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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난
벤 스테파노스의 영의 누이이자 정겨운 벗, 성녀 미르얌은 어느 날 가까운 자매들에게 정다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들도 은혜로만
만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위에 계신 어머니께서 진리의 경륜이 없으신가요?”
자비로우려면
충분히 그러하여야 하고, 신비로이 청허淸虛하려면 또한 충분히 그러하여야 합니다. 이방 성자들의 세계와 아브라함권 대언자들의 세계와 초대교회
사도들의 세계를 나비와 독수리처럼 날고 활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성령과
여성 / [Audio]
“요하난 벤 스테파노스의 영의 누이이자 정겨운 벗 성녀 미르얌은…”, 예수님에 대하여 남성들이 ‘선생님’으로, ‘벗’으로, ‘연인’으로, ‘신랑’으로, 기독교회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말씀은 지난 시간에 드렸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요하난 벤 스테파노스의 영의 누이’, 지금부터 2000년 전이니까 나이로 보면 엄청 누님이시지만, 영계에서 보면 두어 살 많은 벗으로, 연인으로 보일 수 있는 연배라는 것입니다.
“성녀 미르얌은 어느 날 가까운 자매들에게 정다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들도 은혜로만 만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 성령강림 기사가 등장하는데, 1:12-14를 보시면, 예수님 승천 이후에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에 전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다 그 자리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일은 제자들이 ‘나에게도 성령께서 내려오셨구나!’하는 체험을 집단적으로 강하게 경험했던 최초의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 “이들은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미르얌과 예수님 동생들과 함께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성령강림의 역사 가운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여인들이 그 중심부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마리아 누이가 오늘의 이러한 말씀을 초대교회의 자매들에게도 전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강림을 통하여 체험되는, 신유와 능력과 환상과 마음이 따뜻해지고 포근해지는 “그러한 은혜로만 만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위에 계신 어머니께서, 성령님께서 진리의 경륜이 없으십니까?”라고 말씀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성령은 진리의 영
요한복음 14:16-17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아버지께 청할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돌보시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진리의 영이신데, 세상은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신데, 이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하늘 어머니를 닮은 여성 지도자들로 성장해 가는데, 은혜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진리의 능력과 실력과 경륜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막달라 마리아가 자매 제자들에게 하셨다면, 초대교회 시대의 어느 시점이겠지요? 그러다 마리아 누이도 하늘로 가시고, 이 자매들도 다 죽었겠지요. 그러고 나서 기독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것을 체크하셔야 합니다. 마리아 누이가 “우리 자매들에게도 말씀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당부를 했다면, 그것은 그녀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역사 속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 역사가 예수님 가신 이후 100년 안에 남성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돌아가신 다음부터 이미 베드로, 야고보, 바울, 이런 분들이 교회를 치리하지 않았습니까? 그 시대가 워낙에 남성중심시대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표면으로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동안 여성들은 수녀원에, 교회 안에, 가정 안에 묻혀 있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2000년 전에 마리아 누이라면 반드시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도 눈에 보이는 현실적 문제였을 테니까요.
교회와 여성리더십
그럼 이제 이것을 우리의 시대로 돌려서 읽어 봅시다. 이 시간에 마리아 누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면, “섭리의 자매들도 은혜로만 만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위에 계신 어머니께서 진리의 경륜이 없으신가요?”라는 메시지를 다시 살포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앞으로의 천년을 내다보셔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상에 계시는 때까지는 자매 지도자들을 많이 세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설교 단상에 여성 지도자들을 이 정도의 비율로 세웠던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원불교가 기독교 이상으로 여성 지도자들을 교역자 자리에 세웁니다. 그들의 목회자를 ‘교무’라고 부르는데, 대다수가 ‘여성 교무’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불교마저도 창시자의 계승자, 즉 법통을 이어가는 카돌릭의 교황에 해당하는 종법사들은 여전히 남성입니다. 물론 그 종단의 최고위원회격인 ‘수위단회’라는 기구에 여성 지도자들도 참여하기는 하는데, 비교적 남성 중심입니다. 그에 비하여 엄청난 세계로 진일보한 역사가 우리 섭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계시는 동안은 보호해 주시고 세워 주시고, 부족해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때가 되어 하늘로 가신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교역자 회의’, ‘장로단 회의’ 등과 같은 협의체로 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20-30년 후, 섭리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은 어느 조직이 되겠습니까? 인원 비율도 높고 재정을 확보하고 있는 ‘가정국’이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중고등부는 아직 어리고, 대학부나 청년부는 나이가 차면 자동적으로 상위부서로 올라가야 하니까 가정국에 비하여 조직이 안정되거나 단단하지 못하고 재정도 약합니다. 이처럼 가정국이 가장 비중이 큰 부서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국은 자기들의 가정생활과 육아의 고민과 사회생활의 고민과 인생에 대한 고민과 안타까움을 들어 줄 수 있는 목회자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대화도 잘 통하고 언제나 찾아가서 만나 상담할 수 있는, 결혼을 한, 자녀를 길러본, 가정생활을 해 본, 그래서 고통과 고충을 공유할 수 있는,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경륜이 있는, 나이가 지긋한, 그러한 지도자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스물네 살에 충남 천원군 광덕면에 목회하러 내려갔을 때, 1년 만에 장년부 어르신들이 선생님께 요청했습니다. 교역자가 어리니까,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물론 열심히 했지요. 강의는 나름대로 잘했고, 설교도 선생님 말씀을 대신 전해 주는 것이니까 생동감 있게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생상담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24세의 저와 50대의 남성 장년부들…. 여성 집사님들은 나름대로 아들처럼 오손도손 잘 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남성 집사님들의 교회에 대한, 인생에 대한 고민을 제가 말씀으로 상담해 준다고 했지만, 설사 그것이 답이라 하여도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이가 어리니까, 뭘 잘 모르는구나!’ 하면서, 반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선생님께 “선생님, 다음 교역자는 나이가 좀 많은 분을 보내 주세요”하는 요청을 드렸다고 합니다. ‘아하, 내가 어려서 이분들을 충분히 품지 못하는구나….’ 새파란 스물네 살짜리가 품지 못하지요. 이처럼, 섭리 여성지도자들도 지금 상태라면, 그러한 상황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앞으로 여성지도자들은 청년부, 대학부, 중고등부, 유초등부 쪽으로 점차 역할이 축소될 것입니다. 그것도 여성들을 대상으로….
그래서, 하늘에 있는 마리아 누이가 섭리의 자매 지도자들과 대화가 된다면, 앞으로의 천년을 내다보면서 이러한 말씀을 또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그녀가 고민했던 미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오늘날에도 역사적으로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일들이니까요. “자매들도 은혜로만 만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의 은혜와 사랑에만 젖어 있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문화적 충격에 휩싸이게 되실 것입니다. 대비하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위에 계신 어머니께서 여러분처럼 진리의 경륜이 적으십니까?”라고 선배 입장에서, 언니 입장에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진리의 경륜’, ‘경륜’이라는 것은 ‘큰 포부를 가지고 어떠한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한다, 설계한다’하는 의미입니다. ‘제갈공명처럼 천하의 세계를 경영한다’, ‘요셉처럼 역사를 경영해 나간다’하는 것이지요. 교회에서 남성들에게 다시 묻힐 수 있습니다. 남성들이 고민이 있을 때, “아무개 목사님과 한번 상담해 보지 그러나?” 하면, “아, 그분은 좀 답답해. 얘기가 잘 안 돼”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훌륭하게 잘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요.
위기의 시대, 리더십 교체
본래 인류의 고대 시대에는 ‘모계사회’였다고 하지요? 남자들이 사냥으로 며칠씩 나가 있으면, 동굴 안에서 어머니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했던 모계사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라 시대에 ‘화랑花郞’이라는 멋있는 조직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초기 지도자들은 본래 ‘원화源花’라는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유신이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천관녀天官女’도 본래 신라의 국가무녀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유신의 어머니가 “신라가 이제 불교 시대로 접어들어 가고 있기 때문에, 패망한 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유신이 고대 시대의 전통인 천관녀와 긴밀하게 접촉하면 미래가 암울해진다. 신라의 새로운 흐름에 맞추어 가야 한다”라고 하면서, 천관녀를 잘라내게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던 김유신이 그녀와 헤어지면서 말의 목을 자를 정도로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신라 초기는 화랑의 원화와 더불어 이러한 무녀들, 곧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크게 기여하던 시대였는데,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 천관녀의 리더십과 권위가, 종교적인 영역은 남성인 ‘스님’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천기를 분별하는, 하늘의 길흉화복 징조를 가리는 그녀들 나름의 능력이 있었겠지요? 그러한 역할은 ‘일관日官’이라는 남성 천문학자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역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초기에 여성들의 활발한 역할과 강력한 지원에 의하여 형성되었던 공동체들의 역사가 가다 보니 점차 남성 중심으로 바뀌더라. 그러한 리더십 교체의 전환기에는 국가적, 공동체적 위기라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역할이 나름대로 살아 있던 초대교회 시대가 지나고, 치열한 박해를 가하던 로마제국이 이제 기독교국가가 되었을 때, 이미 그 시대의 기독교회는 남자들의 교회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사건부터가 벌써 기독교의 위기였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세력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남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아무래도 여성보다는 남자들이 외부에 저항하며 싸울 수 있잖아요? 그러한 위기의 시대를 지나다 보면, 자연히 남성중심 체제가 형성됩니다. 동서를 막론하여 고대 씨족사회에서 부족국가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강력한 부족의 군단장이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면서 왕으로 등극했잖아요? 이러한 위기상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
“자매들도 은혜로만 만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위에 계신 어머니께서 그렇게 약하신가? 성령님께서는 부드러우신데 강하십니다. 그 강함을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가까이 닮아 내신 분들이 어머니들입니다. 그리고 현숙한 할머님들이십니다. 그 강한 할머니와 어머니와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 역사는 지금까지 종말에 이르지 않고 존속해 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지금 섭리의 자매들이 ‘신부’의 단계에서 ‘엄마’의 단계까지는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엄마 또래 되신 분들이 계시니까요. ‘엄마’가 경륜이 더 깊어지면 ‘어머니’ 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백발이 성성해지고 지혜가 더 섬세해지면, 700℃로 구워진 도자기가 세월 속에 1200℃로 한 번 더 구워질 때, 진리와 더불어 현숙한 원로 여성지도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만큼 공부도 하시고, 사회에 대한 이해와 가정생활을 하시는 분들에 대한 통찰과 깊은 심정적 일체감, 그들의 고충과 애환을 깊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체휼해 줄 수 있는 상담의 능력이 깊어져야 합니다. 책임이 막중해지는 가정국을 품고, 그들마저도 지혜와 말씀과 은혜로 이끌어 가시려면, 자비로워지셔야 하고 상담의 능력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어머니들의 길이었고, 할머니들의 길이었고, 엄마의 길이었습니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엄마가 있다!” 하면서, “엄마, 나 왔어~! 밥 줘~!” 하면서 달려오는 초등학생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엄마의 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확장하면 ‘어머니의 품’이 되고 ‘할머니의 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에서 하늘의 경지로 올라가면 ‘성령님의 품’이 되는 것이지요. 그 세계로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셔야 합니다.
“자비로우려면 충분히 그러하여야 하고, 신비로이 청허淸虛하려면…”, 여기서 ‘청허하다’하는 것은 ‘맑고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비로우려면 충분히 그러하여야 하고, 신비로이 청허하려면, 또한 충분히 그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 품에 기대어 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방 성자들의 세계와 아브라함권 대언자들의 세계와 초대교회 사도들의 세계를 나비와 독수리처럼 날고 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Hong,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