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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까불지 말자(요1:9-13)
2013.12.8(김상수목사)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9-13)
살다보면 가끔 ‘까불지 말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까분다’는 말은 어린아이들이 부모 앞에서 재롱을 피울 때는 예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외에 대부분은 자신의 주제파악을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향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람에게 까부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까부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고, 욕하고, 큰소리친다.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어떤 면에서 보면 기도하지 않고 내가 뭔가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것도들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 앞에서 까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성경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표현한다면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우리의 마음 그릇 안에 오직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만 가득채운다고 가정해 보자. 설령 그렇다해도 우리 안에서 내 마음 속에 채워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광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전체 지식 중에서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아마 계산이 불가할 만큼 적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넓은 바닷가에서 모레 한 알 만큼의 양도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신 만큼만 알 수 있다. 그것을 계시(啓示)라고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로 이해가 안된다 해서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신이 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인양 떠드는가?
그만큼 사람은 그 지식이나 힘이나 모든 면에서 한계가 있다. 사실 아무리 지식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도 사람끼리 비교할 때 대단한 것이지 광대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까불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겸손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겸손은 곧 자기부인과도 통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왜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는가? 한 마디로 모르니까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 옛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영적으로 무식하니까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까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제 맘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무지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하는 짓이 뭔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오늘 본문인 요1:9-11을 보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예수님은 누구신가? 9절에 보면 “참 빛”이시다. 그런데 그 참 빛 되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고, 영접하지도 않았다. 왜 그랬는가? 영적으로 무지해서 그렇다.
그러면 왜 이처럼 인간이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가 되었는가? 그것은 사단에게 속아서, 범죄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 사단은 유괴범의 원조다. 학교 앞 골목에서 애들을 유괴하려고 기다리는 유괴범처럼 사단은 하와와 아담을 유괴하려고 접근했다. 그래서 사단에게 속아서 타락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마귀 사단이 자기의 아버지인줄 착각하며 살아간다. 마귀 사단은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자신이 하나님인 체하고, 자신이 아버지인체 한다. 사단은 갖가지 흉악한 방법들을 동원해서 고통을 주고, 생명을 해치며, 자신이 들어갈 영원한 지옥의 불 못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괴해서 끌고 들어가려고 한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내 주먹이나 믿어라’, ‘남자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라는 등의 영적인 독설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까분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죄악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함부로 까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준엄하다. 그것은 영원한 지옥형벌이다. 성경은 두 번 죽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20:14)
그러면 우리는 이처럼 죄악 가운데서 죽어야만 하는가? 살 길은 없는가? 얼마 전 뉴스에 “베이비 박스”라는 것이 보도된 적이 있다. 서울 관악구 난곡동에 있는 어느 작은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교회 한쪽 벽에 구멍을 내고 작은 박스를 설치했다. 그것이 베이비 박스다. 이 박스 안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돌봐주거나 입양기관 등으로 보내 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기들을 놓고 사라지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미혼모들이라고 한다. 그들 중에는 나중에 다시 아기를 찾으러 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상당수는 연락처조차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 2010년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 300명 이상의 버려지는 아이들을 받았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찬반양론이 팽팽하기는 한지만, 어쨌든 참으로 가슴 아픈 일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사야 49장15절과 시편27편 10절을 보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납치해서 죄악 가운데 끌고 다니는 악한 사단을 멸하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지옥 형벌과 저주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셨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만든 창작품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그래서 성경 로마서5장 8절과 요한복음3장 16절 그리고 요한일서4장10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여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생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
뿐만 아니라 죄의 근본적인 원인제공자인 사단을 멸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다(히13:12, 요일3:8, 히2:14-15,).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회복 된다. 얼마 전에 신앙적인 방황을 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이 교회 저 교회를 방황하던 어떤 형제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은 몸도 좋지 않았고, 그로인해서 그동안 수많은 안수기도도 많이 받았고,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성가대원으로 꾀나 오랫동안 봉사한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대화 하는 중에 사도 바울도 인용하면서 이런저런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때 그분과의 대화중에 이런 질문을 했다.
“형제는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랬더니 그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
“뭐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일 년에 최소한 40번 이상은 주일을 지키고, 최소한 일 천만원 이상은 헌금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보면 이것저것 아는 체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대답치고는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었다. 충청도 사투리로 ‘경장치도 않은 대답’을 한 것이다. 물론 그분에게 복음을 제시했고, 그 대화가 마칠 때쯤에는 영접기도도 함께 하였다.
그 형제와의 만남 후에 여러 생각들을 했다. 그 형제가 왜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을까? 그동안 그분이 만났던 많은 교회들이 문제인가? 아니면 그분 자신의 문제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여러 교회와 기도원같은 곳에서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은 제쳐놓고, 병 낫고 축복받는 메시지만을 강조해서 생긴 결과일 수 있고,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 어렵다 보니 복음을 들어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만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분의 그러한 생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착각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해 뭔가를 해야 구원받는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뭔가를 하지 못했을 때, 그 마음에 두려움을 갖는다. 이런 생각이 바로 율법주의이고, 다른 복음이고, 다른 교훈이며, 자기의 의(義)를 앞세우는 것이다. 만약 그 형제의 생각처럼 우리가 굉장한 뭔가를 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1장 12-13절이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이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곧 믿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라.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주신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지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은 그 예수님을 믿을 때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들이 애창하는 찬송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의 가사를 보라.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나 지금 죄에서 사함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이 육신 장막을 벗을 때도 겁날 것 없겠네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에 주님의 손목을 굳게 잡고
영원히 즐거운 천국에서 주 함께 살겠네“
정말 그렇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그 모진 십자가를 친히 지셨다. 그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사함받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피가 뭍은 주님의 손목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만이 천국에 가는 유일한 길이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자. 이미 영접한 사람은 계속해서 말씀과 기도 가운데 주님 안에 거하는 겸손한 삶을 살자. 교만하게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까불지 말자.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다, 훗날 천국에서 함께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자. 주님이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함께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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