘겹게 사는 청년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이 도와줄 테니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언니와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그들에게 짐만 되느니 희망의 땅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합니다.
배를 탈 때부터 미국에서 직장에 다닐 때 모두가 낯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머니와 언니가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토니라는 미국인 남자가 다가옵니다.
토니는 배관공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일리스가 만난 첫 아이리시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토니 때문에 왠지 미국 땅에서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언니는 에일리스가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자신의 병을 숨기고 동생을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에일리스가 뒤늦게 언니 무덤이라도 가보기 위해 한 달 동안 떠나가려고 합니다.
토니는 자신과 결혼하고 가라고 합니다.
에일리스는 토니를 너무 사랑했기에 둘만 몰래 결혼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이 좋습니다.
에일리스가 결혼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의 미국식 스타일에 빠져듭니다.
그 동네 금수저인 짐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타지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고향의 익숙함에 빠져버린 에일리스는 이제 짐을 좋아하며 토니의 편지도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를 배 아파하던 이들에 의해 에일리스가 미국에서 결혼하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에일리스는 다시 눈을 뜹니다.
자신이 떠나가 된 이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돈이 최고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동네였습니다. 에일리스는 자유의 땅으로 다시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눈에 밟힙니다.
어머니는 에일리스의 마음을 알고 그녀를 놓아줍니다.
당신은 혼자 있어도 되니 행복을 찾아 떠나라고.
그리고 에일리스는 이제 미국에 정착하려는 아이리시가 아닌 토니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완전한 아메리칸이 됩니다.
천국에 정착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천국에 살고 싶다가도 이 세상의 집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갈팡질팡합니다.
이것이 지옥의 고통과 별반 다름없는 연옥의 고통입니다.
이때 에일리스에게 힘을 준 이들은 언니와 어머니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아이리시 에일리스가 완전한 아메리칸 에일리스가 되게 해 줍니다.
천국으로 떠나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기 위한 이 세상에서의 기도와 희생은
분명 헛되지 않고 함께 천국으로 향하는 참사랑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아직 이 세상의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여 지옥의 고통과 버금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합시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이 이미 내가 연옥의 정화과정을 통과하는 길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연옥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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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승화 시몬 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행복은 언제 주어지는 걸까요?
오늘을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발견한다면,
하느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우리에겐 행복이 주어집니다.
동시에 그 행복은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다가올 내일 역시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행복은 한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 행복을 향한 자세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내일에 대한 희망을 알려줍니다.
곧,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서 받을 상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향해 걸어간 이들
마지막 순간이라도 하느님을 바라본 이들
또 하느님을 모르더라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간 이들
이들은 모두 하느님과 함께 하며
평화로움 속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아직은 그분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기억하는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만날 수 있음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날 우리에게 소중한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충만한 생명 안에서 기쁨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언젠가 만나게 될 그들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하며
오늘 그분을 위해 기도하는
그런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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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김 로마노 형제님.
11월 2일 위령의 날 제1독서 (욥19,1.23-27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5)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욥은 앞에서 자신의 사연이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23절, 24절) 자신의 사연과 무죄함이 후대에라도 전해져 입증되기를 갈망하였다.
이어지는 본절에서는 욥은 구원자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호해 주실 것이란 희망을 피력한다. 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극한적 고통에 처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욥의 심리적 상태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욥은 애타는 자신의 상황,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피력해 왔었다. 또한 누차 친구들의 말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친구들은 더욱 강도를 높여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실 하느님을 증인이요, 변호인, 재판관으로 청하면서, 그분이 자신의 말을 공정하게 증언하고,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의롭다고 판단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욥의 상황이나 심경등을 감안해서 이해할 때, 본절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 본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표현은 '구원자' 이다. 본절에서 '나의 구원자' 에 해당하는 '꼬알리'(goalli ; my Redeemer)는 '구속하다','친족으로서 행동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까알'(gaal)의 분사형에 1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 사용된 '까알'(gaal)은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민수35,12),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친족)의 소유지(기업)를 되사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레위25,25.26), 또는 친족이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등(룻기2,20)의 행위과 관련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욥의 억울함을 하느님께서 구원자가 되셔서 해결해 주시고, 그 진실성을 증언해 주실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욥이 극심한 고난과 혼란 가운데서도 구원자의 등장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즉 욥은 인간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구원자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천주 성자 제2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욥이 지금 자신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막연하게나마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등장하실 것을 염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의미는 후반절의 '그분께서는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가 ~서시리라' 에 해당하는 '야쿰'(yaqum)은 '서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쿰'(qum)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일어선다'는 것은 특정 공동체에서 자기 의사 표명을 위해, 또 법정에서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욥은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서실 것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술을 함에 있어, 욥은 '나는 알고 있다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알고 있다네'에 해당하는 '야다으'(yadah)의 완료형에 1인칭 주격 접미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사용된 '야다으' 동사는 주로 남녀가 동침하는 것과 관련해서(창세4,17,25), 실제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생생하게 현장에 참관해서 듣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즉 가장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확실한 앎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욥이 본문에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구원자로서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원하는 바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일면 자신의 무고함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확증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6)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본절은 욥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 앞에 설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 가운데 '몸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라진다.
이에 해당하는 '우밉베사리'(umibbesari; 내 몸으로; yet in my flesh)는 접속사 '와우'(wau)에 '~로부터'(from)란 의미를 지닌 전치사 '민'(min), 그리고 '몸'(살) 을 의미하는 명사 '빠사르'(basar; flesh)에 1인칭 소유격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표현에 대해 첫번째 해석은 전치사 '민' 을 분리의 의미로 보고, 욥이 죽은 후에 육체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느님을 뵈올 것이라는 견해이다.
또 다른 해석은 '민'을 출발의 의미로 보아,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하느님을 뵈올 것이란 견해이다.
이것은 욥이 죽기전에 지금의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목도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전자의 의미를 취하며, '민'(min)을 분리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본절의 상반절인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라는 표현과 어울리며, 욥이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것을 확신한 사실이 본서 전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감안할 때에도 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앞서 9장 32절에서 욥은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것에 대하여 회의와 절망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분은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 없다네." (욥9,32)
따라서 본절인 19장 26절은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앞선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인식할 수 만은 없다.
이것은 두 본문 사이에 그 전제, 즉 욥이 가정하는 상황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9장 32절은 육체가운데 있는 현 상태, 즉 이승에서는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과 만나 쟁론할 수 없다는 의미인 반면, 본절은 자신의 가죽이 썩은 후, 곧 내세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이것은 결코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욥은 특별 계시가 완성된 신약 시대의 백성들처럼, 죽음 이후 인간은 하느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천국과 연옥과 지옥으로 가며, 종국에는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등과 같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욥기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욥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영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정도의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령의 날] 오늘은 3대의 독서와 복음을 하나로
*첫째미사
(독서) 로마5,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 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 예수님의 피로 죄인이 거저 의롭게 되는 것, 그것이 기쁜 소식, 복음이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의 피로 죄가 다 씻겨 졌기에 그 길만이 구원의 진리라 말하면 박해를 받는다.
(복음)마태 5,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아멘.
*둘째미사
(독서) 5, 17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예수)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 그 말씀을 믿지 못하는~
(복음) 마태11,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려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사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오라 하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죄를 대속 하신 내 십자가였던 것, 그 진실을 배워 깨닫고 믿었을 때, 마음의 쉼(안식)을 살게 된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가신 것이기에, 그 믿음의 결과가 내가 지금 지고 있는 무거운 짐, 곧 자신의 의로움을 위한 종교행위를 내려놓는, 否認하는 그 버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째미사
(독서) 로마6,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그 구원을 얻기 위해 세상적인 내가 죽는 것, 그렇게 십자가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모든 죄가 없어져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요한12,7참조)
(복음) 마태25,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는 구원, 그 하느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신앙인, 어리석은 처녀들인 것이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교회)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10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 오늘의 모든 말씀의 결론은 “깨어 있어라”이다. 곧 말씀을 늘 준비하라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그 준비는 우리의 머리로, 지혜로 하면 안된다. 하느님의 “그 날과 그 시간”을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고 따라갈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을 청하고 구해서 그분께 의탁하는 그것이 참 깨어있음이다.(말씀, 생수는 또한 성령이다. 요한7,39) 그래서 어리석은, 헛된, 그 거짓말에 속지않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 하느님의 약속, 그 십자가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 성령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기억(기도)하는 ‘그 되새기는 신앙을 살라’ 하시는 것이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마태11,29)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십자가)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아멘.!!!
11월 2일 위령의 날 첫미사 복음 (마태5,1-12ㄴ)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1~12)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은 10절에 나오는 여덟번 째 행복의 보충 내용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3절~10절까지의 전체 팔복(八福)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이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 때문에'에 해당하는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heneken dikaiosynes; for righteousness)와 비교할 때, '~때문에', '~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니는 '헤네켄'(heneken; for)은 동일하고, 다만 '의로움'(디카이오쉬네스;dikaiosynes)이 '나'(에무; emou; me)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가 있다.
사실 마태오 복음 5장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로움'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righteousness)는 윤리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인 의로움이다.
즉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은 6절보다 종교적인 측면이 더 강한 의로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삶은 바로 '의로움', '의'(義)의 전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3~10절까지 나오는 팔복(八福)의 서술에서는 모두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토이'(autoi; they)인 3인칭 남성 복수 주격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는 '너희'에 해당하는 '휘마스' (hymas; you)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오 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 즉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는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자로 취급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또한 로마 지배 세력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반국가 사범이란 죄목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일반 믿지 않는 대중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 때문에 질시받고 부도덕한 자들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태오 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할 수 밖에 없기에, 이제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을 사용해서 이러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chairete; rejoice)의 원형 '카이로'(chairo)는 '기뻐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 be gla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는 '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agallo)와 '뛰다', '솟아나다'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hall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지금 극한 고난의 상황에 있어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는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토스'(misthos; reward)는 '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박해를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기준에 다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마태20,1~16; 루카17,7~10).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상이 크다'는 약속에서 '크다'에 해당하는 '폴리스'(polys; great)는 크기가 크다(large)는 뜻이 아니라 양이 아주 많은 (much) 것을 뜻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 지상의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믿는 이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박해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 때문에'(마태5,11)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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