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9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잡혀 죽을 양 떼 》
슥 11:4~8
양 이야기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수많은 동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동물들이 크기도 제각각, 생김새도 제각각입니다.
태어나 살아가는 모습도 다 다릅니다. 특히 성격이 다 제각각입니다.
그 중에서 양(羊)은 겉모양은 염소와 많이 닮았습니다마는, 성격은 판이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염소를 몰아봤습니다.
아침에 부모님이 염소를 들판에 내다 고삐를 길게 해서 말뚝을 박아놓으십니다.
하루 종일 염소는 고삐가 닿는 곳까지 풀을 뜯어 먹습니다.
해가 지면 가서, 말뚝을 뽑고 고삐를 쥐고 염소를 집으로 몰아와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염소가 갑자기 달리는 바람에 자빠져서 무릎이 깨지기 일쑤입니다.
염소는 성질이 사납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뿔을 딱 쥐면 앞발에 바짝 힘을 주고 버팁니다.
양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양의 두 뿔을 잡으면 양은 가만히 있습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잡아서 어떻게 데리고 옵니까?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화가들의 그림은 많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두 앞발은 오른 손에, 뒷발 둘은 왼손에 잡고 양을 목에 두릅니다.
마치 목도리하듯이 양을 목에 두르고 기쁘게 오시는 모습으로 화가들이 표현했습니다.
염소를 이렇게 했다가는 ‘대형사고’ 납니다. 염소가 바리작 거려서 사람도 염소도 다칩니다.
양은 시력이 매우 약합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자구책이 없습니다.
10미터 거리에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염소는 재빨리 도망칩니다.
양은 멀뚱멀뚱합니다. 안 보이니까요! 그러다 잡히면 그대로 죽습니다.
양 털을 깎을 때, 양은 별로 버리적 거리지도 않고 고분고분합니다. 그래서 순한 양입니다.
그러나, 양은 지능지수가 염소에 비해 많이 떨어집니다.
구덩이에 빠져도 나오려고 하기 보다는 그곳에서 먹을 것을 찾습니다.
염소는 누가 이끌지 않아도 자기 홀로 살아갑니다.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은 목동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고 이내 죽습니다.
☞ 사람은 염소에 가까울까요, 양에 가까울까요?
2. 사람은 양을 닮았습니다.
얼른 생각하기에 사람은 염소를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면밀히 따져본다면 사람은 염소보다는 양을 더 닮아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않습니까?
사람 인(人)자를 보십시오,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버티고 있습니다.
사람은 글자처럼 서로 기대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은 유대력으로 7월 10일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날입니다.
이때 희생 제물로 두 마리의 염소를 씁니다. 양을 쓰지 않고 염소를 왜 쓸까요?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광야로 내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양을 쓰면 어떻게 될까요?
양은 한 곳에 우두커니 그냥 서 있을 것입니다. 이때는 사람과 조금 달라요!
이때는 염소가 어울립니다. 한 마리를 광야에 풀어놓으면 염소는 제멋대로 달립니다.
혼자서 광야를 헤매고 헤매다가 한 평생을 마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 제물은 염소를 씁니다.
혼자 광야를 헤매다가 죽는 염소, 사람도 혼자 놔두면 이렇게 됩니다.
☞ 대속죄일에 희생제물로 염소를 쓰는 것은 사람은 염소처럼 살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양은 떼를 이루어 사는 동물입니다.
사람은 염소처럼 홀로 두면 안 됩니다. 떼를 지어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염소를 바라보지 말고, 양을 바라봐야 합니다.
‘나 혼자는 살 수 없다. 이웃과 함께 살자!’ 우리는 늘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살다보면, 때로 지치고 힘이 듭니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가서 살다 죽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아닙니다.
TV 프로 중에 “나 혼자 산다”도 있습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도 있습니다.
사람이 홀로 있고 싶은 충동에 기댄 프로그램입니다.
엊그제 장마에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했던 분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홀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홀로 있고 싶다는 생각, 이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홀로 있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
함께 어울려야 한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염소가 아니라 양을 닮아가야 합니다.
둘째, 사람은 이끌어주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염소는 목동이 없어도 저 혼자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양은 다릅니다. 양은 목동이 없으면 단 며칠을 버티기 어렵습니다.
양은 목동이 이끄는대로 따라갑니다. 따라가서 배 부르게 풀을 뜯고 물을 마십니다.
혼자서는 푸른초장을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물이 어디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맹수가 공격을 해 와도 방어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양은 목동이 지켜주어야 생존이 가능한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곁에서 가르치고 훈련을 해야합니다.
가르치지않고 훈련하지 않으면 들판에 뛰어다니는 망아지, 송아지, 염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가르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염소가 됩니다.
부모가 정성을 들여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양처럼 고분고분해집니다.
이런 면에서 사람은 염소보다는 양을 닮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양과 더 가깝습니다.
좋은 목동을 만난 양이 행복하듯이,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 사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습니다.
양처럼 어울리면서, 좋은 목동이 나를 양육해 주기를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사람은 결국 죽을 운명의 존재입니다.
염소나 양이나 수명을 다 하면 죽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이처럼 수명이 있습니다.
수명을 다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첫째, 사람은 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둘째, 사람은 이끌어주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셋째, 사람은 결국 죽을 운명의 존재입니다.
☞ 죽게될 운명의 존재 양 떼, 오늘 본문이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3. 잡혀 죽을 양 떼
(4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하나님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언뜻 보기에 하나님은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를 “잡혀 죽을 양 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어디 유다 백성만 “잡혀 죽을 양 떼”이겠습니까?
양을 닮은 사람들, 모두, “잡혀 죽을 양 떼”입니다.
5절을 읽어보면 확연히 알게 됩니다.
(5절) “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염소나 양이나 염소떼나 양떼나 사람들에게는 재산입니다.
재산은 거래가 됩니다. ‘사고 팔고’가 가능합니다. 양이나 염소, 모두 사고팝니다.
① “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그렇지요! 자기 재산이 되었으니 필요하면 얼마든지 잡아먹습니다.
②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판 자들은 지갑이 두둑해졌습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이들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내가 부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찬송하리라”
☞ 엊그제 친구랑 냉면집에 갔습니다.
며칠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중에 갔습니다. 손님이 별로 없습니다.
장마철에는 냉면집이 한산합니다. 장사가 안 됩니다. 그때 함께 간 친구가 말합니다.
“냉면 장사는 하나님과 동업하는 사업이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안 믿는 친구거든요! 하나님을 안 믿으면서도 냉면집은 하나님과 동업관계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아,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구나!’
지갑이 두툼해졌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성도입니다.
그나마 본문에서 양을 판 자들,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③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목자들은 고용 노동자들입니다.
양떼를 판 사람도 아니고, 양떼를 사들인 사람도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배가 부르니 양 키우는 힘든 일 안 합니다. 목자를 고용합니다.
그런데 그 목자가 양 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양을 판 자, 양을 산 자, 양을 키우는 목자!
양을 둘러싼 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양들은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 사람들은 양을 닮았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양의 신세입니다.
우리가 한 마리 양으로 태어났을 때, 우리는 누구의 소유였습니까?
당초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그런데 아담 하와의 선악과 범죄로 우리는 사탄에게 속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믿고 거듭나기 전까지 사탄의 소유입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말씀입니다.
사탄들이 사람을 좌지우지합니다. 사탄들끼리 이리 팔고 저리 팔고 합니다.
판 자도 산 자도 양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재산으로만 여깁니다.
그들이 양떼를 돌보도록 맡긴 목자, 역시 양떼를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삯꾼 목자입니다. 돌보고 월급을 받고 먹고사는 삯꾼 목자입니다.
☞ 이것이 예수 믿기 이전 사람들의 현주소입니다.
(6절)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예수 안 믿는 사람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현주소입니다.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신세였습니다. 이리 팔려가고, 저리 팔려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은혜스럽게도 우리를 산 주인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주님이 우리를 사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그리고 우리에게 목자를 붙이셨습니다.
온고을교회에는 황의찬 목사를 목자로 하나님이 파송하셨습니다.
☻ 여러분 보시기에 황 목사는 양떼를 건사하는 목자로서 양을 긍휼히 여기는 목자입니까?
여러분 생각에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가 자기를 긍휼히 여겨준다면,
그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맺음>
하나님이 오죽하면 스가랴 선지자에게 “잡혀 죽을 양떼를 먹이라”하셨을까요?
양떼를 가지고 있다가, 판 자, 그 양떼를 사들인 자, 양떼를 맡아서 키우는 목자,
이렇게 3자가 있습니다. 모두 참 못되었습니다. 모두 자기 이득을 위해서 삽니다.
3장 하나도 양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7~8절)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8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7절의 은총, 연합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유다는 그래도 하나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북 왕국은 안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모두 아우르시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은총, 연합입니다.
8절에서 하나님이 한 달 동안에 ‘세 목자’를 제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판 자, 산 자, 목자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들이 타락한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양떼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 은혜를 안다면, 우리가 최고로 감사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 주셨다. 십자가 보혈로 사 주셨다!’
이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감사조건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신데요!
이것도 해 달라, 저것도 해 달라, 요구하는 것 사실은 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나를 최종적으로 사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늘 확인하면서 삽시다!
이것이 최고의 은총이요, 최고의 감사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