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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숙소 → 양주순교성지 → 의정부주교좌성당 → 성남종삼요한과가족묘 → 황사영묘
37.8Km 6Km 6.2Km 5.6Km
33. 양주순교성지
양주 순교성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통해, 병인박해 때 다섯 분이 순교한 치명지를
2004년 의정부교구 설립 뒤에 새롭게 찾아내 성역화를 진행하고 있는 성지입니다.
증언을 통해 오래전에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었던 자리를 확인하고 토지 매입을 진행하여,
2016년 5월 28일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주교의 주례로
성지 선포 미사를 봉헌하며 성역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양주 순교성지 주변에는 양주 향교와 최근에 복원이 이루어진 양주 관아,
그리고 국가 무형 문화재 제2호인 양주 별산대놀이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어
더 많은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순교하신 다섯 분에 대한 “치명일기”의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용인에서 살다가 양주관아로 잡혀온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 성 김대건 신부님께서 부제로 조선에 왔다가 중국으로 갈 때 함께 간 사람으로 추정되는
최 프란치스코의 아내인 “김 마리아”
* 홍주에서 순교한 박사행 부부의 아버지인 “박 서방”
* 양주 일담리 출신이면서 아버지(홍몽노 베드로)와 삼형제가 함께 순교한 가족의
둘째 아들인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그동안 이 다섯 분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치명일기 기록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뒤늦게나마 이분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길 청하며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또한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마련된 지금의 땅은,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묵상하고 배울 수 있는 성지로 꾸며가고 있습니다.
또한 양주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살며 이룬 교우촌들이 있습니다.
우고리, 신암리, 갈곡리(파주)로 이어지는 외딴 곳에 형성된 교우촌의 신자들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위해 봉헌한 것과 같은 또 다른 모습의 순교자들입니다.
34. 의정부주교좌성당
의정부 성당은 의정부교구 주교좌 본당으로 1945년 12월 덕정리 본당을 이전하며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설립되었고,
1980년 의정부 4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의정부 2동 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되면서
주교좌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다시 변경하였다.
주보는 하자 없으신 성모 성심이다.
1945년에 덕정리 본당의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는 성당을 매각하고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의정부리로 성당을 이전하여 현재 위치의 대지 1,625평을 매입하는 한편,
25평의 한옥 1동을 매입 · 수리하여 임시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고
본당의 명칭을 의정부 본당으로 바꾸었다.
박순원(朴蕣遠) 이냐시오 신부는 1994년 7월 수녀원 내부 공사를 비롯한 제반 공사를 시행하였고,
신자들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비좁은 성당 옆에 경당을 설치하였다.
1995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미사와 행사, 본당 설립 50주년 유공자 표창이 있었고,
“의정부 본당 50년사”가 간행되었다.
의정부 본당은 1999년 9월 17일 서울대교구의 경기 북부 지구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2002년 1월 22일 성당 건물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이 사적지 성당 건물은 의정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을 전후한 시기의 성당 건축은
열주가 사라진 형태가 대부분인데 의정부 성당도 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수직 종탑과 정면 양식 그리고 앱스(성전 뒷부분) 등 세부 모양은
고전적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성당이 당시 성당 건축과 다른 점은 단단한 석재를 사용하고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폭격 등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단한 석재를 재료로 삼았고
높이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성당 건물 자체가 한국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의정부 본당 50년사”에 의하면 “성전을 지을 당시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로
모든 신자들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젊은 신자들을 중심으로 공사 현장에서
미군들과 함께 땀을 흘려 일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5. 성남종삼요한과가족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鐘三)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성인의 부친 남상교(南尙敎),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한
장자 남규희(南揆熙) 등 삼대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서울대교구 길음동 성당 울대리 묘지 정문에서 왼쪽으로 표지석을 따라
10여 분 걸어 올라가면 ‘성 남종삼(요한) 묘역’에 이르게 된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원래 생부는 남탄교(南坦敎)이나 장성한 뒤 슬하에 아들이 없던
백부 남상교(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의 영향을 컸다.
남종삼이 언제 입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부친이 일찍부터 입교하여
신앙을 지켜 온 사실에서 볼 때 양자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입교한 뒤에도 자신의 관직 때문에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아버지 남상교는
신앙에만 더욱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로 유배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며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었다.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 장관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 부패된 관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의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고
당연하게도 관리직을 내놓았다.
남씨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에 상종하던 이들과의 생활 풍습이
신앙 계명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으로,
남씨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했다.
때에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서 통상을 요구했다.
조야는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쾌히 받아들였으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 중이어서 약속 시간 내에 찾아내지 못했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얼마 후 두 주교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미 때는 늦어
대원군은 정권 유지의 간계로 천주교 박해를 결심했던 터였다.
남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 승지는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을 채 못 들어와
고양(高陽)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한편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부친 남상교는 붙잡혀 공주로, 장자 남규희는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고,
처 이소사와 차남 명희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한 셈이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004년 12월 30일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아 순례의 발길이 뜸했던 남종삼 성인 묘역을 성역화하기 위해
묘역 안내 표지석 4개를 설치하였다.
길음동 본당과 종친회의 협조를 얻어 “천주교 순교 성인 승지 남종삼 요한 묘”라고 새겨진
와비를 성인 묘역까지 올라가는 길 중간 중간에 설치하였다.
현재 성인 묘역이 속한 의정부교구에서는 남종삼 성인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본받기 위해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서 사패산을 넘어 남종삼 성인 묘역과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4일)]
나의 신앙의 멘토인 조 도미니코 형제님의 묘소가 울대리 공원묘원에 있다는 것을
오늘 저녁 길음동교우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들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찾아가 참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아쉽다.
묘소에 와서 혹시 여기에 계시면 하고 생각은 했지만
그분의 고향에 묻혔으리라 생각한 것이 착오였다.
그분 고향 공소출신 사제 수녀도 많고, 친척중에도 많기에
매년 고향의 모임에 가시곤 했기 때문이다.
도밍고 형제님은 항상 '나는 가방 끈이 짧다' 며 겸손한 태도로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주고 솔선수범을 보였다.
같은 레지오팀에서 봉사하면서 1년에 1명 입교시키기도 힘든데
그분은 매년 5명 이상을 입교시켰다.
쌀가게를 하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늘 신앙이야기를 하고
퇴근해서는 아파트 놀이터등을 돌며 입교를 권했다.
그리고 한 두번 거절당해도 승락할 때까지 몇 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도 1년 이상 끈질기게 권유하는 바람에 레지오에 입단하게 된 것이다.
그분이 자전거로 쌀 배달을 하다가 오토바이로 바꾸었는데
여주에 살 때는 야외행사로 우리집을 여러번 방문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한참 지난 다음에야 듣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신앙생활이 나태할 때면 도밍고 형제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36. 황사영묘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고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족보를 확인하는 어려운 작업 끝에 간신히 찾은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위치해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거의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名門) 출신이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이를 계기로 결국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그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 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때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몰락하고
그 여파로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귀중한 교회 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에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간의 골육 상잔의 치열한 당쟁이었음을 피력한 다음
세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어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시 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