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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石村洞 古墳群
*서울 石村洞 古墳群 -사적 제243호(1975.05.27)-
서울 松坡區 石村洞 漢江邊 沖積地에 있는 漢城百濟時代의 왕실무덤인 서울 石村洞 古墳群은
1975년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沖: 화할 충 *墳: 무덤 분)
百濟前期의 다양한 墓制 가운데 하나인 積石塚[돌무지무덤]은 高句麗의 돌무지무덤에 起源을
두고 있다. 3세기 중엽 경부터 漢城百濟時代(BC 18~AD 475)의 최고지배세력에 의해 數十 基가
築造되었으나 현재는 4基가 남아있으며 이와 함께 土壙墓[널무덤], 甕棺墓[독무덤] 등 30餘基가
확인되었다. (*塚: 무덤 총 *壙: 뫼 구덩이 광 *甕: 독 옹 *棺: 널 관)
이들 古墳은 대체로 3세기 中·後半 경부터 5세기 末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築造되었으며, 특히 AD 300~400년의 약 100년 동안은 百濟支配勢力에 의해 積石塚 爲主의
古墳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熊津(公州)으로 遷都(AD 475)하기까지의 百濟支配勢力의
무덤은 積石塚[돌무지무덤]에서 石室墳[돌방무덤]으로 바뀐다. (*遷: 옮길 천)
1911년에 처음 調査하여 百濟時代 遺蹟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推定하고, 1916년 조사에서는
‘積石塚[돌무지무덤]’과 ‘土塚[흙무덤]’으로 구분되었으며, 같은 해에 刊行된 <朝鮮古蹟圖譜>
제3권의 [石村附近 百濟古墳群 分布圖]에 ‘甲塚[흙무덤]’ 23基와 ‘乙塚[돌무지무덤]’ 66基가
收錄되어 있어, 石村洞 일대에는 1916년 이전까지 최소 89基의 古墳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年代 蠶室地區 開發로 많은 遺蹟이 滅失되고, 1974년 石村洞 3號墳과 4號墳이 발굴되었으며,
1976년까지 3차에 걸쳐 蠶室地區 古墳들이 발굴되었다. (*蠶: 누에 잠)
1983년부터 百濟古墳路 공사로 石村洞 3호분과 그 일대를 조사했으며, 1987년 인근의 民家들이
철거되면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百濟古墳公園이 조성되었다.
高句麗의 영향인 積石塚[돌무지무덤]이 石村洞에 散在한다는 것은 百濟의 建國勢力이
문화적으로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古墳群 지역에는 3, 4호분과
같은 大形墳 이외에도 小形의 土壙墓[널무덤]와 같은 一般官吏나 平民의 것도 섞여 있다.
그리고 서로 時期를 달리하면서 重複되게 형성된 것도 있어 石村洞 일대는 오랫동안 다양한
階級들이 墓地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근처에 있는 서울 芳荑洞 古墳群(사적 제270호)과 서울 可樂洞 遺蹟 등의 무덤이 이러한 증거가
되며 石村洞 일대에는 널무덤[木棺墓]·독무덤[甕棺墓] 등의 小形古墳이 계속 築造된 것으로
보인다. (*荑: 벨 이)
*서울 可樂洞 遺蹟은 宅地開發로 家屋들이 들어서 흔적도 없이 이름만 남아있다.
서울 石村洞 古墳群으로 가는 길은 전철 5·9호선 석촌역 ⑥ ⑦번 출구에서 百濟古墳路를 따라
조금 가면 百濟古墳公園 출입구에 도착한다.
서울 石村洞 古墳群 사진을 올린다.
2019.11.10 孤 山 朴 春 慶
서울 石村洞 古墳群
(01)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 標石
처음에는 [石村洞 百濟初期 積石塚]이라고 했으나 2011.07.28 [서울 石村洞 古墳群]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02) [서울 石村洞 古墳群] -사적 제243호- 案內板
(03) [서울 石村洞 古墳群] 위치도
① 제1호분 ② 제2호분 ③ 제3호분 ④ 제4호분 ⑤ 제5호분 ⑥ 제2호 움무덤
⑦ 제3호 움무덤 ⑧ 內圓外方形 돌무지무덤
현재위치는 맨 오른쪽 제3호분이 있는 正門지역인데 위치도가 멀고 희미해
[제2호 움무덤] 앞에 있는 위치도를 올렸다.
(04) 石村洞 第3號墳
第3號墳은 전형적인 高句麗式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東西 50.8m, 南北 48.4m로
추정되는 四角形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며, 石村洞 古墳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山에서 가져온 큰 돌을 깨서 3단 이상을 쌓았는데, 무덤 위에 1980년대 중반까지 여러 채의
民家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으나 최소 4.5m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땅을 잘 고른 후 40~50cm 두께로 진흙을 깔고 다지고, 그 위에 자갈돌과
지댓돌[址臺石]을 차례로 깔고, 그 다음 대체로 40cm가 넘는 깬돌과 작은 판자돌을 가로로
눕혀 層層이 쌓아 올렸다. 1983년의 試掘調査에서는 3단 외곽에서 副葬槨으로 추정되는
돌덧널[石槨]이 조사되었으나 무덤은 이미 盜掘되고 毁損되어 주검이 묻힌 곳은 찾지
못하였으나 무덤 주위에서 4세기 중국 東晉時代의 陶瓷器 조각, 金製瓔珞과 玉硏磨石,
百濟土器조각 등을 收拾하였다.
제3호분은 4~5세기의 百濟王陵으로 보이며, 學界에서는 百濟 제13代
近肖古王(재위; AD 346~375)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掘: 팔 굴 *槨: 외관 곽 *瓔: 옥돌 영 *珞: 구슬목걸이 락)
*近肖古王 -百濟 제13代王(재위; AD 346~375)
近肖古王은 百濟 제11대 比流王의 次男으로 比流王 死後 제10대 汾西王의 長男이 卽位한
契王이 즉위 2년 만에 他界하여 近肖古王이 왕위에 올랐다. 眞氏 家門에서 王妃를 맞아들여
王室을 支持하는 背景勢力으로 삼았으며, 地方統治組織을 만들고 地方官을 파견하는
檐魯制를 실시하여 中央執權을 확고하게 했다. (*汾: 클 분 *檐: 질 담)
한편, 王權確立을 바탕으로 四方으로 征服活動을 활발히 전개하여 남쪽은 榮山江 流域을
중심으로 馬韓의 잔여세력을 服屬시켜 全羅道 全域을 支配領域으로 확보하고, 洛東江
서쪽의 伽倻勢力에도 손을 뻗쳐 附庸시켜 백제의 影響圈에 넣었다.
南方地域 平定 後에는 北方으로 진출을 도모하면서 당시 南進政策을 추구하던 高句麗와
대립이 不可避하여 近肖古王 24년(369)에 비롯된 雉壤城(현재 黃海道 白川) 戰鬪에서
승리했으며, 近肖古王 26년(371) 고구려가 다시 침공해오자 浿河(*大同江의 옛이름) 인근에
埋伏·奇襲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그 해 겨울 近肖古王은 太子와 함께 3만 兵力으로
平壤城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故國原王이 戰死했다. (*浿: 강 이름 패)
그 뒤 近肖古王은 都邑을 漢山으로 옮겼으며, 近肖古王 때에 백제는 오늘날의 京畿·忠淸·
全羅道 全部와 江原道·黃海道의 일부를 차지여 百濟는 史上最大의 領域을 차지하는 강력한
古代國家로 성장했다.
*附庸: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의탁해서 지내는 일.
(05) 石村洞 第3號墳 東西 邊, 基壇部 길이 50.8m
(06) 石村洞 第3號墳 南北 邊, 基壇部 길이 48.4m
(07) 石村洞 第3號墳 모퉁이
(08) 소나무가 第3號墳(近肖古王陵)을 향해 절하고 있네!
(09) 古墳群에는 都心인데도 잘 자란 소나무가 우거졌다.
(10) 石村洞 第3號墳과 第4號墳 사이의 소나무
(11) 石村洞 第4號墳
제4호분은 맨 아랫단 길이 17m 가량인 四角形이며, 3段의 階段式 돌무지무덤[積石塚]이다.
겉모습은 완전히 돌무지무덤[積石塚]이나 內部는 흙으로 채워져 있어 전통적인
널무덤[積石塚]과 板築技法을 加味하여 순수 高句麗樣式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百濟式 돌무지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4년 發掘調査에서 맨 위층 제3단에 동서 4.6m, 남북 4.8m의 정사각형 돌방[石室]과
너비 2m가량의 널길[羨道]을 윤곽만 상징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1984년
整備·復元을 위한 재조사에서 원래 진흙을 다져 쌓은 흙무지무덤[土塚]이던 것을 겉모습만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바꾼 것으로 확인되었다. (*羨: 무덤길 연)
屍身을 묻은 흔적은 흙을 다져 쌓은 지점 3군데에서 각각 따로 확인되었다. 무덤 안에서
특별한 遺物이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돌무지 속에서 벽돌, 土器, 기와 등의 조각이 발견되었다.
돌을 쌓은 방식으로 보아 돌방무덤[石室墳)을 만들려고 한 것으로 4~5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2) 石村洞 第4號墳, 모퉁이에서 본 모습
(13) 제2호 움무덤[第2號 土壙墓]
제2호 움무덤[土壙墓]은 원래 이곳에서 북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서 조사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 再現한 것이다. 땅을 파 움을 만들고 그 안에 널을 넣어 묻은 움무덤은
人類歷史의 가장 보편적인 무덤이다. 石村洞 古墳群에도 돌무지무덤보다 먼저 만든 것으로
보이는 多樣한 集團 움무덤과 대형 움무덤 등이 있다.
이 움무덤은 東南東-西北西 방향으로 긴 直四角形이다. 아무 시설도 하지 않은
무덤 안 동쪽바닥에 회백색의 짧은목 단지 1개가 있었으며, 움 안에서는 지름 1.6cm의
민고리 금귀고리 1점이 출토되었다.
(14) 멋 부린 느티나무
(15) 관리사무소가 있는 출입구에서 본 石村洞古墳群
(16) 石村洞古墳群 發掘調査 現場
(17) 百濟王陵을 품은 ‘돌마리’ 石村洞, 古墳群 發掘調査 沿革
=百濟王陵을 품은 ‘돌마리’ 石村洞
石村洞의 옛이름은 ‘돌마리’였는데 돌들이 여기저기 산처럼 쌓여있어 ‘五峯山’이라고 불렀다.
이 돌무더기들은 百濟王陵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 243호 서울 石村洞
古墳群]으로 지정되었다. 1911년 石村里 一帶의 ‘地表調査 記錄’을 보면 石村洞과
可樂洞 일대에 百濟무덤들이 293基以上이 있었다. 그러나 1970年代 ‘蠶室地區
종합개발계획’에 의한 급격한 都市開發로 百濟의 무덤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石村洞 古墳群 發掘調査 沿革
(18) 石村洞 古墳群의 發掘 이야기
(19) 石村洞 古墳群 3號墳·4號墳의 發掘調査 全景과 整備 後 全景
(20) 百濟의 첫首都 ‘漢城’
=百濟의 첫首都 ‘漢城’
BC 18년 溫祚가 漢江流域에 百濟를 建國하고 오늘날 松坡區 일대에 첫 首都 ‘漢城’을 건설했다.
AD 475년 熊津(현재 公州)으로 遷都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493년동안 21명의 王이 卽位했다.
漢城에는 ‘北城’과 ‘南城’이 있었는데 北城은 평지에 흙을 쌓은 ‘風納土城’,
南城은 南漢山 줄기 끝자락을 다듬어 흙으로 쌓은 夢村土城이다.
이곳 石村洞·可樂洞과 芳荑洞 일대에는 百濟王室과 貴族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百濟漢城 都城 風景圖
(21) 石村洞 古墳 發掘現場
(22) 石村洞 古墳公園에서 멋지게 자라는 나무들
(23) 內圓 外方形 돌무지무덤[積石塚]
‘A號 積石塚’ 또는 ‘外圓 內方形 積石塚’이라고도 한다. 안쪽에 지름 11.4m의 흙무지 封墳이
있고, 겉모습은 한 변의 길이 16m인 正四角形의 계단식 돌무지무덤[積石塚]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新羅무덤에서 볼 수 있는 둘레돌인 護石처럼, 안쪽에 둥근 圓모양으로 列을 지은
깬돌[割石]이 봉분자락에 놓여있었다. 그 바깥의 자갈돌과 네모모양으로 列을 지어
가지런히 놓인 테두리의 깬돌은 주변의 1·2·3·4號墳처럼 계단식 돌무지무덤처럼 보인다.
1987년 發掘調査에서 돌널무덤[石棺墓] 3基와 돌무지 움무덤[積石土壙墓] 2基의 뚜렷한
윤곽이 안쪽 바닥 면에서 발견되었으나, 돌무지무덤이 파괴된 뒤 나중에 만든 무덤일 수 있어
內圓 外方形 돌무지무덤의 關聯性은 분명치 않다. 무덤 안과 밖에서 각종 土器조각과 손칼,
쇠못, 꺽쇠 등의 鐵器가 많이 출토되었으나 모두 攪亂層이어서 이 무덤과 관련된 遺物인지는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24) 內圓 外方形 돌무지무덤[積石塚] 앞의 遺構
(25) 石村洞 第1號墳
제1號墳은 일찍이 家屋을 建築하느라고 毁損되어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 어렵다.
發掘調査를 통해 남쪽 무덤 내부의 맨 아래 基壇部가 확인되었는데 무덤 2基가 南北으로
이어진 雙墳이었다. 북쪽무덤은 3세기 中葉에, 남쪽무덤은 3세기 말~4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쪽 무덤의 基壇部는 크기가 비슷하며, 무덤 사이의 공간은 진흙으로 메우고
서쪽으로 길게 돌을 덧쌓아 두 무덤을 연결했다. 크기 20~30cm의 깬돌로 네 벽을 쌓았으며,
바닥에는 10cm 안팎의 돌조각과 자갈 등을 깐 돌덧널[石槨] 4기가 있었다.
가장 큰 돌덧널을 한 가운데에 東西방향으로 길게 놓고, 작은 돌덧널 3개를 북쪽 벽에 잇대어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놓았다. 무덤 내부의 주변에서는 百濟 土器와 기와, 금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毁: 헐 훼)
(26) 第1號墳 주변 學術發掘調査
서울 石村洞 古墳群은 百濟 漢城都城에 남아있는 唯一한 王室墓域이다.
그러나 과거에 京畿道 廣州地域의 일부가 서울로 編入되어 급격하게 開發·都市化되면서
당시 廣州郡 中垈面 石村里, 芳荑里, 可樂里 일대에 있던 百濟의 王室墓域은 충분한 記錄도
없이 滅失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石村洞 古墳群 주변 땅속에는 명확하게 糾明되지 못한 百濟 漢城都城의 王室 무덤 및
關聯 遺蹟이 묻혀있다.
漢城百濟博物館은 서울 石村洞 古墳群을 정밀하게 發掘·調査하여 二千年前 이 땅에 都邑을
정하고 建國한 百濟의 漢城百濟期의 위대한 歷史性을 서울시민과 함께 하고자 한다.
*松坡區 石村洞은 朝鮮時代에는 廣州郡 中垈面 石村里였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城東區에 편입되어 松坡出張所 관할이 되었다가, 1975년 城東區에서
분리되어 江南區가 신설되면서 강남구에 속하였다. 1979년 江南區에서 분리된 江東區에
속했다가 1988년 松坡區가 분리, 신설되면서 송파구 管轄이 되었다.
=새로 확인된 積石塚과 제1號墳
(27) 石村洞 第1號墳 주변의 遺構
(28) 石村洞 第5號墳
第5號墳은 지름 17m, 높이 3m의 圓形 封土墳이다. 石村洞 古墳群에서 형태가 가장 잘
保存되어 있는 封土墳으로, 整備·復元할 때 內部調査는 하지 않고 封墳의 흙을 쌓은 방식만
확인했다. 봉분은 흙을 다져 봉긋하게 쌓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로 한 겹 덮은 다음, 다시
흙을 얇게 덮은 特異한 형식의 무덤으로, 이를 ‘葺石封土墳’이라고 한다. (*葺: 기울 즙)
漢江流域의 대표적인 事例는 제5호분의 동북쪽 數十 미터 지점에 있는 可樂洞 제1·2號墳이다.
1969년에 두 무덤을 발굴·조사한 결과, 하나의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나무널[木棺]과
독널[甕棺]을 각각 묻은 흙무지무덤[土塚]으로 밝혀졌으며, 石村洞 第5號墳도 같은 구조로
추정된다. 즙석봉토분의 系統에 대해서는 土着民의 무덤 樣式에 ‘葺石’이라는 高句麗的
要素가 加味된 것으로 보는 見解와 봉분을 만들고 地上에 주검 安置空間을 둔 馬韓의
文化傳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즙석(葺石): 封土의 위쪽에 한두 겹만으로 얇게 펴서 깐 돌
(29) 제3호 움무덤[土壙墓]
제3호 움무덤은 길이 208cm, 너비 58cm, 깊이 26cm의 네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直四角形으로, 長軸 方向은 東北-西南이다. 제2호 움무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바닥시설은
없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 灰靑色 짧은목 단지가 놓여있었다.
원래 있었던 움무덤을 防水保護施設로 덮고, 바로 그 위 50cm 지점에 模型으로 再現해
놓았다.
(30) 石村洞 古墳 發掘現場
(31) 石村洞 古墳 發掘現場
(32) 保護樹; 회화나무 -고유번호; 서 24-7(1989.10.24)
-수령; 235년 -나무높이; 12.0m -가슴높이 나무둘레; 230cm
(33) 石村洞 第2號墳
제2호분은 前에 돌 덮인 봉우리 모습으로 民家와 돌담이 서있는 주변에 돌이 덮인 봉우리
모습이던 것을 1985년 石村洞 古墳群 정비계획에 따라 復元했다.
겉모습은 돌무지무덤[積石塚]이며, 내부는 흙으로 채운 百濟式 돌무지무덤이다.
원래 흙무지무덤[土塚]이던 것을 나중에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겉모습을 바꾼 제4호분과
달리 처음부터 내부를 흙으로 채우고 겉에만 돌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1987년 발굴조사
당시에 돌무지는 基壇部의 1m 정도, 내부의 흙무지는 높이 3.8m정도가 남아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3단의 계단식 돌무지[積石]으로 復元했다. 서북쪽 모서리 지점에서 나무널
1基가 발견되었는데, 움을 파지 않고 널을 놓은 뒤 작은 封墳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흙무지 널무덤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확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널무덤과 서남쪽
封墳 안에서는 3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굽다리 접시와 곧은입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34) 石村洞 第2號墳 모퉁이
(35) 石村洞 古墳 發掘現場
(36) 百濟 王陵의 復元을 꿈꾸며
(37) 石村洞 古墳 發掘 모습
(38) 漢城百濟博物館, 새로운 무덤을 발견하다.
(39) 2015년 최초 발굴·조사 당시 모습 → 2018년 새로 발굴·조사된 百濟王室墓域
(40) 石村洞 古墳群에는 대형 움무덤[土壙墓](왼쪽), 돌 덮은 흙무지무덤(오른쪽 위),
독무덤[甕棺墓]이 있다.
(41) 石村洞 古墳群에서 발견된 遺物들
石製品(왼쪽부터) - 금귀걸이 및 金裝飾具 – 수막새[圓瓦] - 中國靑瓷
(42) 石村洞 古墳群의 발굴이야기
(43) 제3·4호분 발굴조사 全景 → 整備 後 全景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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