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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카톨릭 천주교회 신부들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법적인 독신을 고수했지만 오히려 불륜과 음란, 성적 탁락을 공공연히 저지르고 각종 물질적 부패와 타락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면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럴 바에는 차라리 결혼해서 건전한 가정을 이루고 부부와 자녀가 함께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인생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한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기혼자라는 이유가 추가되어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더 많은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젠 종교개혁을 계속 진행하기에 너무나 힘이 부쳐 더 이상 종교개혁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종교개혁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결혼 전 수녀생활하다 루터와 결혼하게 된 그의 아내는 그럴 때마다 루터 앞에 장례복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루터는 그의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소? 왠 장례식 복장이오?” 그의 아내는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마틴 루터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며 다시 묻습니다. “아니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돌아가시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루터의 아내는 이렇게 루터에게 말합니다. “당신 말대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계시다면 그런 하나님을 믿는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낙담하고 좌절하며 힘없이 지낼 수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틴 루터는 다시 심기일전해서 힘을 내고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여전히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그 때 심기일전하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든 찬양을 작사, 작곡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 작사, 작곡했던 찬송가가 바로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오늘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입니다. 그는 이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종교개혁의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오늘 함께 읽은 이 말씀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삶가운데 임재하시고 도와주시며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 학개 1장의 말씀을 계속 살펴봅니다. 오늘은 학개 1장의 제일 끝부분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학개 1장의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하다가 멈춰 있음을 한탄하시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하도록 하시기 위해 선지자 학개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이 15년간이나 멈춰있는 상황속에서 여전히 성전 건축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건축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체험하며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전의 그 감동은 식었고 현실에 안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리는 지난 주와 지 지난 주 2주간에 걸쳐 학개 1장의 앞부분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무슨 역사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쓰실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역사하실 때 성전 건축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어쩌면 현실에 안주하고 매일매일 일상에 찌들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우리의 삶에도 변화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며 정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첫째로 상황을 만드십니다.
학개 1장 12절입니다.
“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오늘 이 말씀에서 저는 제일 먼저 핵심이 되는 구절이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라고 봅니다. 성전 건축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사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룹바벨, 여호수아, 학개 등의 주요 인물의 사명감, 신앙적 적극성, 성품 등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본문에서 스룹바벨, 여호수아, 학개 등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개인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학개를 보내시는 이 일을 통해서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선지자 학개도 ‘본인이 뭘 해보겠다’든지 내가 지도자로서 ‘사람들을 독려해야겠다’라고 다짐해서 성전 재건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것처럼 학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이 사명을 행해라고 하셨기 때문에 단지 그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니 역사가 일어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저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저도 주변의 많은 분들이 저와 저의 사모에 대해 대단하다며 어떻게 그런 연고도 없는 곳, 뭔가 복음전도의 가능성도 잘 보이지 않는 곳, 교회도 아직 세워지지 않아서 맨 땅에 해딩하는 듯 그 곳에서 사역할 수 있냐라고 참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건이 열리지 않고 환경이 안좋은데 어떻게 그 곳에서 그렇게 잘 버티고 있냐고 묻습니다. 전국 여러 곳, 아니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사역하시는 지인 목사님들, 사모님들이 저희를 그렇게 봐주십니다. 그런데요. 저도 저희가 왜 이 곳에서 사역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이렇게 사역하고 있는 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인간적 생각, 인간적 능력, 인간적 헌신 등을 생각해보면 이 곳에 어떻게 있을 수 있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 우리의 취향, 우리의 기대, 우리의 생각등을 고려해서 어떤 일을 만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우리의 삶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인간의 능력이나 인간의 헌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학개가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했기에 역사가 일어났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개를 보내시는 일을 행하셨기에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개를 사용하셔서 학개를 통해 일하기 시작했을 때 또한 같은 맥락으로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이제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성전 재건의 사역이 다시 시작된 날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개 1장 1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그 때’는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날입니다.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이십 사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개 선지자가 처음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다시 하도록 선포하게 된 때를 이미 학개 1장 1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학개 1장 1절을 보시면 “다리오 왕 이년 여섯째 달 곧 그달 초하루”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월 1일에 선지자 사역을 시작하며 성전 건축의 뜻을 말씀하였는데 지금 방금 15절 말씀을 보니 6월 24일에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학개 1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짜상으로 학개가 성전 재건의 하나님 명령을 선포한 지 딱 23일이 지난 날이었습니다. 성전 재건 사역이 중단된 지 만 15년동안 멈춰 있었고 이제 16년째 되는 해 다시 성전 재건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성전은 그로부터 약 4년 뒤 주전 516년에 완공되어 봉헌되어 졌습니다. 우리가 솔로몬 때 지어진 성전과 구별하며 ‘스룹바벨 성전’ 혹은 ‘제2성전’이라고 명칭하는 성전이 바로 이 성전입니다.
이 위대한 역사의 시작은 선지자 학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학개서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학개로 인해서 시작된 일일까요? 학개가 일을 했기에 이 일이 완성된 것일까요? 학개의 탁월한 설교 능력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어떻게 이스라엘백성들은 학개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 수 있었을까요? 학개가 언변에 능숙해서 청산유수같이 말을 잘하고 설득력이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말을 학개가 잘 전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말씀의 내용이 너무 재미있고 유익하였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학개 1장의 첫 부분부터 학개라는 인물을 좋아하고 학개를 쫓아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게 된다면 학개가 처음 말씀을 전파할 때 사람들은 핍박하고 박해하고 무슨 이런 선지자가 있냐는 식으로 며칠 동안은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갑자기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감동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펴본 구절이 말씀해주는 핵심입니다.
학개 1장 12절 중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저를 따라 한 번 해보실까요?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면서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그 시작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그 과정 또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그 결과도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학개 선지자 분명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학개를 들어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우리는 추호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나를 통해서 진행시키는 것일 뿐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들을 들어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움직이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만드시고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가치관속에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고민할 때 나의 능력이나 나의 재력, 나의 소유등을 고민하며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나는 능력이 있고 나는 가진 것이 있고 나의 실력이면 충분히 하나님의 잘 해낼 거야라는 생각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능력, 나의 재력, 나의 가진 것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사람의 능력, 어떤 사람의 재력, 어떤 사람의 소유여부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상황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실 때 일이 진행되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 앞에 하나님께서 상황을 만들어주시고 사람을 사용하도록 기도하며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하나님께서, 둘째로 말씀을 가르쳐주십니다.
학개 1장 13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학개 1장 13절에서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자’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말라크”입니다. “대리로 파견하다”라는 단어가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로 성경에서 “보내진 자, 사자, 전령, 심부름꾼, 천사, 대언자”라는 뜻으로 쓰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에서는 “주의 특사”라고 번역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대언자”라는 의미로 쓰여진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여호와의 위임”은 히브리어로 “말라쿠트”입니다. 이 단어 역시 앞에 나온 “특사, 사자, 보내진 자, 심부름꾼”을 뜻하는 히브리어 “말라크”와 같은 뜻의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뜻은 어느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내진 사람이 전하는 “말, 교훈, 계시” 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선지자 학개도 자신의 능동적인 의도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사람이며 그가 하는 말 역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 그대로를 전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진리로 주셨습니다. 그 진리를 들을 때 우리는 제대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시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선지자 학개를 사용해서 말씀하시지만 어떤 수단과 어떤 방법이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가십니다. 특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말씀인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에 나오는 ‘감동’이라는 표현을 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영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감동’은 그런 감동과는 다른 영적인 감동 ‘영감’입니다. ‘영감’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감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시편 33편 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성경 기록자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지식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가르쳐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호흡을 그들이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 자 한 자 모두를 읽어주는 그대로 받아적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응로 기계적 영감이 아닌 유기적 영감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신학적으로 성경말씀은 완전축자영감되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부분, 심지어 사용한 단어, 글자까지 성령님께서 관여하시고 완전한 영감으로 성경기자들을 사용하여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이 쓰는 용어와 단어의 표현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다 간섭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어떤 오류도 없고 어떤 인간적인 생각도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록한 것임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속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사고와 지식이 하나님을 능가한다고 믿으며 성경속에서 과학적 오류, 역사적 오류, 도덕적 잘못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 오류 혹은 실수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절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간혹 성경속에서 충돌이 되는 말씀이 보여진다고 해도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다 풀어주시기에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지식의 한계, 우리의 지식적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뿐이지 성경말씀 자체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진리가운데 하나님 말씀만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신명기 8장 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스스로 내가 노력해서 뭔가를 깨달아 내 스스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매주 말씀을 듣기 전에 왜 먼저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성령님께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달라고 기도할까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변화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먼저 우리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때 말씀이 깨달아지는 은혜가 먼저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하나님께서, 셋째로 마음을 하나로 만드십니다.
학개 1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오늘 본문 학개 1장 14절에 보니 “마음”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에 “마음을 감동시켰다”라는 표현으로 나오는데 여기에 ‘마음’으로 쓰여진 단어 히브리어 “루아흐”는 ‘신, 영, 바람, 기운, 호흡’등의 뜻으로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뜻보다는 ‘영’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면서 ‘영’이 하나로 모이도록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포로되었다가 이스라엘로 귀환한 사람들의 영혼을 만져주시고 그들의 영혼을 새로운 영으로 회복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새로워지고 영혼이 변화를 받으면서 이제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16년 멈춘 공사가 이 때를 계기로 다시 시작하게 되고 이로부터 4년이 지난 후에는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하나님 집의 회복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내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질 때 시작합니다.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미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새로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심령, 믿는 자의 마음속에는 이미 성령님이 계시고 그래서 믿는 자는 성령의 전,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전 재건 사역에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학개의 위대한 설교가 그들은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개가 지도자들을 잘 설득하고 독려했기에 지도자들이 먼저 변했고 그들의 헌신이 백성들을 함께 움직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경영마인드나 사람을 관리하는 처세술등을 잘 배워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개의 위대한 설교 이전에, 학개의 인맥관리와 인간적 소통이전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감동시키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움직이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 물론 인간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잘 준비해야겠죠? 설교의 준비, 사람관리기술, 인간적인 지식과 각종 기술등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잘 준비되어서 내 능력으로 이 일이 이뤄졌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신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사역의 기준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역사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역사로 진행되고 하나님의 역사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 33장 2절, 3절을 또 함께 읽어봐야겠습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찾았을 때 내가 깨달은대로 내 방식대로 일을 진행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결과만 가르쳐주시고 과정은 니 마음대로 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일을 계획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일을 진행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일의 결과까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줄 여러분들은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이 모든 과정, 이 모든 역사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학개의 수고함이 있었고 여러 상황속에서 인간의 헌신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마음까지 움직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한 마음되도록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어떤 큰 일을 하면서 어떻게 이 일을 할 때 필요한 사람을 모으지, 어떻게 필요한 돈을 채우지, 어떻게 이 일을 진행하면서 중간중간 어떤 동기부여를 하지 등등 큰 일을 진행하기 위한 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제일 중요한 고민은 하지 않는 듯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재정이 없어도, 나에게 일을 하기 위한 사람이 없어도, 나아게 이 일을 진행할 만한 지식이나 지혜가 없어도, 또한 나에게 사람들에게 동기부여할 만한 언변이 없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뭐가 있어야 하는 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학개 1장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학개 1장 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혼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학개가 백성들에게 한 말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백성들, 아니 백성의 지도자들, 아니 더 나아가 학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에게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하나님만 나와 함께 해주신다면 나에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학개 1장 앞부분에서 백성들이 ‘아직 때가 안되었다’고 핑계하고 ‘자신들이 성전을 건축할 여력이 없다’고 핑계를 대지만 결국 문제는 시간이나 재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였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데 뭐가 고민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데 뭐가 불평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데 더 뭐를 핑계대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주와 지 지난 주 말씀을 통해서 이 성전 건축에서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불리는 건물의 건축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전의 재건의 핵심은 성전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기위해 성전이 건축되어져야하는거지. 그 건물 자체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이 성전회복을 통해 이스라엘이 깨달아야될 것, 이 성전회복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깨달아야할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임마누엘”하나님입니다. 히브리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뜻하는 이 “임마누엘”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이 와도, 인생에 어떤 방해가 있어도, 인생에서 내가 어떤 환란을 당해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시기에 내가 하나님편에만 붙어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잘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두려운 생각들을 극복해 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일에 형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모든 것을 내가 열심히 해서 다 이뤄내는 듯 보여지지만 결국 나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해주신 것임을 깨닫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께서 항상 임마누엘 해주실 때 우리는 모든 일들속에서 하나님의 때에 맞게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막막하고 힘든 일들이 우리 앞에 놓여도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우리의 생각과 형편을 하나님께 맡기며 우리 일상의 삶을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시는 은혜가 넘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