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농원 산사나무 - 혹독하게 나를 일깨우다
Each poet describes a similar experience: his reaction to a flower he sees while taking a walk. Tennyson's verse is: Flower in a crannied wall, I pluck you out of the crannies, I hold you here, root and all, in my hand, Little flower—but if I could understand What you are, root and all, and all in all, I should know what God and man is. Translated into English, Basho's haiku runs something like this: When I look carefully I see the nazuna blooming By the hedge!
(산책길에서 꽃을 본 두 시인의 시를 보자. 1. 테니슨의 시 : “벽을 뚫고 나온 꽃을 / 뿌리째 뽑은 것은 / 너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 신과 인간이란 존재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2. 바쇼의 하이쿠 : “눈여겨보니 / 울타리 옆에 / 냉이꽃 피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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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명 : Crataegus pinnatifida Bunge / 장미과 산사나무속
♧ 꽃말 : 유일한 사랑(only love)
화정을 떠나지 않으면서 동네라는 생각을 가져본 계기는 이곳 분들과 함께 산에 다니면서부터였다. 오랫동안 북한산만 다니다 보니 이따금 지방산이 욕심으로 차올랐지만, 혼자 다닐 엄두는 나지 않아 조바심이 날 즈음 우리 동네에 산악회가 생겼다. 얼른 가입해 동네 분들과 어울리면서 내 거주지에 고향 같은 관계라는 개념이 들어섰다.
이웃하고도 인사하지 않고 지내던 불손한 사람이 다른 단지에 사는 사람들과 수시로 어울리며 정을 나눈다는 것, 모순은 있지만 도시 공간이 만든 필연일 수도 있다며 몇 년은 익명의 자유가 그립지 않았다. 회원 감소로 산악회가 해체되고 나서 화정은 다시 동네 아우라가 없는 사막 같은 터전이 되었지만 애달프도록 집착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거리를 다녔다. 아니 관계 그물망에서 벗어나 시선 없는 활보가 보장되니 마음껏 사람과 사물을 관찰할 수 있어서 본래 나를 찾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동네에서 관계의 소유라는 따듯한 맛을 보고 난 뒤라 이따금 허전한 적이 있었다. 동네 형님에게 문득 전화를 건 뒤 대충 차려 입은 옷을 걸치고 뚜벅뚜벅 찾아가 편안하게 막걸리 한잔 걸치며 존재의 외로움을 달랜다는 것, 이는 혼자서는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관계의 끈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고향이 그리운 것은 사람들 간에 이어진 밭둑 같은 친밀한 관계들이 만들어낸 살가운 일들이 풋풋한 추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들면 고향이라고 하는데, 그 정 또한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혼자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데, 이러한 관계가 세월이 흘러 다시 내게 와버렸다. 같은 동네는 아니지만 고양시와 파주시라는 틀 안에서 숲해설가 동기라는 타이틀이 엮은 관계가 고향 같은 관계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숲과 나무 공부라는 정적인 행동을 중심으로 두고 만나는 모임이기에 산행을 중심으로 동적인 활동을 했던 산악회와는 다른 점이 있지만, 고향 같은 동네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거의 혼자 하는 일이 많은 나의 인간관계는 외줄처럼 단조로운데 숲 동기들과의 만남이 지속되면서 한 분의 연결로 급기야 동네 농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무를 관찰하고 해설하는 숲해설가가 아니라 나무를 키우고 가꾸고 파는 분들은 나무를 어떻게 보고 말할지 무척 궁금했는데, 그 소원이 현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감사하고 감격했다.
에리히 프롬이 인용한 시를 보자.
[산책길에서 꽃을 본 두 시인의 시를 보자. 1. 테니슨의 시 : “벽을 뚫고 나온 꽃을 / 뿌리째 뽑은 것은 / 너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 신과 인간이란 존재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2. 바쇼의 하이쿠 : “눈여겨보니 / 울타리 옆에 / 냉이꽃 피어 있네”]
테니슨은 19세기 영국 시인이고, 바쇼는 17세기 일본 시인이다. 서양과 동양으로도 구분된다. 여기서 테니슨은 꽃을 낱낱이 분해한다는 환원주의적 사고 개진을 위해 꽃을 소유한 뒤 이를 통해 과학적 지식을 얻고 나서 신과 인간 존재를 통찰해본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즉 소유를 통한 존재 확인이다. 반면에 바쇼는 눈에 확 띄지 않는 존재를 소유하지 않고 그저 관심만 주면서 존재 통찰을 한다. 존재를 파괴하지 않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하면서 합일(合一)을 이루려는 동양적 사고이다.
여기서 숲해설가는 동양적 사유의 결과를 전하는 사람이고, 농원 및 조경 관계자들은 서양적 행동으로 지상 공간을 재창조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상적으로 그런 면이 있어 보이지만, 단언할 수 없다. 그래서 농원 대표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아끼는 나무가 무엇이냐고. 그윽한 표정으로 주저 없이 산사나무라고 해서 그 나무에 다가갔다.
내 허리 높이만한 항아리들이 엎어져 있는 바로 옆에 바다 속 미역처럼 파랗게 팔랑거리는 갓 나온 잎들을 무성하게 달고 있는 산사나무를 보자마자 누렇게 찌든 내 마음에 쏴아아 햇살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체구에 비해 머리가 큰 사람이 오랫동안 기른 생머리를 마감하고 부풀대로 부풀린 파마를 한 것 같은 잎들 속으로 영원히 빠지고픈 욕구가 솟구쳤다. 나뭇잎들 사이에 푹 파묻히면 나를 하늘로 둥둥 띄우며 고향의 흙바람으로 시린 등을 다듬듯이 긁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무아(無我)의 행복한 느낌은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연둣빛 수평선이 끝나는 경계에는 나무 버팀목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힘으로 중력을 이기는 듯한 나무줄기는 절반만 형태를 가지고서 생장을 해나가고 있었다. 오로지 나무를 살리기 위해 썩어 있는 심재를 과감히 파내고 약품 처리를 했다는 농원 대표의 말이 들려왔는데, 아마 그러지 않았으면 300년 된 이 산사나무는 운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변재만 남아 있어도 뿌리에서 물을 올리고, 잎에서 양분을 내리며 생장을 해나갈 수 있는 지구 최고의 생명 시스템을 소유한 나무의 빈 터를 자세히 보았다. 뭉크의 절규보다 더 절박하게 갈라진 신음의 골들이 밭고랑처럼 깊게 나 있었고, 감히 손끝으로 대어 소유하려는 불순한 욕망을 불허하는 위엄도 풍기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접전이 벌어지는 찰나 홍매화, 설중매, 복숭아, 살구, 목련, 앵도 등을 돌며 꽃향기를 풍선처럼 머금은 봄바람이 밑동 위 여백의 공간으로 흘러가자 내가 산사나무인지 산사나무가 나인지 잠시 분간을 못했던 몽롱한 시간이 벌침처럼 깨어났다. 그러자마자 이슬만큼 침이 고였는데, 지난해 나서 마르게 남아 있는 검은빛 산사 열매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분리가 아닌 하나의 존재 사유는 매번 실패하고, 분리로 대상을 섭취하는 사유만이 본능이라는 생각에 늘 처참해 한다. 이게 억누를 수 없는 기정사실이면서도.
산사나무 학명은 Crataegus pinnatifida Bunge이다. 속명 Crataegus는 ‘힘’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kratos’와 ‘갖다’를 의미하는 ‘agein’의 합성어로 재질이 단단하다는 뜻이란다. 종소명 pinnatifida는 날개 모양으로 잎의 가장자리가 깊게 갈라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단다. 명명자 Bunge는 러시아 식물학자를 일컫는다.
농원 대표는 왜 중간 정도에 이 산사나무를 옮겨다 놓고 성의를 다해 돌보고 있을까? 잠깐 물어보니, 사계절 다 예쁘다는 말을 한다.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농원이나 조경 관계자는 자연이 준 선물을 상품으로만 볼 줄 알았는데, 서양식 사고로 자르고 섞고 다듬어 가치와 가격만 올리는 사업가로만 알았는데, 이는 나무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있을 뿐 나무와 하나 되는 교감이라고는 아직 1mm도 만들어내지 못한 얼치기 숲해설가의 편견일 뿐이었다. 그래서 고작해야 산사(山査)는 산사나무의 붉은 열매가 산에서 아침 해 뜨는 모습과 닮아서라든가, 벽사(辟邪)를 가져 우리 곁에 가까이 두는 나무라는 말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이 비루한 삶에 반성만 산더미처럼 올려놓게 되었다.
산사나무의 꽃말은 ‘유일한 사랑(only love)’이란다. 그래서 결혼식, 기독교, 미국 이민사에 등장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미덕은 사랑이라는 말에 힘을 실어주는 것일까? 아니 지구의 생명체들은 경쟁과 배타가 아니라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호혜의 관계인데, 이를 못 보는 것은 오직 내 탓이 아닐까? 우주는 이미 하나인데 나만 둘로 보는 우둔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나무교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다육식물 하나 살아가게 하지 못하는 내가
주워온 나뭇가지 물병에 담고는 물 제때 갈아주지 못하는 내가
전지 당하는 거리의 나무들을 보며 통탄해 한다.
싹둑싹둑 자르는 그 어떤 세력을 원망한다.
산사나무 사계절 못 보고도 산사나무를 해설하는 내가
죽어가는 나무 하나 살리지도 못하는 내가
나무로 만든 종이 더미에 새겨진 흔적만 읽고 세상을 말한다.
나무와 하나 되어 사는 분들에게 편견의 시선만 던진다.
아, 방구석에 앉아 자판만 두들기는 이 가련한 삶이여!
아, 썩은 나뭇잎보다 못한 구린내 나는 언어만 토해내는 이 얼빠진 삶이여!
이제 그대에게 나무가 있어
나무가 맺어주는 인연들이 있어
나무가 엮어주는 관계들이 있어
그것들이 만들어주는 참된 소유가 있어
언젠가 진짜 사람이 될 것 같으니
그들에게 감사하고
나무에 감사하고
겸손하게 겸허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대가 아닌
나 자신이여!
혹독하게 깨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