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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20 바리새인을 생각함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앞글에서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 곧 당시 종교지도자들의“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따르는 모든 신앙인의 신앙이 바리새인이 가진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려면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을 좀 더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라든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로 말씀의 문을 여신 것 볼 때,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뭔가 정상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의(신앙생활이라고 하자)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잘 살필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저들을 살펴봄에는 바리새인들의 의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말세를 만난 우리의 신앙에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서일 것입니다.
-먼저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신앙 행태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우선 [그들은 성경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고, [일어나는 현상들을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알아보려는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 9:16절을 보면,“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저들은 당시 예수라는 청년이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를 안식일에 고쳐준 사건이 발생하자 이런 반응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문둥병자를 고쳐주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등 표적을 행하고 다녀, 그 신분에 대하여 의심이 더해 가던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 청년 예수가 급기야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띄워주는 기적을 안식일에 행하자 바리새인들은 과연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했는데, [그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다름 아닌 저들이 가진 신앙 곧 저들이 지키고 있던 율법을 근거해서, 즉‘안식일을 지키라’라는 성경 말씀이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왜 그 기준으로 평가를 했냐 하면, 예수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성경의 말씀’을 어길 리가 없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요? 안식일을 안 지키고(?) 눈을 띄워 준 예수가 잘못인가요? 이도 저도 아니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걸 보니 하나님께 로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한 바리새인들이 잘못인가요?
저들을 보면서 우리를 볼 때, 우리 중에는 마치 일요일(매일이 주의 날로 여기는 사람에게)을 범하는 사람을 향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주일을 범하느냐며 기독교 교리를 어기는 자들이라며 정죄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비판한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는 자들이지요?
교회 안에 있는 이런 자들은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 되심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서에서 보면,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줄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감사, 금식 기도를 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눅8:11~12)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건 솔직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처단(요8:1~11)은 할지언정, 자신들은 간음하지 않았으며, 세리들같이 남의 재물을 토색 한 일도, 불의를 행한 일도 없었습니다.
분명 토색, 불의, 간음하지 말라는 성경의 기준에 따라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았고, 또 경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적으로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그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정말로 감사해서’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금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 것이 뭐가 잘못이길래, 도대체 금식도 하지 않고, 오히려 토색하고 불의한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는데 바리새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지적하신 대로 금식할 때에 슬픈 기색을 냈는지 혹은 얼굴을 흉하게 했는지(마6:16)는 알 수 없겠으나, 아무튼 성경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라고 했기 때문에‘말씀대로’저들은 금식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금식 기도가 무슨 유행처럼 성행 중인데, 왜 바리새인들만 욕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십일조 문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늘날도 그렇지만 십일조를 정확하게 바치지 않는 것이 죄지, 어떻게 소득의 십일조를, 그것도 회향과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까지 꼬박꼬박 잘한 것(마23:23)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만약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만큼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인간들의 교회에서는 그는 틀림없이 모범 신자요, 교회의 보배며 기둥이라며 추앙받지 않을까요?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묵사발’이 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바리새인들로서는 상당히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23:5~7)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은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물론 성경에 그들의 변명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변명을 유추하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먼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그 차는 경문을 넓히고, 옷 술을 크게 한 것이 문젠데, 이 경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집에 앉았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어느 때든지 전천후로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말씀을 가죽에다 매어 기호를 삼는 것이었고(신6:4 ~ 9), 또 옷 술 역시 그 옷 술을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한 표(민15:39)로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만들어 달고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도 잘 기억할 겸, 오늘날 교인들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교패를 대문 앞에 붙여 놓음으로써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 앞에서 시인(마10:32) 하는 걸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이처럼 잘‘순종’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해서 그렇게 달고 다녔던 것입니다.
역시‘말씀대로’경문을 차라고 해서 찼고, 옷 술을 달라고 해서 달았던 것뿐인데, 그렇게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했다고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되는 때는 또 언제냐는 것입니다.
또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지위가 소위 ‘지도층’이었는데, 그런 지도층 인사로서 잔치 자리나 회당에 가서 낮은 자리에 앉는 것도 오히려 일부러 겸손한 척 한다(골2:18)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잔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상석에 앉고 싶어서 앉는 것이 아니라,‘연회장’이나‘성경 봉독자’로서 혹은‘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어쩔 수 없이 상석에 앉는 것이지, 결코 자기를 내세우거나 높이고자 함이 아니요, 정말 상석이 ‘좋아서’ 앉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는데, 이런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무조건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책망을 하신다면 참으로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대 사회의 제도나 조직에 문제의 주인이 있었던 것이지, 바리새인 하나하나가 정말로 겸손하지 아니했고, 교만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자기에게 문안 인사하는 것을 일부러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더구나 바리새인들은 대부분이 랍비로서 선생의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랍비더러 랍비라 칭하는 것이 잘 못ㅍ이라면 바리새인들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종교 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을‘구원’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겪었던 강의 위험이나 바다의 위험 등과 비슷한 고초를 겪으며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정도(마23:15)로 전도에 대한 열심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 정도의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매년 전도 왕 상(?)을 독차지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열심이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면으로 생각해 볼 때 바리새인들에게 한 가지 잘못이 있었다면 순전히 오늘날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예수 시대의 유대 땅에 태어난 죄 밖에 없다. 라고 생각이 들 수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그러한 외부적 단장도‘신앙 성장’의 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인 이상 더러운 외모보다 깨끗한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예의’겠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어야 하느냐 씻지 않아도 괜찮으냐. 하는 문제(마15:1 ~, 눅11:38)는 이미 우리의 상식으로 봐도 바리새인들의 판단이 옳은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는 것이 위생적으로 보나 점잖은 신사의 체통으로 보나 어느 모로 보더라도 합리적이고 타당하며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지 하나님 믿는다고 어찌 떡 먹을 때 손도 씻지 않으랴!
문제는 그러한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고‘장로들의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인데, 이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도 마치 오늘날 교회가 ‘교회법’으로 술 먹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라고‘권하는’것 처럼 떡 먹을 때는 손을 씻어야 한다고 ‘권한’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럼 손도 안 씻은 채로 떡을 먹고, 신자가 되어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 것이 보기에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란 말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변호에 대하여 어떤 이는 성경 말씀대로, 그들이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고 훨씬 중요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지 않느냐(마15:8)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지당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그 마음이라는게 또 그렇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받는다는 말씀(롬10:9)도 있고 보면,‘입술로도’하나님을 시인하고 존경해야 하는데, 사람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두 번도 아니고 어떻게 일생을 통하여 하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옛사람인 사울이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열심히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빌3:5~6)
율법의 의에 있어서 흠이 없이 살았던 사울이 교회를 핍박했을 때는 그것 역시‘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것도 구약 성경의 기준 위에서 출발한 것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의 열심이 예수를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인데, 그렇다면 이런 사울을 당시 누가 하나님을 향한‘마음’이 없었다고 비난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는 당시에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의 기준으로 정말 흠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미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 위하여 함부로 ‘여호와’를 입에 담지도 아니하고, 우상을 만든다거나 거기 절하는 것은감히 단언컨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안식일을 기억하고 항상 거룩하게 지켰으며, 간음, 살인, 도적질, 거짓 증거 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기도 생활 열심히 하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詳考)했으며(요5:39),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헌금을 비롯하여 각종 헌금을 열심히 드렸으며, 마음과 뜻을 다해 전도한 사람이 바리새인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 사회에서의 윤리 도덕에서도 이들은 존경을 받을만 했으며 예의범절도 아주 깍듯했던 의인들이었습니다.
또한 개중에는 비록 밤중이긴 했지만 목수의 아들 청년 예수가 과연 메시아인가 하여 당대의 지도층이던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오는 등, 신앙적 갈등의 모습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을 어찌 싸잡아 다 잘 못 되었다 할 것이며, 오늘을 사는 신앙인 가운데서 이런 바리새인을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는 자 과연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엔 바리새인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주이신 예수께서 그러한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이 틀렸다고 비판하고 너희는 그들같이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오늘날 신자들은 바리새인들이‘의인’으로 살아서 틀렸음으로‘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전도에 애쓰지도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배나 더 지옥 자식 되게 할까 두려우므로.)
또한 안식일(주일)을 율법 시절처럼 온전히 지키지도 않고 삽니다. (안식일을 온전히 지킨다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아님을 보았으므로.)
새벽기도 철야기도 열심히 하지만 그것 역시 신앙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신앙의 기준을 삼던 바리새인보다 그렇지 아니했던 세리를 본받고자 해서.)
그래서 오늘날에 교회 안에는 바리새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일취월장 성장 발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입니다.
신자들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통회 자복의 기도를 드리고,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갈때에도 옷 단장 얼굴 단장 보다는 마음 단장에 신경을 더 씁니다.
또‘내가 신앙의 기준’이라는 바리새인의 의 즉 저들의 종교적인 교만이 틀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들은 낮아질 줄 아는 겸손도 가지고 삽니다.
또한 잔치나 회당의 상석에 앉는 것이 별로 아름답지 못한 것임을 알기에 가능하면 낮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딱 한 가지 애석한 점이 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 교인들의 겸손은, 옛날의 교만을, 그리고 오늘날의 통회 자복의 기도는 옛날의 의인 됨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그대로 ‘뒤집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복음서의 저들을 보면서 오늘날의 우리의 무엇을 보고 있으신지요?
그리고 예수의 바리새인들을 향한 꾸짖음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셨는지요?
바리새인들은 유대 종교를 등에 업고 율법 지킴을 자기 의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의(유대교인으로 살고 있음을)로운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자기 의]에 빠져 산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목적은 종교로 살게 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그런 의를 행하는 행함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한 자기를 희생하는 것으로의 나타남이 전혀 아닌, 구원케 하는 그리스도의 의로 사는 것이 결코 아닌, 종교행위로 사는, 자기 의로 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따르는 이유와 목적이 종교로 자기 의로 사는 저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동시에 내 신앙도 살펴보면서, 주님이 저들에게 하신 말씀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종교인이 되어 무엇을 잘 지키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고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거듭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이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하신 말씀을 주어 들은 자들이 듣고 자기 마음 안에 가지게 하여, 주님의 말씀을 따라 구원받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아 기독교 교인이 되어 거듭난 주님의 자녀가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의로 이웃을 구원하는 삶을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