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연대로 욥기 42:7-9
지난 주에 연회가 있어서 인천을 가는데 인천 들어가는 하이패스 톨게이트 앞에서 이미 차선을 바꾸기도 어려운 지점에서 갑자기 차한대가 제 쪽을 향해 질주는 하는 겁니다. 순간 사고를 직감하고는 크랙션을 누르면서 브레이크를 잡는데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뼘을 사이에 두고 두 차가 멈췄어요. 그리고 창문을 여는데 상대운전자가 어떻게 할 줄을 모르셔요. 죄송하다고 그렇게 미안해 하시는 모습 처음봤어요. 저도 놀래긴 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누가 떠올라요? 저의 아내가 떠올라요. 저의 아내가 그랬거든요. 운전을 하다가 앞에서 답답한 사람 나타나면 나다 생각하라구요. 그래서 그 담부터는 신호등이 바뀌어도 안가는 사람이 나타나도 중간에서 핸드폰을 하면서 가는 운전자를 만나도 앞에서 교통에 방해를 주는 운전자를 만나도 내 아내가 운전을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운전을 합니다. 어찌했든 그 운전자가 정말 미안해 하시니까 화가 안나더라구요.
최근에 언론에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두환씨 손자 전우원씨입니다. 전두환씨 사후에 아마도 자식들간의 재산 싸움이 심했을거라구 추측이 됩니다. 돈이 없으면 형제들도 안 싸웁니다. 그런데 돈이 많으면 반드시 재산 싸움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 재산 싸움에서 약자로 전락했기 때문에 정우원씨도 등장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면 진심이 느껴집니다. 태어날 때부터 학살자의 후손으로 지목받으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 권력이 주는 안락함에 취했던 적도 있었고 스스로 절망해서 극단을 선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부모님이 하는 행동들에 감동을 받으며 살아도 때로는 쉽지 않은 인생일텐데 술에 마약에 바람에 민중들의 고혈로 만들어진 비자금으로 호레호식을 누리며 가족간 상호간에 왕래도 없고 웃음도 없고 부귀영화에만 취해 사는 겉은 화려한데 안으로는 썩은 무덤과도 같은 곳에서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그 지옥같은 무덤에서 나와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광주를 찾아가 참회하는 인생을 살겠다고도 하고 아예 광주에서 정착해서 살겠다고 하고 스스로의 저지른 죄에 대해서 합당한 처벌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왜 이 사람이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젊은이는 스스로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지불하면서 스스로 자신과 화해하고 역사와 화해하고 고통의 당사자들과 화해하면서 스스로 그 지옥같은 무덤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시민의 한사람으로 정말 그가 하는 행위가 단순한 쇼가 아니라 진심이길 바라고 그가 할아버지의 죄가 아니라 역사와 자신의 삶앞에서 스스로 자신과 화해하면서 치유하는 삶을 걸어갔으면 좋겠고 그런 의미에서 그 길을 응원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누구든 참회하고 돌이키며 역사와 민족앞에 반복되지 않는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의 길을 응원해야죠.
사회적 참사나 권력의 학살이나 늘 피해자는 평범한 소시민들입니다. 광주가 그랬고 세월호가 그랬고 1029가 그랬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어머니 아버님들 형제 자매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의 피해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추모하고 추모관을 만들고 교육을 하면서 기억해야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겁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일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 안전 시스템이 망가져, 혹은 국가폭력, 무능에 의해 참사를 당한 사람들이 특별히 무슨 죄를 지었거나 무슨 큰 잘못을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도 그렇고 씨랜드 화재도 그렇고 그저 평범한 일상, 아무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공간에서 지하철을 타다가 축제에 놀러갔다가 수학여행을 가다가 술을 먹다가 그냥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이런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하는 이유입니다.
더더욱 세월호 참사는 아직까지도 그 침몰의 원인 조차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2차 사회적 참사 특조위의 결론은 적어도 내인설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럼 외인설이냐 그건 모른다는 겁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결론입니다. 실제 당시 배안의 cctv를 보면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배안의 차나 물건들이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소리 전에는 전혀 미동도 없습니다. 적어도 내인설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짐을 너무 많이 싣어서 안에 뭔가(솔밸브)가 고장나서 배가 한쪽으로 쏠리고 그래서 침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아무런 미동도 없던 배가 갑자기 충돌소리와 함께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뭔가의 굉장한 충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뭔가의 충격에 의한 침몰이라는 거죠. 그러나 그런 주장에 대한 수사에 어느 누구도 협조하지 않고 무슨 빨갱이 취급을 하더라는 겁니다. 많은 사회적 참사가 있지만 세월호 참사가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는 건 단지 국가의 무능으로만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사건의 진실은 베일속에 가려져 있고 결국 세월호 참사로 인하여 탄생한 권력조차도 결국은 그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죽은 것보다 더 기가막힌 건 그 죽은 원인을 모르는 것입니다. 진실을 알 수 없으니 정의를 세울수가 없습니다. 책임을 묻고 이 사회가 댓가를 지불하면서 참사 반복을 위해 사회책 책임을 완수해야하는데 사람이 304분이나 돌아가셨는데도 아직까지도 그 참사의 원인을 모르는 겁니다. 교통사고가 나도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명백하게 책임의 소재 묻고 책임지게 합니다.
오늘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욥은 당대 가장 잘나가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의로웠고 진실했습니다. 가족들이 모이면 혹시라도 모르는 사이에 지은 죄라도 있을까 싶어 식구 수대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던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아침에 여러 가지 이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재산도 잃고 사랑하는 자식도 잃고 그는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실의와 좌절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세 친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이 다 가슴에 못을 박는 이야기들입니다. “죄없는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을 본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이유없이 고난을 주지 않는다 하면서 .......”그러면서 고난을 당한 친구의 가슴에 두 번 세 번씩 못을 박아댑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장시간에 걸쳐서 이런 대화가 있은 다음에 주께서 욥의 세 친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 중 엘리바스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누구에게 제사를 드려요? 하나님께요?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가서 제사를 드리라는 겁니다. 잘못을 한 사람에게 가서 책임을 지라는 겁니다.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으면 그 당사자에게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사회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용서하면 당신께서 용서하시겠다는 겁니다. 사고가 일어났을때 당사자간에 합의가 매우 중요한 이유입니다. 보상이 어떤 형식으로 치러지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사자간에 충분한 합의가 중요합니다. 만족할 만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실수로 모르고 교회 텃밭 쓰면서 처음에 파이프를 썼는데 이전 텃밭 임차인 건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 쓰라고 해서 썼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그 임차인이 재임대를 해주신 거예요. 그분 거였더라구요. 그래서 낮선 사람이 왔기를 왜 남의 밭에 와서 행패냐 다 허락받고 쓰는 거다 하니까 그대로 고소를 했잖아요. 결국 파이프를 사주고 해결됬어요. 구약의 배상법도 보면 다 그래요. 소를 죽였을 때 실수를 죽였을 때 고의로 죽였을 때 주인이 잘못관리해서 소가 남의 밭을 망가뜨렸을 때 상황과 형편에 따라 보상법이 다 다릅니다. 관계안에서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다해야 그 공동체안에 치유와 회복이 이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톨게이트에서 사고날 뻔했지요. 사고가 안났으니 사과로 끝났지 사고가 났으면 책임선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 사과가 뭐라고 인정하고 사과를 하니까 사실 분노가 없어요.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참사는 다릅니다. 사실 뭐로 보상이 되겠습니까? 생떼같은 자식들이 304명이나 돌아가셨는데 뭐로 보상이 되겠습니까?
억울하게 숨겨간 영혼들, 숨쉬는 것조차도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숨을 끊으면 이 참사의 진실을 누가 밝혀내고 그들의 영혼을 누가 위로해 줄까 싶어서 오늘도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진실을 현장으로 유가족들 앞에서 온 사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진실의 여정입니다. 지금 안되면 다음 정권에서라도 지금 세대에 안되면 다음세대라도 허망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진실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사회 온구성원들이 저마다의 현장에서 더 이상 이런 말도 안되는 참사가 반복되게 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해 내는 일입니다. 보다 더 민주화된 삶을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은 광주의 영령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길입니다. 보다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해 제도를 바꾸고 시스템을 바꾸고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무능한 국가 권력을 바꾸는 일들은 때로는 무능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국가 시스템에서 희생된 참사의 희생자들을 영혼을 위로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속에서 자본에 노예화되지 않으면서 생명중심의 삶을 살피면서 이런 삶에 책임감을 가지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모든 일들은 자본에 노예가 된 세상에서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는 길입니다.
다양한 국가적 참사와 사회적 참사로 희생된 영혼들이 죽음으로써 이 사회에 던진 화두를 기억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책임감있게 이 일에 연대해 나아가는 것이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이루고 더 안전한 그래서 모두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모든 억울한 죽음을 가장 아름다운 죽음으로 승화시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욥기의 지헤를 봅니다. 너희가 책임을 다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