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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대하는 법
21: 12-36
12.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13.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14.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
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16.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18.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 적수를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19. 지팡이를 짚고 기동하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기간 손해를 배상하고 그로 전치되게 할찌니라
20.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21. 그가 일일이나 이일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금전임이니라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 26.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27.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찌니라
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29.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30.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
31.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율례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찌니라
33.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함으로 소나 나귀가 거기 빠지면
34. 그 구덩이 주인이 잘 조처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찌니라
35.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산 소를 팔아 그 값을 반분하고 죽은 것도 반분하려니와
36. 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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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식은 맛으로 먹고 어떤 음식은 몸에 좋으니까 먹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실 음식은 화려한 맛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서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철분이 가득하여 영혼에 좋은 음식입니다.
요즘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무서운 현상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생명을 아주 무가치하게 생각하고 너무나 쉽게 생명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붙들린 한 청년은 2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잘라서 버렸습니다. 그가 죽인 사람은 대부분 부자 노인이든지, 전화를 받고 사람을 만나는 여자라든지, 길에서 좋지 않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악이 되니,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잘못 배운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합니다. 사형제도 폐지론자들은 사형수의 생명은 귀히 여기는 척 하면서 희생당한 사람의 생명은 경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사회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요즘 아이들은 잔혹동화에 빠져 있답니다. 잔혹동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백설 공주는 숲 속을 헤매다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집을 발견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일곱 난쟁이들이었습니다. 그 집이 탐이 난 백설 공주는 도끼로 일곱 난쟁이들을 토막 내서 죽였습니다.’ ‘나는 내 옷 속에 있던 도끼를 찾아 도망을 못 가게 오빠 헨젤과 엄마의 다리를 싹둑...”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잔혹동화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섬짓하지 않습니까? 동화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해피엔딩’이 유혈이 낭자한 무시무시한 결말로 탈바꿈했습니다.
어떤 엄마는 중학교 1학년인 딸이 친구에게 빌렸다는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라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 널리 알려진 동화가 사실은 잔혹하고 끔찍하다며, 이들의 원전을 소개한 일본 작가의 책인데, 근친상간과 잔인한 형벌을 담은 줄거리는 엽기의 극치랍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런 책을 돌려보는 게 유행이고, 돌려 읽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더 자극적인 ‘나만의 잔혹동화’를 경쟁적으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린답니다. 네이버, 다음 등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잔혹동화를 만들어 올리는 동호회가 수십 개에 달하고, 창작 게시물은 2000개가 넘는답니다.
인격이 한창 형성되는 시기에 잘못된 자극을 추구하다 보면 성인이 된 후에 공격적 성향을 지니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을 즐기면서 자란 아이들이 자라면 사람 생명을 얼마나 하찮게 여길지 두렵습니다.
고의적인 살인과 과실치사에 대하여.
지난 주일에는 종을 부리는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을 배웠는데 오늘 본문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죄에 대하여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섯째 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엄명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이라는 것이 워낙 다양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좀 더 자세하게 예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엄마가 집을 어질지 말라고 말해도 아이들은 어지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살인자는 생깁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살인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구체적인 방안이 없으면 혼동에 빠지므로 하나님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경우별로 어떻게 대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12, 14)
하나님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엄명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 외에는 사람의 생명을 누구도 빼앗을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사형 제도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형제도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독재자가 자기의 정적에게 누명을 씌워서 죽이는데 사형 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시정되어야 하지만 사형제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독신문이 본 교단 목사님들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사형 제도를 존속하는데 25명이 찬성하고 56명이 반대했으며, 19명이 모르겠다고 답했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제쳐놓고 자기 의견을 말하면 안 됩니다.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살인자가 혹시 성전에 들어가서 제단 뿔을 잡고 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성전으로 들어가서 제단 뿔을 잡으면 살려주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서 제단 뿔을 붙잡는다 할지라도 용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살인자를 용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원조는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사람이 왜 남을 죽여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기에 사람의 생명은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교류하는 영혼과 언어가 있고, 선악을 분별하는 도덕과 양심이 있으며,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는 지성이 있고, 도구를 만들고 자연을 다스리는 통치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짐승에게는 없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고, 거의 하나님만큼 존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내게 주어진 생명은 길이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 죽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많아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시는 날까지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이라도 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귀중한 남의 생명을 해칩니다. 가장 빈번한 이유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한 때문에 남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남을 죽이면 자기 일생은 완전히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간의 욕망이나 분노를 참지 못해서 한평생을 망칩니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하나님이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살인을 했지만 살 수 있는 예외규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전혀 살인할 의사가 없었는데 사고로 사람을 죽게 만든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니라.”(13)
사람이 밭에 있는 돌을 주워서 버렸는데 마침 그 옆에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입니다. 옛날에는 나무를 벨 때 도끼가 제일 좋은 도구였습니다.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질 수도 있습니다. 빠진 날이 날아가서, 맞은편에서 나무를 베고 있던 친구의 머리를 때려서 그 친구가 죽는 경우가 발생했다면 이런 경우는 도끼 자루를 점검하지 아니한 잘못은 있지만 계획적인 살인은 아닙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과실치사가 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가족이 볼 때는 너무 억울하고 분합니다. 그래서 가해자를 죽이려고 쫓아갑니다. 그럴 경우에 과실치사를 저지른 사람이 도망가서 피할 수 있는 장소와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도피성입니다(민35:).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각기 세 군데씩 여섯 군데에 있었는데,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신속히 피난할 수 있기 위해 여러군데 배치해두셨습니다. 과실치사를 한 사람이 도피성으로 도망하면 그를 철저히 보호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 도피성은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인간의 피난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그리로 피하지 않고 다른 데로 갔든지, 혹은 그리로 피했다가도 거기서 나와 돌아다니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죄인의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사람은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서 나오지 말아야 했고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만 나와서 자기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으면 이전의 모든 죄가 사면되게 하셨는데, 이것은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 대신으로 죽으시면, 인류를 죄에서 완전히 사해 주실 것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과실로” 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의 가족은 그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고 보복하려고 덤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 사람의 손을 통해서 죽게 하셨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그 충격과 슬픔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고 가해자를 찾아가서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고의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내 눈앞에는 가족이 없어졌지만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내 가족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가족도 잃고 신앙도 잃고 가해자에게 보복을 해서 자기의 앞날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지금은 죄로 인해서 우리 영혼이 비참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선한 구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무리 분노가 치미는 상황을 만나도 절대로 감정으로 남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소중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경우의 상해죄에 관하여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여러 경우를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는데
첫째는, 자기 부모를 치는 경우입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5)
아주 단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부모를 공경해야 할 특별한 책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모라는 그릇에 담아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자식이 자기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은 하나님을 향해 폭력을 휘두른 것이 됩니다. 사람이 제 부모를 쳤다면 그 부모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살인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 부모를 치는 사람, 하나님께 대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아끼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살려두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는 아버지는 가정의 머리이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이며, 모든 재산과 권위의 제공자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만든 출산자요 양육자입니다. 그런 부모를 치는 자는 사람 되기를 이미 포기한자며 앞으로 어떤 악을 행할지 모르니 살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에서도 존속을 치는 경우는 더 엄하게 다스리지만, 하나님의 법은 훨씬 더 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구타하는 것만 아니라, 부모를 저주하는 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에게는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장인 장모나 시부모에게 욕이나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를 우습게 알기를 넘어서 저주한다는 것은 치는 것보다 더한 죄악입니다. 이런 자식을 살려두면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화평이 깨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모에게 어여삐 보여서 부모의 칭찬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야합니다. 노아는 아들 함에게 저주하여 그 후손만대가 저주아래 살고 있고, 유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복을 받아서 홀이 영원히 그를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제 부모에게 사랑을 받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인신매매나 유괴범에 관한 법입니다.
16절에는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람을 유괴하고 납치하는 일은 남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려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미끼로 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일은, 용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을 유괴하고 여자를 납치하는 일들이 빈발하는데,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이 중요하면 남의 목숨도 중요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는 몇 푼을 얻겠다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신매매 하는 사람을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죄를 용서하면 그 사회가 망가지기 때문에 근절시키라는 것입니다.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잡혀 미국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이 얼마나 큰 갈등을 겪습니까? 죄는 끊지 않으면 화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노예의 생명에 관한 법입니다.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20-21)
주인이 종을 때려서 즉시 죽은 경우는 살인죄가 되므로 주인이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맞은 종이 며칠 앓다가 일어나면 주인은 형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일에 게으르거나 신분을 망각한 종이 주인에게 벌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종을 때려서 그 몸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주인이 때려서 종의 한 눈을 실명케 하거나, 이 한 개를 빠지게 하였을 때, 주인은 그 잘못에 대한 배상으로 그 종을 놓아서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주인은 그 종의 노동력을 산 것이지 그 생명을 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은 영구적으로 확정된 신분이 아니라 일시적인 신분이고, 종의 생명도 똑 같이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방인의 법은 달랐습니다. 이방인들은 종의 생명도 주인의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노예의 주인은 종의 노동력의 주인일 뿐이므로 종의 생명을 죽이는 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을 통하여 노동력을 제공받는 대신에 종의 신체와 신변에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기업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만 생각하고 종업원들을 착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업을 통해 얻는 이익으로 가장 먼저 자기 종업원을 돌보는 사람이어야 진짜 신자입니다.
넷째는, 상해에 관한 배상법입니다.(18-32)
1)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상대방을 상하게 했을 경우(18-19).
싸우다가 한명이 돌이나 주먹으로 맞았는데 죽지 않고 며칠 앓다가 살아난다면, 친자가 다친 자를 치료시키고 배상해 주어야 합니다. 이 법은 오늘날의 배상법의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는 싸우다가 다친 것만 아니라 일 하다가 다친 경우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몸이나 그 무엇이든지 손상을 입혔을 경우에 그것을 배상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2-25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하게 한 경우인데,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도 하나님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계십니다. 태아를 상하게 했을 때는 아이 아버지의 청구대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야 합니다. 고의로 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생명의 피해를 입었으므로 아버지의 청구대로 배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신앙과 양심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청구액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재판장이 기준을 두어 판결하게 하고 재판장의 판결대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낙태 말고도 다른 해가 있다면, 그것은 합당하게 배상해야 합니다.
그것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법인가요? 이것은 보복이나 앙갚음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대가를 치르라는 것입니다. 남의 생명을 죽였으면 자신도 죽어야 하고, 남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정당하게 배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법의 정신은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것이며, 누구의 생명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자전거 : But 개인뿐이고)
우리가 생각 없이 행동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남을 해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해를 받을 것을 생각하고 서로 자기 책임 다하고 주의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두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는데,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행동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돕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부지중에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정당한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정당한 보상을 받고 보호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이 법을 주시지 않았다면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이고, 오늘도 정부가 없다면, 무법천지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국가가 제정한 법도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받아 지켜야 합니다. 국법이 왜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는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2) 가축으로 인해 끼친 손해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28- 32).
예를 들어 어떤 집의 소가 지나가는 사람을 받아서 죽게 했으면 이것은 사고입니다. 그때 사람을 죽인 소는 반드시 죽여야 하고, 그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하며, 그때 소의 임자는 벌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부터 소가 사람을 받는 습관이 있어서 놀랜 사람들이 주인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했는데도, 주인이 소를 단속하지 않아서 사람을 받아 죽였을 경우, 소와 주인을 다 함께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개를 키우는 사람은 이 법을 주의해야 합니다. 소 주인이 죽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남은 가족이 배상을 또 해야 합니다. 책임을 맡은 사람이 그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가혹하게 추궁을 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집에서 기르는 짐승에 대하여 말씀했지만, 사실 우리 안에는 더 무서운 짐승이 한 마리씩 들어있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한 것 같은데 일단 깨어나면, 이 짐승은 아무나 들이받고 아무나 해치고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 맹수는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요 혈기요 정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무엇에 약한지 압니다. 이성에 약한 사람이 있고 돈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혈기에 약한 사람이 있고 말 때문에 문제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다스려 짐승처럼 남을 해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또한 만일 내 소가 남의 종을 받아 죽였을 경우에는 그 종의 주인에게 은 30세겔을 내야했습니다. 종의 몸값은 은 30세겔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계시가 숨어 있는데, 우리 예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은 30에 팔리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죄인이 사함을 받는 방법은, 죄인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자기 대신에 죽을 제물을 사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제단에 드림으로 속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대신 팔려가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희생하심으로 우리 모든 인류의 죄 값을 해결해 주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히8:-10).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귀중한 생명을 주셨고, 그에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면서 그 자유에는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책임이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책임이 있습니다. 사장은 사장으로서의 책임이 있고 경비는 경비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서 남을 보호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또한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 생명은 이중으로 은혜를 입었습니다. 생명을 선물 받았을 뿐 아니라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답게, 남의 생명과 소유를 보호해 주면서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만민에게 복을 나눠주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