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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13) 수많은 젊음에 빚을 지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살아남은 자의 몫은…
- 6ㆍ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시가 행진을 하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학도병 이우근(서울 동성중)의 편지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님. 적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적군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 앞에 도사리고 있는 적군의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는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하고 부르며 어머니 품에 덥석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壽衣)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죽은 자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님! 제가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이 저희를 살려두고 그냥 물러날 것 같진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 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중략)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6ㆍ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의 편지다. 그는 다시 편지를 이어서 쓰지 못했다. 학생모를 쓴 채 참호에서 전사한 그의 주머니에는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부치지 못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성가 ‘순교자 찬가’를 작곡한 이문근 신부(1917~1980)의 동생이다.
6ㆍ25의 참상은 이 땅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숨진 그처럼 이 땅의 수없이 많은 젊은이가 피어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갔다. 진석은 늘 자신도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의 모든 젊은이는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목숨을 건진 진석과 남은 이들에겐 먼저 떠난 젊은 목숨이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UN군은 서울을 수복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사진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인천 상륙을 시도하는 아군.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혜화동 로터리에서 인민군을 목격한 진석은 이후 삼선교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식사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주먹밥과 감자 한두 개를 친척 동생과 나눠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절망 앞에서 인간은 하느님께로 귀착한다. 하느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만이 진석에게는 유일하게 지켜가는 일상이었다. 그래도 친척 동생과 함께 피란 생활을 한다는 것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간단한 세수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진석과 친척 동생은 어느새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길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귀동냥한 외부 소식이 답답한 생활에서 약간의 숨통을 트게 했다.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국군과 미군을 몰아붙여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였다. 불행 중 다행은 외국의 참전국들이 속속 부산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지상군을 파견한 나라는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남아공, 에티오피아,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터키 등 16개국이었다.
1953년까지 한국전에 참여한 연합군은 미국을 포함해 총 34만 1000여 명에 이른다. 한반도 국토의 10%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국군과 UN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전선을 지키며 전투를 이어갔다. 모든 것이 아쉬웠던 당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도움을 줬던 나라들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다른 가치로는 도저히 환산할 수 없는 고귀한 인명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전한 UN군 젊은 병사들 대부분은 듣도 보도 못한 이역만리 한국이라는 타국에 와서 귀한 생을 마감하거나 평생을 가지고 갈 부상을 당했다. 부산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UN군이 묘역에 잠들어 있다. 우리나라는 외국의 많은 이들에게도 큰 빚을 진 셈이다.
한반도가 젊은이들의 피로 물들어가며 1950년의 여름도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드디어 UN군과 국군이 반격을 시도했다.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작전이 실시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아군이 서울로 진격하면서 서울에는 대포 공격과 비행기 공중 폭격이 유난히 많아졌다. 인민군은 사력을 다해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려는 UN군과 국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밤낮으로 울리는 대포 소리가 서울 수복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진석은 미군의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서울 수복이 아주 가까이 다가온 밤이었다. 친척 동생과 나란히 누운 진석은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간신히 잠을 청했다.
“쾅!”
갑자기 고막을 찢는 것처럼 큰 소리가 들렸다. 포탄 하나가 진석이 은신해 있던 집 위를 명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지붕을 받치고 있던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다.
[추기경 정진석] (14) 덤으로 받은 삶
하느님께서 사촌 동생 대신 나를 살리신 이유는…
-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흥남을 통해 철수해야 했다. 사진은 흥남항에서 배를 기다리는 피란민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폭음과 함께 잠시 정신을 잃었던 진석이 눈을 떴다. 앞이 뿌옇고 어두웠다. 눈을 비벼봤지만 소용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붕은 뻥 뚫렸고, 서까래는 무너져 있었다. 진석과 사촌 동생이 숨어 있던 집이 폭격을 맞았던 것이다. 역한 화약 냄새와 먼지가 방안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무너진 서까래가 옆에 있던 사촌 동생을 덮친 것이다. 진석은 깜짝 놀라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동생을 불렀다.
“미카엘! 미카엘.”
진석은 대답 없는 사촌 동생에 황망해 하며 작은 목소리로 연거푸 동생을 찾았다. 그러나 미카엘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동생이 있는 쪽으로 간신히 몸을 돌려 살펴보니 그는 복부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 채 숨져 있었다. 진석이 전쟁 중 눈앞에서 목격한 첫 죽음이었다. 잔혹한 전쟁은 가까운 이를 너무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데려갔다.
미카엘이 세상을 떠난 날은 9월 25일이었다. 다음 날이 추석이었고, 달빛이 아주 밝은 밤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함께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던 동생이 이젠 저세상 사람이 되어 아무 말 없이 쓰러져 있는 걸 보니 너무나 허망했다.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있으면 미카엘 천사의 축일이었다. 자신의 축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을 것이라 애써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손 뻗으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던 동생의 죽음은 평생의 슬픔이 됐다.
동생과 자리가 바뀌었다면 분명히 진석이 죽었을 것이다. 19세의 청년 진석은 그날 깨달았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말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 동생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나머지 삶은 덤으로 받아 사는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그리고 왜 하느님은 나를 살려두셨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날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동생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항상 기도한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지만 연합군이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기는 쉽지 않았다. 북한군은 특히 서울 서쪽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서울이 완전히 수복되는 데는 13일이 걸렸다. 그 13일 사이에 긴급 체포된 남한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납북되거나 총살당했다. 연합군도 사력을 다해 서울로 진격을 거듭했다. 북한군은 9월 23일까지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으나, 9월 24일 한미 해병대는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이튿날인 25일 마침내 서울 주변의 고지들을 빼앗았고, 그곳에서 서울 시가를 굽어볼 수 있게 됐다.
공산군은 퇴로가 완전히 봉쇄될 것을 두려워해 서울을 사실상 포기하고 주력부대를 25일부터 의정부 쪽으로 퇴각시키면서 후위 부대로 하여금 저항을 계속하게 했다. 서울 시가 전투는 26일에도 시내 전역에서 계속됐다. 9월 27일 새벽 국군은 중앙청으로 돌입해 태극기를 달았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진석은 연합군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갔다. 동네에 가까이 다가가니 동네가 다 부서져 폐허가 돼 있었다. 동네에서는 미군들이 총을 들고 수색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민가로 숨어든 북한군 패잔병이나 부역자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진석은 장발에다 덥수룩한 수염으로 한눈에 보아도 숨어서 지낸 모습이 역력했다. 미군은 진석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어떤 남자 한 명이 미군에게 붙잡혀 길거리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안면이 있는 동네 사람이었다. 미군은 그 남자가 부역자라고 의심해 계속 묻고 있었는데 영어로 말하니 그 남자는 알아듣질 못해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석이 다가가 그 남자는 부역자가 아니고 우리 동네에 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미군은 힐끗 진석을 보더니 남자를 놓아주고 다른 곳을 수색하러 갔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진석은 자신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여하튼 말이 통했던 것 같다.
“아이고,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 부역자로 끌려가 죽었을 겁니다.”
정신없이 감사 인사를 하고 도망가다시피 집으로 향하는 이를 보자니 진석은 민망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미력이나마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미력한 힘을 당신의 도구로 써주신다는 것을 느꼈다. 진석은 지긋지긋한 3개월의 도피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시 만났다.
북한군이 주둔했던 명동성당도 9월 27일경 신자들의 손에 다시 돌아오게 됐고 장금구 주임신부도 9월 30일 본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용산에 머물던 소신학교 교장 이재현 신부와 교사 백남창 신부, 정진구 신부 등과 천주교 지도급 인사들이 9월 16일 북한군에 피랍됐다. 명동성당도 곳곳이 파괴됐다. 성당에 모셔져 있던 성상들이 부서졌고 제의실에 보관돼 있던 제의들도 찢겨 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자들과 사제들이 힘을 모아 성당을 재건해 나갔다. 10월 22일에는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UN 연합군 환영 미사를 봉헌했고, 11월 21일에는 최익철 신부, 장대익 신부의 사제 서품식이 거행됐다.
서울을 수복한 연합군은 달아나는 북한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연합군은 곧 전쟁이 끝나 고향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거의 섬멸 상태에 이르자 중국 공산당이 한국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갑자기 4개 군 약 50만 명의 병력으로 고원지대를 타고 몰려 내려왔다. 날씨와 지형 등이 유엔군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결국 유엔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아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주로 야간에 이동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하는 등 이른바 인해전술을 펼쳤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곧 전쟁이 끝날 것 같던 한반도에 공포와 죽음의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추기경 정진석] (15) 전쟁 앞에 죽음은 이어지고
눈물 삼키며 어머니를 피란 보내드리고, 전장 속으로
전세 변화로 서울 시민들은 피란길에 올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절대적으로 불리해져서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고 1950년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했다. 급기야 12월 6일 북한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한군의 중ㆍ동부 전선 돌파로 서울 방어도 어렵게 됐다. 연합군은 서울이 중공군의 포격권에 들기 전에 주력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서울에서 60㎞ 남쪽의 오산과 삼척까지 후퇴하도록 결정했다.
한국 정부도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6ㆍ25 개전 초기와 달리 이때 대다수 서울 시민은 피란을 떠났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이 불시에 공격을 해와 다들 경황도 없었거니와 서울에 남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3개월간 지긋지긋한 공산 치하의 생활을 겪은 이들은 우리 군의 후퇴 소식에 일찌감치 피란 보따리를 챙겨 남으로 향했다. 유엔군의 철수와 피란민들의 피란은 작전 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전황이 아주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곧 서울도 적군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서둘러 피란을 떠났다. 진석은 먼저 어머니를 피란 보내기로 작정하고 설득했다. 남쪽 끝 도시 부산이 가장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부산으로 내려가세요!”
“부산? 아는 이 아무도 없는 부산에?”
처음에 어머니는 혼자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아들 진석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따르는 어머니라 이내 당신 뜻을 꺾고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진석은 일부러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12월 8일로 어머니의 피란 날짜를 정했다. 성모님께서 어머니를 보호해주시리란 믿음에서였다.
어머니가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던 날, 진석은 한강대교 북단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몸이 불편한 막내 이모도 어머니와 동행하기로 했다. 막내 이모는 혼자서는 못 가니 어머니가 데려가야 했다. 한참을 걸으니 흉물스럽게 끊어져 있는 한강대교가 보였다. 한강대교로는 여전히 사람들이 건널 수 없었다. 잠시 후 한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구했다. 어머니와 이모가 간단한 피란 보따리를 품에 안고 배에 올랐다.
“부산에 가 계시면 제가 꼭 찾아가겠습니다.”
“그래. 너도 몸조심하거라.”
진석은 일부러 대범한 척 씩씩하게 이야기했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혹시라도 눈물을 보이면 어머니의 마음이 약해지실 것만 같았다. 이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뱃사공이 노를 젓자 어머니를 실은 나룻배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언제 다시 만나게 될 줄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진석은 나룻배가 건너가는 내내 지켜보았다. 배가 강 건너편에 잘 도착하는 것을 보고서야 진석은 집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혼자가 된 진석은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되뇌었다.
- 한강대교(사진 아랫부분)는 6ㆍ25 개전 초기에 파괴되어 끊어졌다. 진석의 어머니는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피란을 가야 했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국민병 소집 명령 받아
그러는 사이 1950년 12월 16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국회에서 통과돼 12월 17일 ‘제2국민병 소집령’이 발동됐다. 소집령에 따라 경찰과 군인을 제외한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으로 국민방위군을 편성했다. 정부가 6ㆍ25 직후 서울에 남아 있었던 남한 장정들이 북한군에 징병됐던 사건을 심각하게 고려한 결과였다.
진석도 제2국민병 소집 명령을 받았다. 전쟁터로 떠나려니 돈이 없어 급한 대로 이웃 아주머니에게 어머니의 재봉틀을 사 달라고 부탁했다. 집안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재봉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보물처럼 아끼던 재봉틀이지만 당장 돈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돈을 조금 갖고 가면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것 같았다. 이웃 아주머니의 배려로 재봉틀을 팔아 급한 대로 용돈을 챙겼다.
소집일인 12월 20일 아침, 진석은 두꺼운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창경궁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소집 명령을 받은 청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지휘관들이 나서 인원을 파악하고 대열을 정리했다.
“차렷! 열중쉬어!”
“앞과 옆의 열 맞춰라! 잡담하지 마라!”
지휘관들은 군인들을 다루듯이 절도 있게 질서를 지킬 것을 강조했다. 간단한 점호와 함께 청년들은 열을 지어 출발했다. 그룹별로 인솔자를 하나씩 붙여 계속 걸어서 갔다. 온종일 걸어 도착한 곳이 덕소였다. 마치 급하게 도망가는 느낌이 들었다. 걷는 것이 조금만 뒤처져도 큰소리로 채근했다. 대열을 지킬 것을 계속 강조하면서 걷는데,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걸음은 무거웠다.
날이 저물었는데 얼어 있는 한강을 건넜다. 긴 대열이 오랫동안 걸어서 얼음 위에 길이 생긴 것 같았다.
“와장창!”
한참을 걸어 뭍으로 올라온 순간, 진석의 등 뒤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진석의 일행이 강을 건넌 직후 얼음이 그만 깨져 버린 것이었다. 두꺼운 강 얼음이 깨져 나간 자리 속으로 몇 사람이 빠졌는데, 너무 위험해 주변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빠진 이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진석의 일행이 지날 때 얼음이 깨졌으면 영락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예전 자신의 옆에서 예고 없이 죽음을 맞았던 사촌 동생이 떠올라 진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전쟁 앞에 사람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석은 야속한 현실에 또 한 번 깊게 탄식했다.
국민병들은 여주에서 충주로 계속해서 행군했다. 식사는 중간중간 간단하게 먹었지만 사실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먹었다. 조금이라도 먹지 못하면 걸을 수 없었고, 낙오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던 극한의 상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영하로 뚝뚝 떨어지는 추운 날씨와 잠자리였다. 행군하다가 다행히 민가를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요기를 하고 몸을 녹일 수 있었고, 또 바람을 막아주는 실내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밖에서 밤을 보내야 하니 추운 겨울에 고역이었다. 잘 먹지 못한 이는 잠을 자다 저세상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은 극한 상황이 되면 자신의 한계를 넘기도 한다. 일행은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루는 진석이 어느 고개를 넘어가다 행인에게 물어보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문경새재입니다.”
진석은 사람들에게 질문해서 지명을 알아두었다. 답답하기도 해서 나름대로 지역 정보를 수집하면서 행군을 했던 것이다.
경상북도 의성을 지날 때였다.
“쾅!”
고막을 찢는 포탄 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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