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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말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 말의 중요성은 일찍부터 강조되어 왔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우리 속담을 비롯해, 「고기는 낚싯바늘로 잡고, 사람은 말로써 잡는다」(독일), 「바다는 사람의 손에 의해, 세계는 사람의 입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덴마크), 「친절한 말은 봄의 햇살처럼 따사롭다」(러시아)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더욱이 말하는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그 말은 엄청난 효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때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특히 학창 시절 교사의 말 한마디는 인생의 좌표가 되기도 하고, 좌표를 수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교사의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기도 하고 새로 운 꿈을 갖기도 하지만, 상처를 입기도 한다.
월간조선은 사회 명사 38명을 대상으로 「내 人生을 바꾼 교사의 말 한마디」라는 주제로 조사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설문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답해주었다. 설문 응답은 칭찬 한마디로 자신의 진로를 찾은 경우와, 관심과 배려로 자신의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질 수 있었던 경우, 교사의 꾸지람으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경우로 대별할 수 있었다.
성악가 엄정행씨, 영화배우 엄앵란씨 등은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열등생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탤런트 최불암씨,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선생님 의 칭찬에 고무되어 자신의 재능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시인 정호승씨, 소설가 박완서씨 등은 『글 잘 쓴다』는 한마디에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 전상국씨는 『너 같은 게 작가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하는 선생님의 말에 오기가 생겨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수필가 피천득씨, 숭실대 명예교수 안병욱씨 등은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오늘날 자 신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각각의 사연은 다르지만 공통점을 보면 칭찬이든 꾸지람이든 그것의 바탕은 애정이 배어 있어야 하고, 개인의 개성을 잘 찾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준 경우 매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설문을 통해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교사의 역할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설문 응답자들은 또한 「현직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 주었다.
「인성 교육을 중요시했으면 한다」, 「동기 부여를 해주었으면 한다」, 「지식보다는 지혜를 가르쳐 주길 바란다」, 「학생을 자식처럼 여기길 바란다」 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역시 공통점은 학생의 개성을 찾아 칭찬과 격려를 해줄 것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또한 「따끔한 충고도 필요하다」는 의견과 함께 「아무리 삐뚤게 나가는 학생이라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의견을 준 사람도 있었다.
한편, 설문에 응해준 사람 중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스승은 있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말이 없다면서 가슴속에 그런 말 한마디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며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칭찬 한마디가 열등생을 우등생으로
영동대 김재규총장은 칭찬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나도 할 수 있다. 나에게 능력이 있다」는 유능감이 있다. 하지만 이 유능감은 지도를 잘 받으면 현실로 나타날 수 있지만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면 소용이 없게 된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꾸지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분발하는 계기로 삼는 것은 유능감이 있기 때문인데, 유능감이 칭찬과 마주치면 2~3배의 도약을 가져오게 한다』
김총장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남 합천군 용주초등학교 시절 수학 성적이 「양」으로 저조했던 그는 6학년에 진급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담임인 마쓰다 선생은 그런 그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격려를 해주었다.『너는 조금만 하면 되겠다. 그래 자꾸 해봐라』 마쓰다 선생은 이런 말을 해주며 지속적인 관심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결국은 수학 성적을 정상으로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삼미그룹 부회장에서 웨이터로 변신해 놀라움을 던져주었던 서상록씨. 그의 어릴 적 별명은「바보」였다. 공부가 하기 싫어 누나가 가르쳐 주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는데, 그러다 보니 그만 바보로 낙인이 찍혀버렸고, 스스로도 바보라고 결정해 버리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 경북 경산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는 꼴찌에서 1, 2등을 도맡아 했다. 그러자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마저도 바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천재가 되는 전환을 맞는다. 분수의 덧셈을 배우고 있었는데, 얼떨결에 정답을 대답했다. 담임인 이상호 선생님은 그에게 『야 , 천재다』하고 칭찬을 해주더니, 수업 후 교무실로 불러 많은 선생님들 앞에서 칭찬을 해주었다. 그 한마디에 우쭐해진 서상록씨는 그때부터 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 정상적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그때 자신감을 얻어 검정고시로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서상록씨는 그후 15세쯤 집안이 어려워 낮에는 읍사무소 사환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때 만난 최정 선생님 말은 서상록씨에게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너희는 모두 하면 된다. 충분하다. 나도 교수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말에 자극을 받은 서씨는 결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인생이란 자연의 사계절과 같다. 언제나 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꽃피는 호시절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 여름 가고 가을 지나 다시 겨울이 오니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도 어려울 때면 최정 선생님의 이 말을 떠올린다고 한다.
성악가 엄정행씨의 스승인 홍진표 교수가 없었다면 오늘날 엄정행씨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엄정행씨는 경희대 음대에 진학했지만 오페라의 기본도 모르고 화성악도 힘들어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까지 했다. 그런 그가 홍교수로부터 개인레슨을 받을 기회를 얻었는데, 엄정행씨는 칸소네를 불렀다. 그의 노래를 듣고 난 홍진표 교수가 뜻밖의 칭찬을 해주었다.『목소리도 좋고 하니까 너는 뭔가 되겠다』이 한마디에 그는 용기를 얻고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성악가들은 유학을 다녀오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라 국립오페라단에서도 늘 조연밖에 못했지만, 홍교수의 한 마디는 그에게 유학을 다녀오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 말이었다고 한다.
영화배우 엄앵란은 굉장한 왈가닥이었다. 서울 미동초등학교 5학년 때, 하루는 아이들하고 책상 위를 뛰어다니며 놀다가 선생님에게 걸렸다. 『넌 구제불능이야』 선생님은 이 말 한마디와 함께 일주일간 정학을 시키는 등 그를 완전히 불량소녀 취급을 했다. 그때 엄앵란씨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좌절과 고민의 나날을 보냈다.
어쩌면 6학년 담임 홍혜은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엄앵란은 진짜 나쁜 길로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6학년 첫날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은 자신의 소개를 하더니 곧장 엄앵란이 누구냐며 물었다. 「5학년 선생님이 인수인계 했구나」하는 생각에 씁쓸하게 고개 숙이고 있는데 뜻밖의 말이 그에게 들려왔다.『날렵하고 예쁘게 생겼구나. 그래, 네가 400m 육상선수라고? 참 잘하겠다』 그리고는 그를 교탁 앞에 앉혀놓고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그는 침착한 아이가 되었고, 학교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선생님의 애정어린 칭찬은 엄앵란씨의 제2인생을 열어준 것이다.
재능을 발굴해 준 선생님의 말
『너는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이다음에 화가가 되면 잘될 거다』 오늘날 동양화가 김병종씨를 있게 한 칭찬 한마디이다. 전북남원 송정초등학교 4학년 때 정문자 선생님은 그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해 준 분이었다. 미술시간에 김병종씨의 그림을 지켜본 선생님이 해준 그 말은 단순히 칭찬 을 받았다는 기쁨 그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김병종씨에게 정문자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한 줄기 빛처럼 강하게 삶의 좌표가 되었다. 당시 조언자가 없는 시골에서 예술분야를 강력히 추천해 준 선생님의 안목과 사랑은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된 지금까지 정신적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 등에서 노래, 연극, 그림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는 고양공립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노래, 연극 등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하루는 미술시간에 미술 선생님이 앙드레 김의 그림을 보고『이 그림은 독창적이고 창의적이다. 굉장하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의 칭찬에 앙드레 김은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탤런트 최불암씨는 노인 역을 소화해 내는 데는 단연 으뜸이다. 그가 노임 역을 전문적으로 맡기 시작한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재학시절 은사인 이광래 교수의 한마디 때문이다. 그 한마디에 그는 연출자 지망생에서 연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 연기보다는 연출을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연기자의 조건은 지금과는 달라서 신성일처럼 잘생겨야만 했다. 하루는「어느 하늘빛」이라는 창작극의 연출을 맡아 연습을 하고 있는데, 극중 할아버지 배역을 맡은 친구의 연기가 영 엉망이었다고 한다. 연출을 하고 있던 최불암씨가 연기 시범을 보였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이광래 교수는『아예 네가 연기도 하고 연출도 해라』고 말했다. 이 말 한마디에 그는 연출자 최불암이 아닌 연기자 최불암이 된 것이다.
성우 배한성씨는 영화배우 지망생이었다. 그는 영화를 즐겨보고 영화에 서 본 장면을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흉내 내곤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미 영화배우로 불릴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런 그의 재능도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없었다면 계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울 고명중학교 2학년 국어시간이었다. 전시균 선생님이 「신숙주와 그의 부인」이라는 희곡으로 연극을 한번 해보자고 했다. 배역을 정하는데, 아이들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그가 신숙주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가 연기하는 것을 보고 난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배한성은 앞으로 연기 쪽으로 성공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아나운서도 있으니까 열심히 해라』 친구들에게도 늘 듣던 말이지만 절대적으로 존중을 하던 선생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배한성씨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는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도 중학교 국어 선생님의 칭찬이 계기가 되어 일찌감치 진로를 정해 노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인 김광림씨의 문학적 재능을 일깨워주신 분은 개성 송도중학교에 다닐 무렵 국어 선생님이다. 일제 강점기라 학생들은 종종 근로활동을 나가곤 했다. 한번은 모내기를 다녀온 후 작문시간에 근로활동을 한 소감을 적어내라고 했는데, 김광림 시인은 거머리에 대해서 썼다고 한다.
「거머리가 다리를 뜯고 피를 빠는 게 아프거나 두렵다는 게 아니라 첫째가 기분 문제다」라는 표현이었는데, 국어 선생님은 「기분 문제」라는 그의 표현을 보고 이렇게 칭찬했다. 『정말 독특한 표현인데? 첫째가 기분 문제다? 참 좋다』 하면서 허허 웃었다. 그 이후로 김시인은 글쓰기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져준 국어 선생님의 칭찬이 김시인에게는 글에 대한 자부심과 용기 그리고 표현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 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서울 숙명여자고등중학부 5~6학년 때(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2~3학년) 국어를 가르치던 월북 소설가인 박노갑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선생님은 글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특히 문장에 엄격해 일본식의 문장, 남의 흉내를 내는 허황된 미문(美文)을 싫어했다. 그래서 항상 강조한 것이,「어떤 물건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말이 하나가 있다」는 뜻의 플로베르의 말 「一事一言」이었다. 당시 글쓰기 수업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작가 양성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생님의 가르침은 곧 박완서씨가 소설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인 정호승씨는 대구 계성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생활이 어려워 집에 늘 빚쟁이가 들끓었는데, 그것이 싫어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하염없이 수성천변을 쏘다니다 집에 늦게 들어가곤 했다. 그 무렵 어느 국어시간에 소설가인 김진태 선생님이 느닷없이 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써본 적은 더더욱 없는 정호승 시인은 숙제를 제출해야하는 일주일의 기간 동안 내내 걱정만 하다가, 하루 전날 「자갈밭에서」라는 시를 써가지고 갔다. 어린 마음에 느꼈던 가난의 체험을 여름날 자갈밭에 나뒹구는 자갈들에 비유해 썼던 것이다. 정호승 시인이 숙제해간 시를 발표하자 선생님은 교단 아래로 내려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넌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앞으로 열심히 써봐』정호승 시인은 이 말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고, 이후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은 몰랐다고 한다.
소설가 김홍신이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데는 논산 대건고등학교 시절 수필가이면서 작문을 가르쳐 주셨던 김영배 선생님의 힘이 컸다. 작문시간에 「계절」을 주제로 글쓰기를 하였는데, 선생님은 그의 글을 보더니 『이렇게 훌륭한 글이 어디 있냐』 하셨다. 아이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에이』 하면서 야유하자, 선생님은 낭독을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너는 장차 작가가 될 수 있다』고 공개 적으로 칭찬을 해주었다고 한다. 김홍신은 부모가 의대를 권해 시험을 쳤지만 낙방을 하고, 김영배 선생님의 권유로 재수를 해서 국문과에 입학했다. 재수시절 그는 선생님의 칭찬을 새기며 단편소설을 습작했다고 한다.
이해인 수녀의 시적 감수성을 일깨워준 분은 서울 풍문여중 3학년 때 문예반 담당 임영무 선생님이다. 좋은 시를 소개해 주고 그의 시적 재능을 일찍이 알고 격려해 준 임영무 선생님의 한마디는 그가 수도자로 시인으로 꾸준히 정진하는데 꿈과 용기가 되었다고 한다.『하늘의 별처럼, 영롱한 보석처럼 이웃에 빛을 주는 삶을 살라』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부산의 동래여중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을 때, 여러 친구들을 데리고 서울역에 배웅을 나온 선생님이 이해인 수녀에게 해준 말 이었다.
계명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진홍 목사는 지방대 철학과 학생이라는 이유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학교에 정을 못 붙이고 있었다. 그 때 미국에서 돌아와 새로 부임해 온 소홍열 교수는 그의 그런 열등감을 씻어주었다고 한다. 소교수는 일대일 수업을 하며 학생들의 논리적 표현력을 향상시켜 주었는데 , 어느 날 그가 제출한 리포트를 보고는 『너의 글은 탁월하다. 정말 잘 썼다』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격려와 함께 글 쓰는 훈련을 받은 金목사는 실력이 부쩍 늘었고, 지금 그가 군더더기 없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표현과 설교를 할 수 있는 것도 당시 소교수의 지도 덕분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유인경 기자는 서울 청운초등학교 4학년 때 오명자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오늘날 기자가 된 밑거름이라고 말한다. 하루는 일기를 써가지고 갔는데, 그의 일기를 보고 『일기는 이렇게 자기의 느낌을 표현하는 거야』 하면서 유인경에게 일기를 낭독하게 했다. 그리고는 『너는 나중에 글을 쓰거라』하고 독려해 주었다. 그 후 선생님은 어린이 신문의 명예기자로 추천을 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선생님의 칭찬은 다른 반까지 소문이 날 정도여서, 그때 유인경 기자는 자신이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는 자신의 일생에 불을 켜주었다고 한다.
고건 전 서울시장은 1956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신입생 환영회 에서 당시 주임교수였던 민병태 교수의 말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자네들은 정치과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정치학과에 입학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기 바란다』그는 후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공부는 소홀히 한 채 총학생회 활동을 많이 했다. 정치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정치과 학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 그런데 4학년이 되자 민병태 교수의 말이 불현듯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한다. 학생회장을 한 덕에 당시 그에게는 유명한 정치인이나 국회의원 비서관이 되는 길이 열려 있었지만 그는 행정 전문가로서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것은 민병태 교수의 한마디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카피라이터 이만재씨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도 고달팠다. 6·25 때 북에서 전북정읍 내장산 근처로 피난을 온 터라 그의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 당시 초등학교 2학년생이던 그는 공납금도 못 내고 도시락도 싸가지 못하는 날이 거의 매일이었다. 그러자니 자연히 학교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고, 학교에 가기보다는 뒷산에서 산열매나 칡뿌리를 캐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임 선생님이 그런 그를 나직이 부르면서 한마디 했다.『너의 마음을 이해한단다. 공납금도 못 내고, 점심도 매일 걸러야 하는 네 마음 알아. 하지만 세상에 많은 위인들은 키가 작았단다. 나폴레옹도 너처럼 키가 작았지. 너는 키가 작고 똑똑하니까 노력만 하면 분명히 큰사람이 될 거야. 너는 성공할 수 있단다』선생님의 한마디는 열등감으로 가득 찼던 한 아이를 그 누구보다도 자긍심과 희망이 가득 찬 아이로 변화시켜 놓았고 그가 꿈을 잃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로 수필가 피천득씨는 경기중학교의 전신인 제일고등보통학교 시절의 고리야마 선생님의 한마디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일본인이었지만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신사참배는 미신이라고 말하는 자유주의자며 진보주의자였다. 고리야마 선생은 피천득씨를 특히 아끼고 사랑해 주었는데, 공부보다는 책 읽기에 정신이 없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학교 교육에만 구애받지 말고 자기 분야를 탐색하고 나아가라』 고리야마 선생님의 격려로 피천득씨는 공부가 뒤처졌어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고, 그의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숭실대 명예교수 안병욱씨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춘원 이광수 선생이라고 한다. 평양공립고등 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안병욱 교수는 춘원의 「무정」「흙」을 읽고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는 춘원에게 「나라를 빼앗긴 일제 암흑시대에 우리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고 묻는 편지 한 장을 보냈다. 얼마 후 춘원 선생이 회답을 보내왔다. 그 편지 속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당신 자신이 훌륭한 스승의 말을 배워서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것이 우리나라를 위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춘원의 한마디는 안병욱 교수가 뜻을 세우고 중학교를 마친 후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동시통역사이며 한국외대 교수인 최정화씨는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의 한마디」라는 주제를 듣자마자 곧바로 다니카 셀레스코비치 선생이 떠올랐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 제3대학 유학 시절, 그는 고비 때마다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의 말 한마디가 인생의 등불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최교수는 모든 것이 미흡하다는 생각 때문에 논문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그때 셀레스코비치 교수는 『너의 논문은 이미 무르익어 발표해도 괜찮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끝맺음을 할 줄 알아 야 한다』는 말로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박사학위란 게 운전면허와 같아서 처음부터 완벽한 주행 실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말과 함께 해준 그 한마디에 용기를 얻은 그는 무사히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한불정상회담 전담통역사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그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을 속상해 하는 것을 안 셀레스코비치 교수는 그 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만큼 네가 성공했다는 것이라 생각하고 항상 의연하게 묵묵히 길을 가라. 진실은 시간이 가면 밝혀진다.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말아라』하고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성공한 후 바쁜 일정 속에 보내는 그를 보고 『시간이 없을수록 사람을 만나는 데 힘써라』 하고 충고를 해준 셀레스코비치 교수의 말 한마디 는 최 교수의 오늘이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방송인 이상벽씨는 서울 숭문고등학교 시절 서기원 교장 선생님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학생들의 진학상담을 직접 하신 서기원 선생님은 그가 정치외교학과에 지망한다고 하자 만류하면서 충고를 해주었다.『이상을 좇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당시는 권력중심 사회요, 소위 빽 지향적인 사회라 「정치인이 이상인 시대 」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에게 학연도 없고 혈연도 전혀 없고, 더군다나 집안의 장남으로 형제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니 안정적인 직업인이 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미술을 잘하니 실용적인 산업미술학과를 가라고 권해주었다. 결국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해 합격했고, 미술공부를 하면서 길러진 정서적인 사고는 졸업 후 기자생활과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프로 바둑기사 조훈현씨가 일본인 스승 세고에를 만난 것은 열 살 때였다. 그에게 입문하기 위해 갔을 때 세고에 선생은 76세였는데, 그 때까지 중국인과 일본인 제자 단 두 명만 길러냈던 분이었다. 세고에 선생 은 조씨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바둑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유래를 말하고는 『한국에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는데, 내가 너를 키워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바둑과 제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 세고에 선생으로서는 최대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그후에도 세고에 선생은 기자들이 조훈현에 대해 물으면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세고에 선생은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여주는 분이었다. 장관이든, 기업인이든, 공무원이든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어릴 적 스승의 언행일치를 보고 배운 조훈현씨는 스승의 말과 정신을 깊이 새겨 훗날 자신이 제자를 기를 때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연만희 유한재단 이사장은 고 유일한 박사를 그의 스승처럼 생각한다. 유일한 박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 기업 철학에 고스란히 배어 있어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한재단은 정직을 영원한 전통으로 삼아야 한다. 기업이란 무엇보다 국민의 신임을 얻는 것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유일한 박사는 이런 기업철학을 스스로 실천해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을 기업철학의 바탕에 두고 실천하신 유일한 박사의 행동은, 연만희씨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가 영원한「유한인」으로 살아가는 데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개그맨 전유성은 메모광이다. 그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메모 습관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던 중학교 2학년 때 교회중등부 담임선생님은 메모 습관이 대단했는데, 자신이 읽은 책의 줄거리, 등장인물 등을 꼼꼼히 정리를 해 파일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유성이 너도 꼭 이런 스크랩북을 하나 만들어라. 꼭 해봐라』하고 말했다. 당시 전유성은 선생님의 그 말을 그냥 생각만 할 뿐 실천하지는 않았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생님의 말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의 메모들은 책을 읽다 발견한 「명문장」을 비롯해 세세한 내용들이 모여져 있어 「말로 먹고사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국악인 안숙선씨는 스승인 만정 김소희 선생님의 가슴 아픈 꾸중 한 마디가 오늘의 안숙선을 더욱 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안숙선씨가 텔레비전에 출연해 공연을 하는데, 갑자기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지휘자와 대화를 해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다. 당시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파 병원에서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지켜본 김소희 선생님은, 그를 부르더니 처음에는 친필로, 후미는 대필로 쓴 편지 한 장을 전해주었다.『숙선이 너를 보통 제자로 생각한 게 아닌데,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너의 실수를 알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너를 좋다고 하여도 그중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너는 아닌 것이다. 판소리 정신에 어긋나면 그것은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른다면 나에게 다시 한 번 물어주길 바란다』 이 편지글에 안숙선씨는 큰 감동을 받았고, 그 말은 그의 소리인생의 지침 이 되었다고 한다.
방송인 정은아씨는 수도여자고등학교 방송반 담임이던 임병서 선생님의 매섭고 차가운 꾸지람 한마디가 그에게 오기를 불어넣어주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방송반 반장을 맡은 그는 고1 후배들을 이끌어 나가면서 방송제 준비를 하느라 성적이 많이 떨어져 급기야는 학급평균을 떨어뜨린다는 핀잔을 받기에 이르렀다. 성적이 더욱 떨어져 진학하는 것마저 자신감을 잃게 되었을 때 선생님이 한 마디 했다. 『이 길은 너희들이 선택한 길이다. 스스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긍지심을 가지고 헤쳐나가라』 선생님의 매섭고 차가운 그 한마디에 정은아씨는 가슴이 덜컹하고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그후 그는 둘 다 잘해야겠다는 오기로 공부를 해 방송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야구 해설가 하일성씨는 서울 경동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 하루는 너무 연습이 하기 싫어 일주일간 연습에 빠지고 난 뒤 돌아왔는데, 그때 이강법 체육 선생님의 한마디가 그를 변화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넌 참 불쌍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데, 그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 너는 운동만이 살길인데, 네가 할 수 있는 것마저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하냐』 그러면서 『무엇이 되던 간에 최고로 인정받는 사람이 돼라』는 선생님의 따끔한 가르침이 그로서는 너무도 고마웠다고 한다. 그는 훗날 뛰어난 운동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그 말이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