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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전화 건 ‘엄마’는 누구
유치원에서 낯선 여인의 손에 이끌려 조퇴한 어린이는 실종 5일 만에 결국 사체로 발견됐다.
사진은 범인의 현장 검증 모습.
사진=MBC 화면 캡처
1990년 7월 5일 서울 S 여대 음악대학 건물 앞. 오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교내로 들어선 경찰 호송차에서 한 젊은 여성이 여경의 부축을 받으며 내렸다. 술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성은 입을 꼭 다문 채 경찰들에 둘러싸여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여성의 앞에 놓인 것은 붉은색 티셔츠와 노란색 바지를 입은 여아 마네킹이었다. 잠시 후 여성은 마네킹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고 손으로 목을 졸랐다. 그런 다음 마네킹을 옥상에 있는 물탱크와 콘크리트 벽 사이에 거꾸로 밀어넣고 20리터들이 빈 기름통 두개로 가렸다.
여성의 동작이 이어질 때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혀를 찼고 일부 사람들의 입에서는 분노에 찬 욕설도 터져나왔다. 1시간 반 남짓 경찰 지휘에 따라 마네킹을 붙들고 섬뜩한 동작을 이어가던 여성은 끝내 무릎을 꿇고 다리에 머리를 파묻은 채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이번에 김원배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18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강아름 양(가명·6) 유괴살해사건’이다. 위의 장면은 사건발생 닷새 만에 검거된 범인 홍민자(가명·23)의 현장검증 모습이다.
1990년 6월 25일 오전 11시 20분경. 서울 송파구 ○○유치원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 ○○유치원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기 아름이네 집인데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아름이가 조퇴를 좀 해야겠어요. 유치원 앞으로 보내주세요. 제가 금방 데리러 갈게요.”
통화내용대로 약 10분 후 한 젊은 여성이 유치원 앞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엄마가 보내서 왔다”고 강 양을 안심시킨 후 강 양의 손을 잡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것이 강 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강 양은 이날 집에 귀가하지 않았다. 물론 강 양의 집에서는 조퇴를 요청한 사실도 없었다. 그렇다면 유치원에 전화를 걸어 조퇴를 부탁하고 강 양을 데리고 간 여성은 대체 누구였을까.
강 양 부모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모든 정황상 처음부터 유괴사건이라고 판단했다. 강 양이 다니는 유치원에 미리 전화를 걸어 유치원 관계자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한 후 강 양을 데려갔다는 점만 봐도 범인은 분명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강 양의 집으로 협박 전화가 걸려온 시각은 다음날 오후 5시경이었다. 범인은 “아름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돈을 준비하세요”라고 말한 뒤 1분 만에 전화를 끊었다. ‘유괴’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오후 5시 10분경 범인으로부터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범인은 ‘이상민’이라는 차명계좌를 알려주며 당장 5000만 원을 입금하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범인은 “신고할 경우 아름이를 죽이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 범인으로부터 “돈을 입금했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강 양의 어머니는 “일단 준비된 돈 3000만 원을 보냈으니 확인해보라”고 말했고 여성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범인의 마지막 전화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강 양의 부모는 딸이 유괴된 것을 알게 된 직후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범인이 수사의뢰 사실을 알아차릴 경우 강 양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수사팀은 수사를 비공개로 진행했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강동경찰서 형사들은 강 양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일제 탐문수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범인의 동선파악에 주력했다. 그 결과 범인이 6월 29일 오후 2시 45분경 강 양의 부모가 입금한 돈 3000만 원 중 30만 원을 인출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약 1시간 반 후부터는 모 호텔 내에 있는 현금인출기 등에서 몇 차례에 걸쳐 돈이 인출된 사실도 알아냈다. 범인은 수차례에 걸쳐 총 260만 원을 인출해간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강 양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수사팀은 범인이 돈을 인출해간 현금 인출기를 파악, 범인의 위치추적에 들어갔다. 그리고 해당 은행 직원들에게 비밀리에 협조를 부탁하는 긴급 타진을 쳤다. 그 결과 한 은행 직원으로부터 “웬 젊은 여자가 10여 분간 수차례에 걸쳐 현금 인출기를 통해 거액을 인출해갔는데 수상해보였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인근 공중전화를 통해 강 양의 부모에게 수차례 협박전화를 하고 소액으로 나눠서 돈을 인출해간 여성, 그녀는 분명 유력한 용의자였다. 은행 직원의 신고를 받은 수사팀은 해당 은행 주변을 포위, 탐문수사에 들어가 당일 오후 4시 40분경 을지로역 계단을 내려가는 용의자를 긴급 체포하기에 이른다. 놀랍게도 범인은 겉보기에 너무도 연약해보이는 스물세 살의 여성 홍민자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수사팀에 의해 검거된 홍민자는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수사팀은 ‘아름이는 어디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홍민자는 ‘잠시 후 서울역에서 애인을 만나기로 했다. 애인이 아름이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고 말하며 시간을 끌었다. 강 양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던 수사팀으로서는 홍민자의 얘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이때까지만 해도 공범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수사팀으로서는 매사에 신중해야 했다. 홍민자의 얘기대로 서울역으로 간 수사팀은 서울역을 배회하며 그녀의 애인을 기다렸다. 홍민자의 애인이 강 양을 무사히 데리고 오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오후 8시 30분이 지나도 홍민자의 애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생기면서 수사팀은 초조해졌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철로에 열차가 들어오는 신호가 울려 펴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홍민자가 철로 위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런 홍 씨의 행동에 수사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열차는 철로에 나뒹군 홍 씨의 앞에서 극적으로 멈춰섰다. 홍 씨는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들과 수사팀은 강 양이 살아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홍 씨는 입을 다물었다. 강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홍 씨가 검거된 다음날인 6월 30일 오후 강 양은 S 여대 음악대학 옥상 물탱크실에서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다. 강 양은 물탱크와 콘크리트 벽 사이 30㎝가량의 틈새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강 양의 이름표가 붙은 노란색 유치원 가방과 우산, 빨간색 신발 등이 발견됐다.
불과 여섯 살짜리 여자 아이를 상대로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조사 결과 홍 씨는 가장 가까운 가족은 물론 주변인들에게도 철저히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홍민자의 부모는 딸에 대해 ‘S 여대 정외과를 졸업했다’고 말했다. 홍민자는 그해 2월 S 여대 졸업식에 가족과 친지들을 불러놓고 학사모 차림으로 기념촬영까지 했다고 했다. 하지만 조사해보니 홍민자는 대학 졸업은커녕 입학한 사실조차 없었다. 서울 소재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홍민자는 대학 진학에 실패하자 부모와 주변인들에게 S 여대에 입학한 것처럼 속여왔던 것이었다. 홍 씨는 우연히 습득한 타인의 학생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여대생 행세를 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홍민자는 대학에 입학한 것처럼 속이고 그동안 부모로부터 등록금과 하숙비 등을 받아 생활해 왔던 것이다.”
‘가짜 여대생’. 수년 동안 부모조차 감쪽같이 속여온 홍민자의 실체는 수사팀을 경악케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홍 씨는 왜 ‘유괴’라는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홍민자에게는 당시 1년 전부터 교제해오던 회사원 애인(26)이 있었다. 홍 씨는 애인에게도 자신의 진짜 신분을 숨기고 ‘여대생’으로 행세하며 교제해오던 중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두 사람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그 여성은 어떻게 알았는지 홍민자가 가짜 여대생이라는 사실을 폭로했고 애인에게 자신의 실체를 들켜버린 홍민자는 심한 자폐증에 빠졌다고 한다. 더구나 애인의 부모마저 자신과의 교제를 완강히 반대하자 홍민자는 이러다간 애인과 영영 멀어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며 몹시 불안해 했다고 한다. 결국 홍민자는 부모들 몰래 애인과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목돈을 구할 방안을 찾는다. 그것이 바로 유괴였다.”
홍 씨의 여아 유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홍 씨는 강 양을 유괴하기 한 달 전에도 한 여아를 유괴했다가 풀어준 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해 5월 말이었다. 홍 씨는 송파구의 한 초등학교 1학년 여아(7)를 자신의 집으로 유괴해 옥상에 있는 종이상자에 가뒀다. 그러나 아이 부모가 아이를 찾아 나서자 홍 씨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범행을 포기하고 결국 2시간여 만에 아이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여기서 멈췄다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홍 씨는 또 다시 범행을 계획한다. 약 한 달 후인 6월 25일 마음을 굳게 먹은 홍 씨는 오전부터 무작정 송파구 소재의 유치원에 들어가 범행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우산꽂이에 꽂혀있는 우산에 붙어있는 강 양의 이름을 보게 된다.
‘강아름이라…’
강 양의 이름을 기억해둔 홍 씨는 유치원을 나와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오전 11시 20분경 공중전화로 강 양이 다니는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집안 일’을 들먹이며 유치원 측에 양해를 구하고 강 양을 조퇴시켰다. 아무도 홍 씨를 의심하지 못했다. 강 양도 ‘엄마가 보내서 왔다’는 홍 씨의 말을 믿고 따라 나섰다.
택시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강 양을 S 여대 앞으로 데려간 홍 씨는 경양식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강 양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울며 보채기 시작했다. 강 양의 태도에 다급해진 홍 씨는 인적이 드문 S 여대 음대건물로 강 양을 데려갔다. 그리고 강 양을 위협해 집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강 양의 입을 막고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강 양을 유괴한 지 약 6시간 만의 일이었다.
홍 씨는 ‘편집성 망상증’이 있었던 인물로 전해진다. 하지만 재판부는 여아를 상대로 한 잔악한 범행수법에는 어떠한 정상참작의 이유도 없다고 판단, 사형을 선고했다. 홍 씨는 깊은 죄책감에 제대로 말도 못하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뼈아픈 참회의 나날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홍 씨는 91년 겨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