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년 8월 (1597년 8월)
545
8월 초1일 (기유) 큰비가 와서 물이 넘쳤다. [양력 9월 11일]
546
저녁나절에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봤다. 조신옥(趙信玉) ∙ 홍대방(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547
8월 초2일 (경술) 잠시 개었다. [양력 9월 12일]
548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549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550
8월 3일 (신해) 맑다. [양력 9월 13일]
551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경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豆恥)로 가는 길로 곧 바로 갔다.
552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했다.
553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江亭: 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554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李元春)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555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556
손인필(孫仁弼)은 바로 와서 볼겸하여 곡식까지 가져 왔다. 손응남(孫應男)은 올감(早柿)을 바쳤다.
557
8월 4일 (임술) 맑다. [양력 9월 14일]
558
□□을 보내 왔다. 다시 들어와 관청을 보았다.
559
아침밥을 먹은 뒤에 압록강원(곡성군 오곡면 압록리)에 이르러 점심밥을 짓고 말의 병을 고쳤다. 고산현감 최진강(崔鎭剛)이 군인을 교체 할 일로 와서 수군의 일을 많이 말했다.
560
낮에 곡성(곡성군 곡성읍 읍내리 713-2번지)에 이르니, 관청(곡성현감:崔忠儉)과 여염집이 한결같이 비어 있고, 사람사는 기척이 끊어졌다. 이 일대에는 온통 비어있고 말 먹일 풀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 현청에서 잤다.
561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곧장 남원으로 갔다.
562
8월 5일 (계해) 맑다. [양력 9월 15일]
563
거느리고 온 군사를 인계할 곳이 없다고 하면서 이제 이원에 이르러 병마사가 경솔히 물러난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564
아침을 먹은 뒤에 옥과(곡성군 옥과읍) 땅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 남자와 여자가 부축하고 걸어가는 것이 차마 볼 수 없었다.
565
울면서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야 살았다'고 했다.
566
길가에 큰 홰나무 정자가 있기에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567
옥과현에 들어갈 때, 순천에서 이기남(李奇男)의 부자를 만나 함께 현에 이르니, 정사준(鄭思竣) ∙ 정사립(鄭思立)이 와서 마중 했다.
568
옥과현감(홍요좌)은 병을 핑계 삼아 나오지 않았다. 잡아다 죄주려 하니 그제야 나와서 봤다.
569
8월 6일 (갑자) 맑다. [양력 9월 16일]
570
이 날은 옥과에서 머물렀다. 초저녁에 송대립(宋大立)이 적을 정탐하고 왔다.
571
8월 7일 (을축) 맑다. [양력 9월 17일]
572
일찍 길을 떠나 곧장 순천으로 갔다. 고을에서 십리쯤 되는 길에서 선전관 원집(元潗)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573
길 옆에 앉아서 읽어보니 병마사가 거느렸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길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세 필과 활과 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574
곡성현 석곡 강정(석곡면 능파2구 능암리 3490번지 일대)에서 잤다.
575
8월 8일 (병인) [양력 9월 18일]
576
곧바로 부유창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이형립(李亨立)을 병마사에게로 보냈다.
577
새벽에 떠나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이곳은 병마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미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불을 질렀다. 다만 타다 남은 재만 있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578
광양현감 구덕령(具德齡) ∙ 나주판관 원종의(元宗義) ∙ 옥구원(홍요좌) 등이 창고바닥에 숨어 있다가 내가 왔단 말을 듣고 배경남(裵慶男)과 함께 구치(鳩峙: 순천시 주암면 행정리 접치마을)로 급히 달아났다.
579
내가 말에서 내려 곧 전령을 내렸더니, 한꺼번에 와서 절을 하였다. 나는 피해 돌아 다니는 것을 들추어서 꾸짖었더니, 다들 그 죄를 병사 이복남(李福男)에게로 돌리었다.
580
곧 길을 떠나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사람 발자취가 하나도 없어 적막했다. 오직 절에 있는 중 혜희(慧熙)가 와서 알현하므로 의병장의 사령장을 주었다.
581
저물어서 순천에 이르니 관사와 곳간의 곡식 및 군기 등 물건은 옛날과 같다.
582
병마사가 처치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총통같은 것은 옮겨 묻고,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군관들이 져 나르게 하고, 총통과 운반하기 어려운 것들은 깊이 묻고 표를 세웠다.
583
그대로 순천부사가 있는 방에서 머물러 잤다.
584
8월 9일 (정묘) 맑다. [양력 9월 19일]
585
일찍 떠나 낙안군에 이르니, 오리까지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환영하였다.
586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587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 온다고 퍼뜨리며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그 때문에 이와같이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588
고 했다. 관청에 들어가니 적막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589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 ∙ 김제군수 고봉상(高鳳翔) 등이 와서, 산골에서 내려와서, 병마사의 처사가 뒤죽박죽 이었다고 말하면서 하는 짓을 짐작했다고 하니, 패망한 것을 알만하다.
590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서 말하였다.
591
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길가에 동네 어 른들이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 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592
저녁에 보성군 조양창(조성면 조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네 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金安道)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나가 버렸다.
593
8월 10일 (무진) 맑다. [양력 9월 20일]
594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金安道)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裵興立)도 같이 머물렀다.
595
8월 11일 (기사) 맑다. [양력 9월 21일]
596
아침에 박곡(朴谷) 양상원(梁山沅)의 집으로 옮겼다. 이 집 주인도 벌써 바다로 피란갔고 곡식은 가득 쌓여 있었다.
597
저녁 나절에 송희립(宋希立) ∙ 최대성(崔大晟)이 와서 봤다.
598
8월 12일 (경오) 맑다. [양력 9월 22일]
599
아침에 장계를 초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600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 ∙ 발포만호(소계남)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601
그들 편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 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릇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602
보성군수가 왔다.
603
8월 13일 (신미) 맑다. [양력 9월 23일]
604
거제현령 안위(安衛) 및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가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605
우후 이몽구(李夢龜)가 전령을 받고 들어 왔는데,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실어 오지 않은 죄로 곤장 여든 대를 쳐서 보냈다.
606
하동현감 신진(申 )이 와서,
607
"초3일에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도 풀어 흩어지니 병마사가 바깥 진(外陣)을 제 손으로 불을 질렀다."
608
고 전하였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609
8월 14일 (임신) [양력 9월 24일]
610
아침에 각각으로 장계 일곱 통을 봉하여 윤선각(尹先覺)으로 하여금 지니고 가게 했다.
611
저녁에 어사 임몽정(任夢正)을 만나러 보성에 갔다가 열선루에서 잤다.
612
밤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렸다.
613
8월 15일 (계유)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양력 9월 25일]
614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열선루 위에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8월 7일에 만들어진 공문이었다. 영의정은 경기 지방으로 나가 순시중이라고 했다. 곧 잘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썼다.
615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말에 나누어 실었다.
616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
617
8월 16일 (갑술) 맑다. [양력 9월 26일]
618
아침에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굴암으로 보내어 도피한 관리들을 찾아 오게 했다.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돌아갔다. 그래서 나주 목사와 어사 임몽정에게 답장을 부쳤다. 박사명(朴士明)의 집에 심부름꾼을 보냈더니, 박사명의 집은 이미 비어 있었다고 한다.
619
오후에 활장이 지이(智伊)와 태귀생(太貴生) ∙ 선의(先衣) ∙ 대남(大男) 등이 들어왔다. 김희방(金希方) ∙ 김붕만(金鵬萬)이 뒤따라 왔다.
620
8월 17일 (을해) 맑다. [양력 9월 27일]
621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622
수사 배설(裵楔)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623
장흥의 군량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갈 적에 마침 그 때 이르러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624
거기서 잤다. 배설(裵楔)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625
8월 18일 (병자) 맑다. [양력 9월 28일]
626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는 보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627
8얼 19일 (정축) 맑다. [양력 9월 29일]
628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를 하는 데, 경상수사 배설(裵楔)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 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도 놀랍다.
629
이방(吏房)과 그 영리(營吏)에게 곤장쳤다. 회령포만호 민정붕(閔廷鵬)이 그 전선(戰船)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란인 위덕의(魏德毅) 등에게 준 죄로 곤장 스무 대를 쳤다.
630
8월 20일 (무인) 맑다. [양력 9월 30일]
631
앞 포구가 몹시 좁아서 진을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겼다. 창고로 내려가니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않고 앓았다.
632
8월 21일 (기묘) 맑다. [양력 10월 1일]
633
날이 채 새기 전에 도와리가 일어나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더니 한참동안 인사불성이 되었다. 하마트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을 앉아서 새웠다.
634
8월 22일 (경진) 맑다. [양력 10월 2일]
635
도와리가 점점 심하여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636
8월 23일 (신사) 맑다. [양력 10월 3일]
637
병세가 무척 심해져서 정박하여 배에서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배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서 (뭍에서) 잤다.
638
8월 24일 (임오) 맑다. [양력 10월 4일]
639
아침에 도괘땅(刀掛浦)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낮에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텅텅 비었다. 바다 위에서 잤다.
640
8월 25일 (계미) 맑다. [양력 10월 5일]
641
그대로 어란포에서 머룰렀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당포의 보자기가 놓아둔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들어 왔다. 적이 쳐들어 왔다." 고 헛소문을 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말일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642
8월 26일 (갑신) 맑다. [양력 10월 6일]
643
그대로 어란 바다에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임준영(任俊英)이 말을 타고 와서 급히 보고하는데,
644
"적선(賊船)이 이진(梨津)에 이르렀다"
645
고 했다. 전라우수사가 왔다. 배의 격군과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꼬락서니가 놀랍다.
646
8월 27일 (을유) 맑다. [양력 10월 7일]
647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648
나는 불쑥
649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게 아니오!"
650
라고 말하였다.
651
8월 28일 (병술) 맑다. [양력 10월 8일]
652
새벽 여섯시 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 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드르며 따라 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葛頭: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적선이 멀리 도망하기에 더 뒤쫓지 않았다. 뒤따르는 배는 쉰여 척이라 고 했다.
653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654
8월 29일 (정해) 맑다. [양력 10월 9일]
655
아침에 건너왔다.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대었다.
656
8월 30일 (무자) 맑다. [양력 10월 10일]
657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658
저녁나절에 배설(裵楔)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裵楔)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659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裵楔)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