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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눔 가을 문화답사
- 김봉렬 교수와 함께하는 사찰기행
17번 국도를 빠져나온 차가 한적한 시골길을 달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불명산은 울긋불긋 화려하게 성장(盛裝)을 하였다. 바알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들도 계속하여 나타나면서 그 화려함에 붉은 점을 찍는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전북 완주군 경천면의 불명산 자락에 자리한 화암사. 내가 회원으로 있는 시민단체인 ‘나눔문화’에서 가을 답사 여행으로 화암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답사도 어김없이 나눔문화의 이사장인 한국 고건축의 대가 김봉렬 교수가 이끈다.
차에서 내려 절을 찾아 오른다. 그런데 여태 많은 절을 가보았지만, 화암사로 오르는 길 같은 것은 처음 본다. 길은 다른 절의 길처럼 평탄한 것이 아니라, 좁은 계곡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더군다나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그 물가의 바위를 밟으며 오르는 길은 자칫 방심하다간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막바지에 와서는 147개의 계단이 절로 이어져 있는 것이, 이러한 계단이 없었다면 이건 두 손, 두 발 다 사용하여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할 형편이다. ‘이거~ 절이 사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오지 말라는 얘기이군.’ 저 계단도 요즘 와서 설치한 것이지 예전에는 이 옆으로 좁고 가파른 바윗길로 절로 접근해야 했단다. 나는 이왕이면 옛길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김교수가 위험하다며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옛길로 오른다.
겨우 절 앞에 이르렀으나 화암사는 여전히 대중들의 접근을 거부한다. 보통 다른 절의 보제루는 누각 밑으로 하여 계단을 통해 대웅전 앞의 절 마당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화암사는 이 누각 밑을 돌담으로 막아버렸다, 그리고 담은 그 옆으로 이어져 무슨 성곽처럼 절을 둘러싸고 있다. 통하는 길이라고는 돌담과 보제루 사이에 겨우 만든 돌계단을 통하여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나 그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바로 앞에서는 적묵당의 벽이 시선을 가로막고 있고, 우리는 그 벽을 돌아 우화루와 사이에 골목처럼 생긴 공간을 지나고서야 겨우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나마 이 문도 요새 와서 대중들이 좀 더 편안하게 들어오라고 만든 문이지, 예전에는 이 옆의 쪽문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단다. ‘햐~아~ 이런 절도 있었다니!’ 화암사는 사대부중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진리만을 찾으려는 절이었나? 이곳에선 어떤 스님들이 화두(話頭)를 붙잡고 치열한 구도의 길을 찾았을까? 안내문을 보니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도 이곳에 들어와 수도하여 절 동쪽에는 원암대(元巖臺)가, 남쪽에는 의상암(義湘巖)이 있었다고 한다. 스님들이 치열한 구도의 불빛을 밝혔기에, 산 이름도 불법(佛法)을 밝히는 산, 불명산(佛明山)인가?
그런데 김교수는 화암사가 이렇게 성채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또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즉 화암사가 있는 불명산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가르는 금남정맥의 한 식구인데, 임진왜란 때 이곳은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마지막 전선이었단다. 그렇기에 화암사는 임진왜란 후 다시 재건하면서도 군사적 용도가 컸기에 자연스럽게 성채처럼 지어진 것이라고... 그렇구나.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나? 특히 근처 금산 지역에서는 영규 대사가 이끄는 승병들이 조헌 선생이 이끄는 의병들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지 않았는가? 그 때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호남의 곡창지대는 왜놈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그러면 아무리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군이 활약을 하였어도 전황은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화암사(花巖寺) - 꽃바위절이라... 절 이름은 또 이게 뭔가? 옛날 어떤 임금님의 딸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데, 임금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꽃 하나를 던져주고는 사라졌단다. 잠에서 깨어 난 임금님은 이 꽃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하였는데, 여기 불명산에서 바위 위에 핀 복수초를 발견하였다. 꽃을 발견한 신하들은 바위 위에 꽃이 피어있는 것이 신기하여 지켜보는데, 산 밑의 연못에서 용 한 마리가 나와 꽃에 물을 주더란다. 당연히 공주는 이 꽃을 먹고 병이 나았고, 임금님은 꽃을 발견한 곳에 절을 지었으니 바로 화암사다. 그야말로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같긴 하나, 그래도 절 이름을 ‘화암사’라고까지 지을 정도이면 뭔가 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가 있을 법한데...
마당에 서서 보니 화암사의 주전(主殿)은 아미타불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보물 636호의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앙 구조가 발견된 건물이다. ‘하앙(下昻)’이란 기둥 위에 배열된 포작과 서까래 사이에 끼워진 긴 막대기 모양의 부재를 말한다고 하는데, 그 위에 서까래를 얹으면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켜 그만큼 처마를 더 길게 빼낼 수 있다고 한다. 김교수는 그 동안 이 하앙구조는 중국과 일본에서만 발견되어 일본학자들은 하앙은 한국을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곧장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하여 왔다는데,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 구조 발견으로 그런 소리가 쑥 들어갔단다.
이런 희귀한 하앙구조의 발견이기에 건조물 문화재계에서는 해방 이후 최대의 발견이란 말을 하여 왔으며, 그러다가 이런 희귀한 가치가 있는 건물을 그냥 보물로 놔두어서야 되겠냐는 여론에 올해 9. 8.에 국보로 승격까지 되었다고 한다. 극락전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40호인 구리종(銅鐘)이 하나 있는데, 이 구리종에도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무엇인고 하니 이 종이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만들었는데, 밤이면 밤마다 종이 스스로 울어 스님과 신도들을 깨웠단다. 그리고 일제 시대에는 무기로 쓸 쇠붙이를 찾느라고 혈안이 된 왜놈 헌병대가 절로 접근해오자 종이 스님들에게 경보 신호를 보내, 스님들이 이 종을 땅에 묻어 광복 후에 이 종을 다시 땅 속에서 꺼내어 햇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하고...
극락전의 맞은편은 사대부중들의 진입을 거부하며 누하(樓下) 공간을 막아버린 보물 제662호의 우화루(雨花樓)이다.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라... 이런 운치 있는 누각의 이름도 별로 들어본 것 같지 않다. 극락정토에는 꽃비가 내린다. 화암사가 극락정토의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절이기에 극락정토의 꽃비가 이 땅에도 내리기를 소망하는 우화루를 이곳에 지은 것인가?
우화루는 문을 달지 않아 극락전 앞의 마당을 자기 품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우화루 처마 밑에선 속을 비운 목어(木魚) 한 마리가 공중을 부유하고 있고, 우화루 기둥에선 오랜 세월의 검은 이끼를 몸에 덧바르며 세월의 아픔인양 자기 몸에 옹이 하나를 도려낸 커다란 목탁 하나가 흔들흔들하고 있다. 시선을 위로 하니 편액이 하나 눈에 들어오는데 어사 유치숭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편액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유치숭이 이쪽에 암행어사로 온 적이 있는 모양인데, 유치숭이 화암사에 무슨 공적을 세웠길래 여기에 이런 편액이 걸려있는 것일까?
적묵당(寂黙堂) 툇마루에 앉아 잠시 침묵 속에 마당을 바라보다 눈을 들어 극락전과 우화루, 불명당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공간을 올려다본다. 언제일까?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이 화암사에 꽃비가 내릴 그날은?
언제까지나 이 화암사 성채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 내려가는 길은 옛길로 오르느라 우회하였던 147개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계단의 난간에는 화암사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동화의 한 장면을 담은 점토로 구운 그림들도 있다. 절 앞에서 이런 그림을 만나는 것 또한 흔한 것은 아닌데? 바로 ‘화암사 가는 길, 공공미술과 만나다!’로 완주군에서 꾸며놓은 것이다. 화암사가 성채 속에 은둔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현대적 공공미술과도 만나고 있구나. 안도현 시인의 ‘화암사, 내사랑’ 시도 걸려 있다.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 주지는 않으렵니다
잘 늙은 절 한 채라... 난간 한편에는 잘 늙은 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쓰여 있다.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글 또한 안도현 시인의 글인가? 지은이는 또 얘기한다.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치고 사실 잘 늙지 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절을 형용하겠는가.”
안시인이 잘 늙은 절이라고 흐뭇하게 바라보던 화암사도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문명의 쓰나미를 피해갈 수는 없었는지, 그 잘 늙은 얼굴에도 추태가 끼어있다. 앞서간 스님들이 그렇게 화암사로 들어오는 길을 물이 흐르는 좁은 바위 계곡길로 바싹 좁혀놓았건만, 지금 화암사는 그 길은 차마 손댈 수 없었는지 뒤편으로 고개를 넘어 들어오는 넓은 길을 만들어 4발 달린 현대문명의 이기가 거침없이 절 위편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아서라... 길이라고 다 같은 길인가?
점심을 먹고 찾아가는 곳은 모악산 금산사. 모악산(母岳山), 어머니 산이라... 모악산은 김제평야를 발밑에 바라보며 우뚝 솟아 주위의 작은 산들을 거느리고 있어 예부터 ‘엄뫼’, ‘큰뫼’라고 불리었다. 이를 한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악산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인데, 모악산보다는 엄뫼가 훨씬 더 정감이 있지 않을까?
암탉이 병아리들을 품듯이 모악산은 오갈 데 없는 민초들을 품는다. 그리하여 계룡산처럼 모악산에는 많은 무속인들이 찾아들고, 미래에 중생들을 구제하러 온다는 미륵신앙의 도량 금산사가 모악산의 혈지(穴地)에 자리 잡고 있다. 그 혈지의 기운이 흘러내려간 곳이 금산사 계곡이 빠져나온 곳에 있는 금평저수지. 금평저수지는 오리알터다. 오리알터는 오리가 알을 낳는 터가 아니라 올(來)터가 변화된 말이다. 누가 오신다는 얘기인가? 이 땅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메시아가, 미륵이 - ‘메시야’란 단어도 미륵의 산스크리트어인 마이트레야(Maitreya)에서 왔다고 한다 - 오신다는 얘기이겠지.
그러한 올터이기에 금평저수지 가의 동곡(銅谷)마을에는 후천개벽을 역설하던 강증산이 민중들을 치료하기 위해 세운 구릿골 약방이 있고, 조선의 혁명아 정여립은 39살 때 벼슬을 버리고 올터로 내려왔다. 그는 이곳에서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느냐’며 대동계(大同契)를 만들고 차별이 없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다가, 선조와 서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당하였으니, 이른바 기축옥사다. 흔히 조선의 피의 숙청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4대 사화를 들지만 기축옥사에서는 4대 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후 호남은 반역향(叛逆鄕)으로 낙인찍히고... 그뿐인가? 녹두장군 전봉준도 오리알터 아래 감곡 황새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차에서 내려 금산사 계곡을 걸어 들어간다. 길가에 거북이가 검은 대리석의 사적비를 이고 있다. 다가가보니 정화암 선생의 사적비이다. 바로 며칠 전에 ‘이회영 평전’을 읽으면서 책속에서 아나키스트 정화암 선생을 만났는데, 여기서 다시 선생을 만나게 되니 반갑다. 우당이 ‘일생의 지기’라고까지 부른 선생은 1924년 우당과 함께 한국 아나키즘 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긋는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1932년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만들어 일제 관헌과 밀정을 응징하고, 한인 부자들을 털어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등 우당 선생과 함께 치열한 독립운동을 하였지. 조국의 독립 이후에도 선생은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가 1981년 86살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그래도 독립투사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이곳에 사적비를 세워주었구나.
사적비를 지나 가다보니 왼편으로 조그만 사당 같은 건물이 있어 다가가본다. 안에는 미륵불이 있고 그 앞에는 많은 촛불을 켜놓고 한 사람이 열심히 치성을 드리고 있다. 이제 보니 건물 오른편 나무 앞에도 막걸리와 소주병이 그리고 술을 담는 제기 잔이 놓여있다. 미륵이 어서 오셔서 중생들을 구원해달라는 민초들의 소망이 미륵불을 위해 집을 짓고 치성을 드리게 하는 것이구나.
이제 본격적으로 모악산의 품안으로 들어가는데, 앞에는 어디서 모셔온 바위에 ‘母岳聖地’라고 새겨져 있다. ‘그렇겠지. 모든 것을 품에 안는 어머니 산인데, 성지라고 부를 만하겠지.’ 성지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데 이번에는 김홍섭 선생 추모비가 있다. 사도법관, 사형수의 아버지로 불리며 법조계에서 제일 존경받는 인물인 김홍섭 선생도 이 고장 출신이구나. 평생을 청빈하게 살다 간 김홍섭, 판사생활을 끝내면 시골 성당에 취직해 종지기 노릇을 하고 싶다던 김홍섭. 평소에 존경하던 그 분의 모습을 이곳에서 다시 보며 그 분의 말씀 몇 구절을 떠올려본다.
내 자신이 법률이란 이름으로 과연 남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남을 단죄하기위해서 보다 높은 안목과 지식과 인간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한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국가주의입니다. 인류보다 자기 주권을 더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모두가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는 고로 악입니다
나는 가난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를 원하지도 않는다. 부란 잠깐 이세상의 인연이 되어 왔다가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관으로서 할일을 다 하고 살다 가는 것이 내 임무이며, 이것이 곧 주님이 명하신 일이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힘없고 비천하게 사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금산사 일주문을 지난다. 금산사는 언제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762년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어 미륵신앙의 도량으로 거듭 났다. 당시는 백제 멸망의 한이 가시지 않은 때라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구원의 미륵불을 기다리는 미륵신앙의 도량으로 중창하였을 것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는데 금강산 발연사 복원기금 모금함이 놓여있다. 진표율사가 발연사를 금산사 다음 가는 미륵도량으로 세웠기에 금산사가 형제적 동지애에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리라. 화암사와는 달리 밑을 뚫어놓은 보제루 밑으로 하여 절 마당으로 진입하니, 3층의 미륵전이 금방 눈에 띈다.
미륵전으로 접근하는데 용명당 각민대사 가람 수호기가 있다. ‘가람 수호기’라는 글자에 흥미가 일어 읽어보니 구한말에 이 일대에서 불법적인 금광 채굴이 유행하였단다. ‘으잉? 이곳에 금이 있었어? 금산사(金山寺)란 이름도 그래서 나왔나?’ 김제 지역에 금구면, 금산면 등 ‘金’자가 붙은 지명이 많은 것도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사금을 채취하였기 때문이란다. 각민대사는 황금에 눈이 어두운 채굴꾼들이 신성한 예배의 장소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안중에도 없이 사리탑 아래까지 와서 금을 캐려하자, 조정에 호소하여 1901년 말에 채광이 금지되게 하였다. 그러나 황금이 눈앞에 있는데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하여 채굴꾼들이 쉽게 물러가겠는가? 이들은 절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계속 금을 캐려다 이를 막는 각민대사를 잣나무 아래에서 살해하였다. ‘오호라! 탐욕에 눈 어두운 중생들이여! 나무아미타불...’ 처음에 가람 수호기를 볼 때에 그 배치가 좀 이상하다 했더니, 바로 그런 슬픔이 깃든 잣나무 옆에 세우느라고 그랬구나.
국보 62호의 미륵전 앞에 섰다. 3층 전각이라 현판도 3개 걸려있는데, 1층에는 大慈寶殿, 2층엔 龍華之會, 3층엔 彌勒殿이라고 되어 있다. 미륵은 마이트리야(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의역하면 자씨(慈氏)이다. 그러니 대자보전은 미륵전을 좀 더 높여 부르는 이름이라 하겠고, 용화지회는 미륵불이 다시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3회에 걸쳐 설법하며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곳이 미륵신앙의 중심임을 알겠다.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766년 지었다는데, 정유재란에 전부 타버려 1635년 재건하였다. 하여튼 왜놈들은 승병들로 인하여 호남 진출이 좌절되자 이 근처 절들을 초토화시켰구나.
설명을 보니 미륵전의 터는 원래 연못이었단다. 그래서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세우기 위하여 흙으로 연못을 메우면 다음날이면 다시 파헤쳐지곤 하였다. 연못에 살고 있던 용이 자기 집을 없애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터. 이때 지장보살이 진표율사에게 숯으로 연못을 메우면 된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많은 숯을 어디서 구해올 수 있느냐는 것. 그때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창궐했다. 이 때 진표율사에게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 진표율사는 누구든지 연못에 숯을 한 짐 쏟아 붇고 그 물로 눈을 닦으면 눈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너도 나도 연못에 숯을 쏟아 넣으니 진표율사는 코 한 번 안 풀고 연못 메우기에 성공! 실제로 1985년 미륵전 보수공사를 위해 굴착기로 땅을 팠더니 검은 숯이 나왔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미륵불이 12m의 우뚝 큰 키로 서있고, 그 좌우에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이 미륵불을 호위하듯 서있는데, 2층과 3층의 광창(光窓)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해 보살들은 더욱 찬연히 빛을 낸다. 이렇게 거인 부처를 모시려고 하니 미륵전은 3층 크기로 지을 수밖에 없었겠다. 3불상의 앞은 불상의 발밑을 볼 수 있도록 계단으로 조금 내려갔다 올라올 수 있도록 해놓았다. 뭔가 특별히 볼 것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계단 밑으로 내려가니 미륵불 발밑에는 철제 연화대가 있는데, 이 연화대로 미루어보아 원래의 미륵불은 철불(鐵佛)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럼 철불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이곳이 승병의 근거지라고 불 질렀을 때 같이 녹아 없어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철제 연화대만 어둠 속에 덜렁 남아있으니 일반 대중들에게는 연화대가 아니라 솥으로 알려지고, 이 솥을 만지면 속세의 업장(業障)은 소멸되고 소원을 성취한다는 소문과 그보다 좀 더 철학적으로는 무쇠솥으로 모든 사상과 철학을 시루에 쪄내듯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 미륵전은 견훤에게는 아픔의 장소이다.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기도 하였던 견훤이었으니 당연히 금산사를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맏아들 신검에 의해 바로 그 금산사 미륵전 지하에 감금당한다. 3개월간 어둠 속에서 울분을 토하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어렵게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였으니, 후백제는 이미 그것으로 생명이 끝난 것이다.
다시 마당으로 나와 대적광전으로 가는데 앞에 보이는 탑은 보통 볼 수 있는 탑과는 달리 까만 돌로 되어 있다. 화강암이 아니라 점판암으로 만든 보물 27호의 육각다층석탑이다. 까만 점판암으로 만든 탑은 처음 본다. 그런데 탑의 기단과 꼭대기는 보통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탑은 봉천원 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하니, 아마 쓰러져 흩어져 있던 탑의 부재를 이곳으로 옮겨와 다시 세우면서 없어진 부분을 그냥 화강암으로 보충해놓은 것이리라. 그러고보니 중간의 탑 부분도 지붕만 포개놓았을 뿐 탑신이 사라졌으니, 꼭 탑이 세월의 무게에 짜부라진 것 같다.
대적광전은 미륵전에 비하면 한참 새 건물이다. 설명에는 1986년 원인 모를 화재로 법당이 전소되어 1990년 다시 복원하였다는데, 사람들은 모 종교의 광신도가 방화를 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원래 대적광전은 보물 제476호이었다가 방화로 보물의 지위도 없어졌는데, 맹목적인 광신이 아까운 보물 하나를 잿속으로 날려버렸구나. 쯧! 쯧!
불이 나기 전의 대적광전도 본래 있던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이 정유재란 때 왜놈들의 방화로 불타버린 후 다시 세운 것인데, 돈이 없어 겨우 대적광전 하나 지으면서 그전에 대웅대광명전과 극락전, 약사전에 봉안하던 5 여래 6 보살을 모두 대적광전 한 자리에 모셨단다. 두 차례의 전란으로 백성들의 살림도 바닥이 났는데, 이나마 복원한 것도 백성들의 불심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봐야겠지.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11개의 불상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렇게 많은 불상을 한 전각 안에서 보는 것, 이 또한 처음인 것 같다.
이제 발길을 보물 제26호인 방등계단 사리탑으로 옮겨보자. 나는 방등계단을 올라가면서 언뜻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의 階段을 떠올렸는데 戒壇, 즉 수계(受戒) 의식을 집행하는 단이라는 얘기이구나. 단은 네모반듯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方等戒壇이라 부르는 것 같은데, 戒의 정신이 평등하게 미친다거나, 계단이 출가자뿐만 아니라 사부대중 모두를 위한 것이기에 방등계단이라고 부른단다. 계단 위로 올라가니 방등계단은 모악산 한 줄기에서 내려온 능선의 끝 부분에 만든 단으로,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소나무 능선의 끝에 만든 臺를 뜻하는 모양이다.
사리탑은 종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종의 머리에는 9마리 용이 조각된 돌이 올려져 있고, 다시 그 위에 覆鉢과 寶珠를 얹었다. 9마리 용은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에 9마리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켰다는 전설을 표현한 것이란다. 방등계단 바로 왼쪽 앞으로 미륵전이 성큼 다가와 있다. 방등계단이 미륵상생 신앙의 도솔천을 상징한다면, 저 앞의 미륵전은 메시야 미륵이 속히 이 세상에 오기를 바라는 미륵하생 신앙의 상징이다.
단을 돌아가니 적멸보궁이 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님이 앉아 있어야 할 곳은 비어있고, 그 뒤의 창문을 통하여 사리탑이 보인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탑이 뒤에 있는데, 그 앞에 또 부처님을 모실 수는 없겠지. 적멸보궁의 공통점이다. 계단 위에는 보물 25호인 오층석탑이 있다. 보통 석탑은 저 밑의 마당에 있던데, 여기는 석탑이 계단 위로 성큼 올라왔다. 방등계단을 성스럽게 장엄(莊嚴)하는 탑이란다.
방등계단에서 내려와 김교수를 따라 대장전 앞으로 간다. 김교수가 지붕 위를 보라고 한다. ‘어? 저게 뭐야?’ 지붕 한 가운데에 탑의 꼭대기의 복발과 보주가 튀어 나와 있다. 탑을 보호하는 전각인가 하고 안을 보나, 안은 일반적인 불전이다. 김교수 왈, 원래 이 건물은 미륵전을 장엄하는 목조탑으로 세워진 것인데,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단다. 그런데 다시 복원하면서는 지금과 같은 일반 불전으로 복원하면서 다만 지붕 위에 보이는 바와 같이 탑의 꼭대기만 남겨 놓은 것이라고... 건물로는 써야겠고, 그렇다고 선배 스님들이 애써 만든 탑을 완전히 없애기는 그렇고 하여 이런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었나?
이제 그만 금산사를 떠나려 한다. 일주문으로 향하는데 보이는 건물의 현판은 한글로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라고 쓰여 있고, 현판 오른쪽에는 글씨를 쓴 서예가의 호가 쓰여 있다. ‘쇠귀’다. 쇠귀? 아하!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쇠귀 신영복 선생의 글씨이구나. 오대산 상원사에 갔을 때에도 선생의 글씨를 본 것 같은데... 선생께서는 감옥에서의 사색을 통하여 깨달은 현자로 거듭났을 뿐 아니라, 서예가로서도 거듭 나셨구나. 쇠귀 선생이 쓰신 글씨라 생각하니 글씨에 혼이 들어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다음에 찾아간 귀신사는 금산사 옆 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귀신사? 이게 뭐야? 귀신이 사는 절이란 말이야? 한자로 쓰니 歸信寺 - 믿음으로 돌아가는 절이다. 뜻은 좋다지만 아무래도 발음이 그렇다. 더구나 비구니 절이라고 하던데... 이거~ 한 번 들으면 절대로 잊어버리지는 않겠는데, 혹시 그런 효과도 노린 것 아니야? 처음 들른 화암사가 정토를 찾아가는 아미타불 믿음의 절이고, 금산사가 메시야를 대망하는 미륵불 신앙의 절이라면, 귀신사는 진리의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절이다. 주전인 대적광전으로 다가간다. 귀신사에서 영화 ‘보리울의 여름’을 촬영하였다고 하던가?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주인공도 귀신사를 찾아오고... 보통 절의 주전은 단청을 화려하게 칠하여 불자들이 절로 허리 숙이게 하는데, 귀신사의 주전인 대적광전은 나무의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소박함이 나그네를 더욱 끌리게 한다.
이렇게 귀신사는 가람도 몇 채 안 되는 조그만 절이지만, 그래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화엄10찰의 하나로 세운 큰 절이었다. 신라로서는 화엄신앙으로 백제 지역의 민심을 아우르려고 한 것이나, 미륵신앙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귀신사는 처음에는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릴 만큼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신세가 거꾸로 되어 금산사의 말사의 처지로 전락하였다. 그래도 귀신사 한쪽 경내에 모아놓은 돌 부재들의 파편을 보면서 어렴풋이 귀신사 과거 영화(榮華)를 볼 듯도 하다.
그런데 귀신사는 그 이름만큼이나 잊지 못할 것이 있다. 대적광전 뒤로 조금 올라가면 돌로 만든 사자(石獸)가 귀신사를 내려다보는데, 그런데 이 녀석이 등에 지고 있는 것이 요상하다. 바로 남자의 성기 모양을 한 돌기둥이다. 이건 또 뭔가? 비구니 절에 남사스럽게... 이곳 지형이 개의 음부 형국인 구순혈(狗脣穴)이기 때문에 이 터의 기를 누르기 위해 남근을 세운 것이라는데, 처음 화엄 10찰로 거창하게 출발할 때는 이런 짐승은 없었을 텐데, 어느 때인가 절이 쇠락하면서 민간 신앙이 이곳에 이런 사자를 세우게 한 것은 아닐까? 돌기둥의 귀두에 해당하는 부분은 한쪽 면이 많이 닳아있다. 가끔 아들 낳기를 바라는 아녀자들이 남근 모양의 돌을 갈아 물에 타서 마시곤 하였다는데, 혹시 저것도 그러한 흔적이 아닐까?
귀신사 앞쪽으로 보이는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는지 연기가 마을에 낮게 깔리고 있다. 귀신사의 가을 정취에 취해 귀신사를 어슬렁거려본다. 군데군데 기왓장에서 선시(禪詩)를 만나는데, 그 중에 하나, 고려 시대의 이규보의 시 한 수.
산중에 사는 스님
달빛이 너무 좋아
물병 속에 함께
길어 담았네
방에 들어와
뒤미처 생각하고
병을 기울이니
달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네.
달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라진 달을 따라 나도 조용히 귀신사를 벗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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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화암사..우화루...사라진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