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아침에 상제님께서 평일처럼 산정 공부실에서 도수를 보시고 잠시 쉬실 때 형사들이 급습하여 방자하게 추궁하였으나 상제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며칠간 수십 명의 중부도인이 진술한 바로는 아무런 혐의사실이 없으니라. 다만, 이미 입건 구속된 한경 철규 등의 혐의를 소명하자면 상제님께서 친히 충북도경 근처 사관까지라도 거둥하셔야 함을 말씀드리니 윤허하시고 청봉 등 세 자제분과 도인 정운교(鄭雲敎) 등의 시위를 받으시며 25일 청주 북문로(北門路) 북일여관(北一旅館)에 임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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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에서 한경 등이 고문에 못이겨 분별없이 시인한 내용은 개인적인 사기 · 횡령 등 혐의와 함께 유언비어 유포, 용공단체 조직 등 국가보안법 위반의 혐의이며 또 이 모두가 상제님의 명으로 범행한 사실처럼 인정되어 있었으나 조사 결과 그 실제가 아님을 판명되니라. 그러나 한경 등의 개별적인 혐의가 완결되지 않아 상제님께서는 환어하지 않으시고 1개월간을 북일여관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간간이 수사에 응하시니라. 이때 도경 사찰분실장(査察分室長) 김두길(金斗吉)의 집요한 추궁에도 사건은 더 확대되지 않았으나 한경 등 3인은 법원에 구속 · 기소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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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양력 4월 29일에 상제님께서 도장으로 환어하시는 길에 청주 화양동(華陽洞)으로 행행하셔서 도수를 보기로 하시니라. 화양동은 본시 백두대간에 속한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중간 산골인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리의 계곡으로서 사적과 명소가 많고, 중국 무이구곡(武夷九曲)과 흡사한 절경지지(絶景之地)라 하여 예로부터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유명하니라. 그 제3곡에 송우암(宋尤庵)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 의종(毅宗)에 대한 보은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만동묘(萬東廟)를 짓게 제향을 드리게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철폐한 것을 유생들이 중창하였더니, 왜가 다시 철거하여 훼손한 묘지(廟趾)와 묘비(廟碑)만 남아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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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곡에는 우암이 은거하며 학구(學究)와 교도(敎導)에 힘쓰던 암서재(岩棲齋)가 있고, 제5곡에는 우암이 문인(門人)들을 시켜 명나라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큰 문자를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와 함께 첨성대(瞻星臺) 아래 석벽에 새기니라. 그 좌측에 "배신 민정중(陪臣閔鼎重) 봉지(奉至) 여송시열등(與宋時烈等) 근배수계수(謹拜手稽首) 모륵(摸勒) 시사십칠년(時四十七年) 갑인 사월 일야(甲寅 四月 日也)"라는 작은 문자를 새겼으며, 우측에는 암벽에 세로로 석함(石函)을 파서 석개(石蓋)를 하고 이를 "석문(石門)"이라 이름하니라. 석문 아래에는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큰 문자와 "차팔자(此八字) 배신 송시열(陪臣宋時烈) 상서(嘗書) 여인자야(與人者也) 정의어차산중(正宜於此山中) 근모이륵(謹摸以勒)"이라는 작은 문자를 새겨 놓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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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하오에 상제님께서 청봉과 정운교 · 안상익 · 윤금현 등 시종을 거느리시고 승용차로 화양동에 거둥하셔서 만동묘(萬東廟)의 묘지와 묘비를 친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곳 청주 화양동은 명·청 양국(明淸 兩國)이 공존하는 곳이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와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를 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다시 암서재(岩棲齋)를 친감하시는 동안 해가 저물므로 "화양구곡을 다 볼 것은 없지마는 온 김에 제5곡까지 보고 가려 하였으나 해가 저물었으니 신도(神道)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환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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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행 중로인 청천(靑川) · 미원(米院) · 주성(朱城) 등지는 해가 지면 공비(共匪)의 출몰이 잦은 곳으로서 야간 통행금지와 군경의 경비가 삼엄하고 검문 · 검색도 심할뿐더러 도로 사정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으니라. 시종들이 야간행행을 만류하였으나 계속 차를 타시고 보은 남일여관(南一旅館)에 임어하시니 자정(子正)이 가까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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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이 고향인 금현은 상제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싶었으나 감히 상고하지 못하고 시종만 하면서 행로의 검문 대응에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을 뿐 아니라, 여관을 잡고 때늦은 수라 준비 등에 애를 쓰니라. 자정이 되어서야 수라상을 올리고 시좌하였는데 상제님께서 수저를 상머리에 한번 정저(整箸)하시자 그 순간 갑자기 뇌우전벽(雷雨電霹)이 천지를 진동하므로 시종들과 여관 사람들이 모두 무섭고 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모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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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태연히 수라를 진어하시므로 금현과 운교는 물러날 수도 없어 묵묵히 시측(侍側)하고 있으니라. 뇌전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마침내 벼락 치는 소리가 그 부근 일대를 때려 부수듯 한번 진동하더니 이내 그치고 소나기만 내리는데 상제님께서 상을 물리시며 혼자 말씀으로 "이제야 신문공사(神門公事)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겠구나. 과시 보은지지(報恩之地)로다." 하셨으나 시종들은 어의를 깨닫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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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에서 유어하시고 시종들에게 "내가 이번 길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를 보고 가려 하였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그대로 돌아가니 금현은 다음 치성에 올라오되, 그전에 이곳 일을 살펴서 포감을 통하여 나에게 자세히 고하라." 하시며 청봉과 운교를 승용차에 동승시키시고 부산도장으로 환궁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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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청주 일대에 "화양동 제5곡의 석문이 열렸다."라는 소문이 자자하니라. 금현도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인근 도인 윤석현(尹錫鉉) · 오병하(吳炳夏) · 박동한(朴東漢) · 김진협(金鎭協) 등과 화양동으로 가니 마침 상제님께서 파견하신 박종순을 만나 함께 그곳에 사는 빈재로(賓在老)를 만나니라. 재로는 본래 만동묘 창건 시에 청국에서 파송된 묘지기의 9대손으로서 대대로 봉직하다가 묘가 철거된 후에는 묘지 옆에서 농사와 주점으로 생계하는 사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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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가 일행에게 말하기를 "우암이 석문을 만들며 그 속에 무엇을 어찌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그 후 비전(秘傳)되는 전설로는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하리라.' 하더이다. 만동묘를 철거한 왜경이 그러한 전설을 말살하려고 석수를 시켜 석문을 정으로 쪼아 열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갑자기 청천벽력이 일어나므로 혼비백산하여 중지하고 그 흔적을 양회로 때우는 것을 내가 직접 목격하였나이다. 또 지난 3월 27일 밤 자정에는 번개와 함께 뇌성이 울리며 비가 쏟아지더니 석문 쪽에서 벽력이 크게 일어 첨성대가 무너지듯 진동하므로 전율경악(戰慄驚愕)하고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 석개가 열려 암벽 아래에 깨진 채 떨어져 있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석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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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현 일행이 신기하게 여기며 그곳에 가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이 세로 3척 1촌, 가로 1척 9촌, 두께 5촌쯤의 석개가 두 동강으로 갈라져서 떨어져 있으므로 맞추어 보니 "옥조빙호(玉藻氷壺)"라는 큰 문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이라는 작은 문자의 음각(陰刻)이 완연하니라. 금현 등은 그제야 이 일이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에서 대신문(大神門)을 여시는 도수를 짜신 공사와 부합되며, 또 상제님께서 "신도로써 공사하리라." 하시고 석문이 열릴 그 시각에는 "이제 신문공사를 마쳤으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리로다." 하신 비의(秘意)를 깨달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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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임규오가 도장에 올라가 상제님께 배알하고 금현으로부터 들은 "화양동 석문 열린 일"을 상고하니 용안에 미소를 띄우시고 침묵하시니라. 규오가 다시 "이는 필시 증산 상제님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짜 놓으신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가 풀림이 아니오니까?" 하고 아뢰니 "오직 결자(結者)와 해자(解者)는 동체니라." 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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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께서 <皇極神度數> 와 <大神門度數> 를 보시러 청주 화양동에 들르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5곡의 석문이 열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5곡은 <화양9곡> 의 '中' 이다. 그러니 '中5' 라고 부를 수 있다.
도주께서 공부하신 '北一 (여관)'과 수저로 神門公事 를 마치신 '南一(여관)' 에서는 천부경의 <천一><지 一 ><인 一> 이 문득 떠오른다. 하나는 삼재 뒤에 一 이 붙어 있고, 다른 하나는 <北 과 南> 뒤에 一 을 붙여놨기 때문이다.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어코 '南一(여관)' 에 가셨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5곡>이 강조되고 있는 점만은 분명하다......5곡까지 보고 가려고 했고, 공사의 결과 5곡의 석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참고)
또 어느 날 상제께서 종이에 철도선을 그리고 북쪽에 점을 찍어 정읍(井邑)이라 쓰고, 남쪽에 찍은 점을 사거리라 쓰고, 가운데에 점을 찍으려다가 몇 번이나 망설이시더니 대흥리로 떠나실 때에 그 점을 치시고 “이 점이 되는 때에 세상일이 다 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TMN43-wb5WI&t=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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